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칭 '판사 블랙리스트'라는 단어가 수면 위로 올라온 건 작년 3월 경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는 연초부터 박영수 특별검사팀에 의해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조윤전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구속되고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되고 있던 때인데요.
3월 6일 경향신문 단독보도로 대법원이 다른 판사들의 움직임을 제재하기 위해 법원행정처 소속의 판사를 종용했다 이를 거부당하자 대법원장의 사실상의 허락과 묵인하에 부당한 조치가 취해졌다는 것이 보도되었습니다. 사법부 내 '판사 블랙리스트' 사건은 이때부터 불이 붙기 시작하는데요. 이후 2017년 3월 진상조사위가 구성되고 4월 '법원행정처가 행정권을 일부 남용하긴 했지만, 사법부 블랙리스트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발표로 이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조사위의 발표 이후로도 판사들과 시민단체들은 고발과 추가 조사를 지속적으로 요구해왔고, 5월 대선으로 정권 교체와 9월 김명수 현 대법원장의 취임으로 이 사건은 재조명을 받게 됩니다. 17년 11월 김명수 대법원장은 추가 조사를 지시했고, 18년 1월 22일 약 3개월 간의 조사를 거친 후 추가 조사위는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에 대한 결과를 최종 공개하였습니다.
* 참고 자료
- 17년 3월 6일 경향신문 단독보도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3060600045
우선 두 개의 단체인 '국제인권법연구회'와 '법원행정처'에 대해 짚을 필요가 있습니다. 국제인권법연구회는 법원 내 학술 조직으로서 양심적 병역거부 등 국내와 국제적인 인권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법조인들의 자체적인 조직입니다. 최근에는 인권문제에만 그치지 않고 사법부 내 수평적인 구조와 대법원의 개혁을 위해 목소리를 내던 조직입니다.
법원행정처는 말 그대로 사법부의 업무를 위해 필요한 전반적인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곳입니다. 대한민국은 사법부, 입법부, 행정부 이렇게 삼권이 분립된 국가이기에 사법부 안에 독자적인 행정처를 마련해두는 것이죠. 인사와 회계 등 간섭을 받을 수 있는 요소들의 외부 유출을 방지하는 목적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사법부 내에서는 돈과 인사 이 두 개를 모두 쥐고 있기에 가장 막강한 권력기관이기도 합니다.
이 두 단체의 부딪힘이 이번 문제의 시작인데요. 국제인권법연구회에서 17년 2월 법관 인사제도에 대한 개혁의지를 표명합니다. 전국의 판사들에게 설문조사를 돌리고 집단적인 목소리를 모으는 작업을 진행하는데, 이 움직임을 보고 법원행정처는 '위험'이라고 인식합니다. 그래서 당시 법원행정처 임종헌 차장은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의 이탄희 판사를 법원행정처로 인사이동시키고 학회의 활동을 축소시키라고 지시합니다. 구체적인 행동 방안이 담긴 자료를 받은 이탄희 판사는 거부하며 사직서를 제출했고, 논란이 더 커질 것을 우려한 법원행정처는 이탄희 판사를 곧 일선 법원으로 인사 조치시킵니다.
이때부터 판사들의 뒷조사 동향 파일이 있다는 것이 전해졌고, 지난 22일 추가 조사위의 블랙리스트 관련 보고서가 공개됩니다. 사법부 블랙리스트와 관련한 내용은 크게 3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1) 법원행정처는 왜 다른 판사들의 움직임을 제재하려 했는가 2) 블랙리스트의 내용엔 과연 무엇이 담겨 있고 그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3) 이 문제가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세 가지를 구분해 살펴봅니다.
1) 법원행정처는 왜 다른 판사들의 움직임을 제재하려 했는가
- 추가조사위원회의 조사보고서는 크게 '본지'와 '별지'로 나뉘어 있습니다. 조사보고서 본지 37페이지 '특정 사건 담당 재판부의 동향 파악과 관련하여'의 조사 결과 내용을 보면 '법원행정처가 외부기관과 사이에 특정 재판에 관한 민감한 정보와 의견을 교환하고, 외부기관의 문의에 따라 담당 재판부의 의중을 파악하거나 알려주려 했다는 부분..'이란 문구가 나옵니다.
