지하연습실의 사내들(2)
“재미있는 거 보여줄까?”
성이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거의 필터 끝까지 다 태운 담배를 든 채로 열심히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테이블 밑과 오디오 주변, 그리고 소파 뒤까지. 그러다 결국 쓰레기통 대신 세계의 분비물을 넘치게 끌어안은 라면 박스 근처에서 밝게 웃으며 그 무언가를 찾아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노란색 플라스틱 통이었다.
“그게 뭐야?”
“시너.”
녀석은 손가락의 담배를 입술로 옮겨 물고 노란 통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노란 통에 담겨있던 액체를 얼마 정도 소주병 안에 붓고 형광등 스위치를 내렸다. 순식간에 사방은 암흑으로 가득 차 성이의 입에 물린 담뱃불만이 뚜렷하게 보였다. 성이의 담뱃불은 천천히 앞으로 움직였다. 그러다 한 지점에서 잠시 멈칫하더니 갑자기 크게 팽창하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담뱃불의 정착지는 시너를 부은 소주병이었다. 소주병의 입구 위로 불꽃이 일고, 유리벽에 막힌 불덩이가 다시 안으로 휘어들며 벽 밖으로 빛의 형태를 한 자신의 흔적을 뿜어냈다.
유리벽을 뚫고 뿜어져 나온 빛은 느릿느릿 암흑을 헤치며 흘러 나아갔다. 그 빛은 느리고 여린 느낌으로 움직였지만, 조금의 여백도 남기지 않고 묵묵히, 그리고 빽빽하게 세계를 지배해갔다. 갑작스럽게 타오르는 불덩이와 암흑을 헤치고 나아가는 빛에 집중하는 동안 나는 잠시 처음 담배를 태우던 날의 현기증을 느꼈다. 머릿속이 멍해지고, 가슴이 뻐근했다. 테이블과 주변 바닥에 널브러진 사내들의 눈이 비로소 그 빛을 따라 빛나기 시작했다.
담뱃불이 낳은 소주병 램프는 오래 가지 않아 힘을 잃었다. 아무리 다른 세계라고 해도 연소의 법칙은 유효한 모양이었다. 주둥이에서 힘차게 위로 치솟던 불꽃은 금세 뱃속으로 사그라졌고, 유리벽을 뚫고 흘러나오던 빛은 어둠 깊숙이 닿은 곳에서부터 조금씩 숨을 잃어갔다. 화려한 잔치는 서서히 뜨겁던 열기를 식혔다. 그리고 나와 성이는 아무 말 없이 서서히 걷어지는 잔치의 여운을 지켜봤다. 그때 누군가 연습실의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또 그 짓이냐? 냄새나잖아.”
문 여는 소리에 바로 뒤이어 굴곡 없고 건조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뒤, 소주병 램프의 빛이 완전히 사그라지자 형광등 스위치 올리는 소리와 함께 맥없이 쏟아지는 빛 뒤로 목소리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덥수룩하니 깔끔하게 정리되지 못한 수염을 길게 기르고, 끝만 바깥쪽으로 살짝 휜 단발머리를 한 남자였다. 한눈에 봐도 만사가 귀찮은 듯한 모습이었다. 소매의 단추를 채우지 않은 체크무늬 셔츠는 구겨져 있었고, 베이지색 면바지는 군데군데 얼룩이 묻어 있었다. 아무런 자극도 주어지지 않은 상태의 얼굴 원형을 그대로 그려놓은 수배자용 몽타주처럼, 표정은 무심하고 딱딱했다.
“안녕하세요?”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 그에게 인사했다. 목소리도 당연히 엉거주춤한 자세만큼이나 어색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내게 말했다.
“목소리가 마음에 드는 친군데?”
그의 말을 들으며 의아해진 나는 더 어색한 자세로 고개를 돌려 성이 쪽을 쳐다봤다. 녀석은 말없이 밝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열쇠나 내놔라. 네가 연습실 열쇠 빌려달라고 하는 바람에 또 귀찮게 나왔잖아.”
“형이 얘 보고 싶다고 그랬잖아.”
“겸사겸사. 열쇠 받는 김에 좀 볼까 싶기도 했지. 너한테 싸움 잘하는 친구가 생길 줄 누가 알았겠냐?”
두 사람 사이에서 열쇠와 함께 나에 관한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계속해서 웃는 표정인 성이와 달리 남자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과 굴곡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성이의 모습이 뭔가 평소와 달라 보였다. 잘 웃는 건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눈빛이 조금 강해진 것 같았다. 늘 밝긴 했지만 조금 힘이 없어 보이던 눈빛이 생기 있게 살아났다. 그의 눈에서도 빛이 난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했다. 게다가 목소리는 전에 없이 크고 단단했다. 평소 그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뭔가 눈치를 보는 것처럼 굴곡이 많고 높낮이가 수시로 변했다. 그러나 이번 그의 목소리는 안정되고 단정한 느낌이었다.
