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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석 Oct 28. 2024

레드 콤플렉스 16화(2부 1화)

지하연습실의 사내들(1)


책상 위의 더더 1집 케이스를 보며 성이가 물었다.


“더더를 좋아하는구나?”

“글쎄, 그보다는 Delight를 좋아한다는 말이 맞겠지. 이 테이프에서도 늘 그 노래만 들어. 다른 노래는 거의 들어본 적도 없어.”


털털털, 구형 워크맨으로 내 네 번째 더더 1집 테이프를 되감으며 대답했다. 넌 무슨 음악을 듣니? 전부터 몇 번 정도 성이는 내게 물었다. 난 한 번도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뭐랄까, 성이의 그 질문은 항상 무게감이 떨어졌다. 답변 따위는 애초에 별 필요도 없을 것처럼 툭툭 내던져지곤 했고, 타이밍도 항상 애매했다. 가령 처음 내게 말을 걸어오던 날, 갑자기 툭 튀어나와 나를 말문이 막힐 만큼 당황스럽게 했던 것처럼. 그냥 말을 거는 게 목적일 뿐, 한 번도 진짜로 그게 궁금해서 묻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정말 그 말을 한 뒤에는 아예 그 말을 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마냥 아무렇지 않게 다음 화제를 꺼내거나 제 자리로 돌아가곤 했으니까. 


“엄청 좋아하는구나. 나도 그 노래 좋아했는데. 그 노래 때문에 기타를 배웠거든.”

“기타? 너 그런 것도 할 줄 아냐?”

“그냥 밴드 잠깐 했어.”


처음에 ‘기타’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만 해도 그냥 ‘그렇구나’ 정도의 느낌이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는 거고, 재주까지 가지는 못해도 취미 삼아 굴러볼 수는 있는 거고, 성이라고 기타 치지 말라는 법은 없는 거고 - 뭐, 그런 생각이었다. 내 주변에서 기타를 친다는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으므로 조금 관심이 가긴 했지만, 별 기대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밴드’라는 단어는 달랐다. 그가 무심히 그 단어를 발음하자 순간 사람이 달라 보였다. 


‘밴드’라니. 이건 마치 축구계의 ‘선수’라는 단어와도 같은 느낌이 아닌가. 그에게도 그런 세계가 있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선수’라는 단어로 묶인 동질감과 더불어 일단 ‘밴드’나 ‘기타’와 같은 나랑은 완전히 먼 세계를 살았던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나 경외감 같은 게 일어났다.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고, 만날 애들한테 무시나 당하고 삥이나 뜯기는 한심한 청춘 따위의 이미지는 사라지고, 아마도 그 무심한 표정과 말투에서 유발되었을 이상한 신비감 같은 게 순식간에 녀석의 주변을 감쌌다.


“야, 그럼 너 기타 엄청 잘 치겠네?”

“그런 건 아니고. 내가 아는 밴드 기타리스트들 중에선 내가 제일 못하는 편이었거든.”

“멋진데?”


제일 못하는 편이고 뭐고 간에 기타리스트, 그 한 마디로 게임 끝이었다. 멋지다마다. 기타리스트 윤성! 기타리스트가 어떤 건지 별다른 이미지도 떠올리지 못하는 나였지만, 왠지 그의 이름마저 너무도 기타리스트스럽게 느껴졌다. 


“그래? 사실 별 건 아닌데.”


녀석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볼이 약간 붉어진 게 조금 당황하거나 쑥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확실히 그의 표정은 조금 의기양양해 보이기도 했다. 그런 표정에 의기양양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리 없긴 하지만, 나는 그의 표정에 숨겨진 그 느낌을 잡아낼 수 있었다. 워낙에 오랫동안 무시당하고, 기죽어 지내며 살아온 녀석이라 그는 자부심이나 뿌듯함 같은 기분마저도 그런 식으로 드러내는 모양이었다. 


“저기, 혹시 관심 있으면 내일 학교 끝나고 우리 연습실 구경시켜줄까?”


여전히 고개도 완전히 들지 못한 성이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쑥스러움과 당황스러움과 뿌듯함이 이상하게 뒤엉키고 부딪치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듯, 수줍게 지어진 미소가 참 해맑아 보였다. 


“나야 좋지.”


나는 들뜬 목소리로 그의 초대에 응했다. 기분이 좋았다. 그것은 밴드의 연습실이라는 새롭고 경이로운 세계로의 예상치 못한 초대 때문이기도 했고, 성이의 그 기분 좋아 보이는 표정과 목소리 때문이기도 했다. 