여기서의 외부기관은 청와대 민정수석실이고, 특정 재판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입니다. 조사보고서 별지 8의 내용을 살펴보면 청와대에서 '항소 기각'을 기대하며 재판 전망에 대해 법원행정처에 문의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재판부의 의중을 파악하려고 노력하고 있음'이란 문구와 '1심과 달리 결과 예측이 어렵다'는 문구는 법원행정처가 이미 판사들에 대한 통제력과 정보력을 가지고 있고 이에 대한 정보를 청와대 민정수석에게 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해당 문건의 5번 항목엔 사법부 내부 소장파 판사들의 댓글들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판결에 기뻐하는 댓글들을 정리하며 판사들의 동향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고, 이 댓글은 '이판사판야단법석'이라는 비공개 법조인 카페에 가입해 아카이빙 해둔 것으로 보고서는 밝히고 있습니다. 카페 운영자인 여성 법조인의 정보와 선배 기수를 통한 대처방안까지 마련해 둔 이 문건은 청와대 권력조직의 안위와 사법부 내 권력유지를 위한 목적으로 제작되어 다수의 법관들을 통제하기 위한 것으로 쓰였습니다.
즉 법원행정처가 우선적인 목적은 청와대 민정수석의 뜻을 따르는 것, 사법부 내 기존 권력유지로 좁혀집니다.
2) 블랙리스트의 내용엔 과연 무엇이 담겨 있고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 블랙리스트는 크게 5가지 항목으로 나뉩니다.
가. '국제인권법연구회 내 인권보장을 위한 사법제도 소모임'(약칭 인사모) 및 공동학술대회 관련
나. 판사회의 경선 관련
다. 사법행정위원회 관련
라. 특정 법관들의 동향 파악 관련
마. 원세훈 국정원장 담당 재판부 동향 파악 관련
인사모라 약칭되는 국제인권법연구회 내부의 소모임 토론회에서 '수직적 사법행정체계'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습니다. 블랙리스트 내부엔 이 토론회에 참석한 판사들의 정보와 토론 내용, 사법행정체계에 대한 건의 후 다른 법관들의 반응, 외부 칼럼에 대한 분석이 담겨있습니다. 그룹의 핵심 리더들에 대한 세세한 정보는 물론 향후 대응방안도 담겨있습니다. 각 항목들에 대한 세부내용은 상이하지만 주요 발언을 하는 판사들과 그 주장에 대한 판사들의 반응을 정리한 것은 동일합니다.
특히 사법행정위원회의 위원 후보자들에 대해선 추천 기준을 별도로 마련하여 리스트를 만들었습니다. 왕당파라 통칭되는 통제 가능한 판사들만을 후보로 추천하면 오히려 위기 상황을 초래할 것이라며 진보 성향의 법관들과 여성 법관-장애가 있는 법관을 분석해 문제없는 우선순위를 만들었습니다.
사안의 대응방법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건 '선배 기수'의 활용입니다. 판사를 설득하거나 종용할 때 그가 신임하는 선배 판사를 투입시킨다는 것은 판사들 간의 관계를 모두 파악하고 있고, 선배기수 판사에 대한 통제력이 어느 정도 확보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사법부 내 뿌리 깊은 기수문화와 경직성, 상위 권력기관과 판사들 간의 어두운 커넥션을 목도합니다.
3) 이 문제가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것은 무엇인가
- 행정부와 입법부는 국민의 힘으로 선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법부는 그렇지 않습니다. 헌법이라는 것은 국가와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중심축이고, 그만큼 전문적인 지식과 법적 소양이 필요한 영역입니다. 하지만 사법부는 그런 맹점을 이용해서 자신만의 권력을 구축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행정부의 안위를 돌보아주는 존재로 스스로의 가치를 정의하고 맙니다. 박근혜 정부와 이명박 정부 아래 수많은 정치권력들이 사법부의 문턱에서 너무도 쉽게 건너오는 걸 우리는 보았습니다. 재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리스트는 우리에게 있어 가장 큰 가치인 신뢰를 정면으로 부수고 있습니다. 사법부의 판단에 대해 신뢰가 가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공동체적 신뢰란 추축은 무너집니다. 행정부를 견제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곳은 사법부입니다. 그만큼 공정하고 깨끗해야 하는 곳에서 어두운 리스트가 나왔습니다. 이 리스트를 수사할 수 있는 곳도 다시 사법부가 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사법부를 다시 어떻게 견제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하는 중요한 사안이 되었습니다.
- 이 보고서는 일부입니다. 비밀번호가 걸려있는 파일은 열어보지도 못했고, 법원행정처 내부의 컴퓨터도 살펴보지 못했습니다. 윈도우 내부 검색에서 몇몇 검색어를 설정함으로써 나온 파일들만을 살핀 것이 이 정도입니다. 김명수 대법원장의 후속 조치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동시에 권력의 교체가 모든 시스템의 정상화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행정권력의 수장만 바뀌었을 뿐 사법부 내 적폐는 이토록 두껍게 쌓여있었습니다. 소장파 판사들이 이야기 한 법원 내 권력개편, 특히 상고법원의 설치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합니다. 사법부에 대한 권력 감시를 해내야 하는 것, 그것이 이번 리스트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가장 강력한 지점입니다.
* 보고서 전문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www.peoplepower21.org/Judiciary/1547575
글쓴이 우동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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