“싸움 잘한단 얘기가 조금 의외이긴 했지만, 목소리도 그렇고 인상도 그렇고, 직접 보니 네 친구가 맞긴 맞는 것 같구나.”
그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자연스럽게 성이도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그에게 물었다.
“왜?”
“왠지 불행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같은 느낌이야.”
그가 말했다.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 것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조금 당황스럽고, 어색한 기분만 들었다.
“아, 오해는 하지 마. 나쁜 뜻은 아니야. 혹시, 기분 나빴냐?”
내 표정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무심한 표정과 단조로운 목소리는 변하지 않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그가 신경 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분이 나빴던 건 아니에요. 그냥 어려워서요.”
그 말은 진심이었다. 남이 나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것을 싫어하는 편이지만, 그의 말은 이상하게도 그렇게 기분 나쁘지 않았다.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겠는데, 왠지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그랬다.
“나는 어떤데?”
성이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그러자 남자가 처음으로 가볍게 웃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행운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그 말에 성이가 소리 없이 밝게 웃었다. 남자도 이전까지 유지했던 무표정으로 금방 돌아가지 않고 한동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쩌면 저 남자는 원래 표정이 없는 게 아니라, 한 번 지은 표정을 쉽게 바꾸지 못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왠지 연인과 농담하며 웃고 있을 때 누군가 뒤통수를 때리더라도 바로 인상을 구기지 못할 것 같은.
“혹시 별명 같은 거 있나? 뭐라고 불러야 좋을까?”
한참 만에야 무표정을 되찾은 그가 내게 물었다.
“갑자기 별명이라면……”
“마루타 어때? 아, 오해는 하지 마. 괜히 731부대니, 생체실험이니 따위 생각할 필요 없어. 나는 뭐든지 있는 그대로 봤으면 좋겠거든. 원래 마루타라는 단어는 일본말로 통나무라는 뜻이래. 그냥 통으로 된 나무일 뿐인 거지. 그냥 널 보니까 그 단어가 떠올랐어. 어떤 상황이 와도 무심히 인생을 살 수 있는 사람 같은, 그런 거.”
내 의사와 상관 없이 그는 그대로 말을 이었다. 심지어 마루타라니. 학교에서 듣던 그 단어와는 다른 의미였지만,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에게도 같은 단어를 별칭으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놀랍다기보다,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그의 설명을 들으며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통나무. 나쁘지 않았다. 바람이 불어도, 어깨 위에 새가 둥지를 틀어도, 무식하게 생긴 전기톱이나 드릴이 옆구리를 베고 들어와도 꿈쩍 않는 통나무. 어떤 상황에서도 인생을 무심히 산다. ‘오해는 하지 마’가 그의 말버릇인 모양이었다. 평소에 오해 살만한 말을 많이 하고 다녀서 그런 건지, 뭔가 오해가 생겨 크게 데인 적이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뭐가 됐든, 그가 오해로 우려할만한 부정적인 감정이 돋아나진 않았다.
오히려 생각할수록 나쁘지 않다는 느낌이었다. 그의 말처럼 정말 모든 불행 앞에서 담담하고, 인생을 무심하게 살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뭐든 구체적인 행복 따위 바란 적 없었다. 그저 흔들림없이 살아갈 수만 있으면 그걸로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전에 마루타라는 말을 들었던 그 시기와 지금은 단어의 의미뿐 아니라 나의 태도도 조금은 달라져 있었다. 나라는 사람이 그대로 이 세계에 존재하듯 마루타라는 별칭도 그대로였지만, 그가 새롭게 붙여준 의미가 뭔가 달라진 지금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좋아, 마루타. 앞으로 우리 친하게 지내보자. 나는 패리라고 불러줬으면 좋겠어. 패리라고 부르든, 패리 형이라고 부르든 그건 네 맘대로 해. 반말을 쓰든, 존댓말을 쓰든 그것도 맘대로 해. 그냥 편하게 친구처럼 생각해.”
그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무심한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게 그의 손은 따뜻했다.
“근데 패리는 무슨 뜻이죠?”
그가 손을 놓자 내가 물었다.
“별 뜻은 없어. 그냥 옛날에 오토바이 타다 사고가 나서 정신을 잃은 적이 있었는데, 깨어날 때 머릿속에서 그 소리가 맴돌았거든. 다시 살아난 기념으로 그 소리를 내 별명으로 삼은 거지.”
패리, 그러니까 스스로 패리라고 불리길 바라는 그 남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의 손끝이 덥수룩한 머리칼 속에서 가볍게 꿈틀거릴 때, 문득 어떤 냄새가 느껴졌다. 오래된 나무에서 나는 것 같은 냄새였다. 오래되었지만, 뿌리를 땅에 박고 무성한 푸른 잎사귀들로 숨 쉬던 시절의 기운을 잃지 않은 건강한 나무에서 나는 냄새. 그 냄새는 그의 것처럼 아련하기도 했고, 나의 것인 것처럼 익숙하기도 했다. 어쩌면 그와 나는 닮은 사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