작은 상가건물의 지하를 차지하고 있는 그곳은, 어두웠다. 지하니까 처음에는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게 당연했지만, 성이가 형광등의 스위치를 올린 뒤에도 별로 밝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냥 부옇게 시야가 확보되는 정도에 불과했다. 거기다 공기는 눅눅했고, 어렴풋이 오랜 시간 쌓여 아예 공기 전체를 지배한 담배 냄새가 느껴지는 듯도 했다. 그다지 기대만큼 신비한 느낌이 드는 곳은 아니었다. 왠지 기분이 우울해질 것 같고 기운이 빠지게 만드는 분위기였다. 


“여기야. 좀 어수선하지? 지금은 밴드가 해체돼서 자주 신경 쓰지 못했거든.”


군데군데 가죽이 뜯어져 누런색 스펀지가 드러나 보이는 오래된 소파 위에 가방을 던져놓으며 성이가 말했다. 녀석의 말대로 연습실은 여기저기 너저분하게 널린 여러 개의 빈 생수병과 음료수병과 LP, CD 케이스들로 어수선했다. 


무기력하게 곳곳에 널브러진 그것들의 모습은 문득 ‘허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했다. 그들 중 어떤 것도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밖으로 뿜어내지 못했다. 몸뚱이에 새겨진 타이틀이나 브랜드명마저 완전히 기운을 잃어 그저 ‘널브러진 무엇’이라고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허무와 우울과 서글픔이 잔뜩 벤 그들은 인생의 수많은 싸움에서 패배하고 삶의 의욕을 잃은 채 싸구려 보드카를 벗 삼아 무심히 언젠가 이어질 길거리 밴드의 공연을 기다리는 사내들을 떠올리게 했다. 


  “밴드는 왜 해체된 거야?”


‘레드 제플린’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를 집어 들어 그의 재킷 위에 앉은 먼지를 쓸어내리며, 나는 물었다. 드러누운 채라도 순간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새로운 존재의 가치를 얻기를 기다리는 가련한 사내를 위해. 그것은 성이네 밴드의 음악에 길든 외롭고 지친 사내들이 아마도, 기다리고 있을 유일한 희망을 묻는 질문이었다. 


“리더였던 형이 음악을 그만뒀거든.”

“왜?”

“그건 직접 들어. 이따가 여기 올 거야. 어제 연습실 열쇠 받으러 갔는데 친구 데려온다니까 한번 보고 싶다고 그러더라고.”


나로서는 별로 내키지 않는 얘기였다. 굳이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것도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면 더욱 그랬다. 불편하고, 어색했다. 원래 사교성이 좋은 편도 아니었고, 세계와 나를 분리하기 시작한 이후에는 아예 그런 일이 불필요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도 꼭 만나야 하냐? 좀 불편할 것 같은데.”


내가 말했다. 나도 모르게 조금 퉁명스러워진 목소리였다. 그러나 성이는 내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한 탓인지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퉁명스러움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전혀 눈치 보거나 주눅이 든 기색 없는 순진한 목소리로 녀석이 대답했다. 


“내가 여기 친구를 데려온 경우는 네가 처음이거든. 알다시피 난 친구가 없잖아. 좋은 사람이야. 너도 만나면 좋아할 거야.”


녀석이 입술보호제 케이스 속에 숨겨둔 담배를 꺼내 물며 대답했다. 일회용 라이터의 부싯돌이 번쩍이더니 눅눅한 공기 한 가운데에 밝고 짙은 빛이 점을 찍었다. 형광등이 켜져 있었지만, 마치 그 공간 안의 모든 빛이 거기에서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녀석이 작게 입술을 오므려 한 모금 깊게 빨아낸 담배 연기를 공기 중으로 풀어냈다. 조심스러운 것처럼 보인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작고 섬세한 동작이었다.


“근데 넌 어쩌다 밴드를 하게 됐냐? 친구도 없었다는 놈이.”


이번에는 ‘너바나’를 집어 들며 물었다. 어린 아기가 물속을 헤엄치는 모습이 새겨진 재킷 디자인에 어울리지 않게 유난히 술 냄새가 짙게 느껴지는 남자였다.


“그 형이 넣어 준 거야. 사실은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형인데, 나한테 기타를 가르쳐준 사람도 그 형이고.”


테이블 위에는 포카리스웨트와 카스가 비스듬히 머리를 맞대고 누운 옆으로 라벨이 떨어진 소주병 하나가 서 있었다. 옷이 벗겨져 투명한 초록색 피부가 온전히 드러난 사내의 머리 위로 성이가 재를 털었다. 이미 그의 내장은 구겨진 필터와 검은색 재로 반쯤 차 있었다. 


나는 잠시 그의 목소리가 툭툭 떨어지는 담뱃재나 작게 오므린 입에서 흘러나오는 담배 연기의 형태로 이 공간에 튀어나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곳의 무성의한 소품들과 암울한 공기를 비롯하여 성이의 동작, 목소리까지 모든 것이 완전히 하나인 것처럼 보였다. 너무도 일관된 빛깔을 가진 그곳은 확실히 내가 알고 지내온 세계와는 원리도, 빛깔도, 냄새도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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