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3월 말, 새로 이사한 곳은 그전까지 한 번도 가본 적 없던 낯선 동네였다.
지하철 2호선을 자주 탔던 내가 단 한 번도 하차하지 않고 수만 번, 무심히 지나쳤던 역 주변 동네였다. 매번 2호선 차창 밖으로 이 역의 이름이 보일 때마다 나는 손목시계를 보고 목적지까지 남은 역의 개수를 가늠하곤 했었다. 차창 밖으로 지하철의 속도만큼 횡으로 풍경을 뭉개며 사라졌던 낯선 플랫폼으로 첫 발을 내디뎠다. 이 낯선 곳이 새로운 나의 동네가 되는 순간이었다. 기분이 묘했다.
사실 낯선 곳으로의 이사는 처음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익숙한 일이어야 했다. 20대 중반 무렵 처음 자취를 시작한 후 이번 이사를 포함해 나는 벌써 일곱 번의 이사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난 일곱 번의 이사 중 다섯 번은 해외에서였다. 심지어 첫 자취가 해외였다.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단 한 번도 해외에 가본 적 없던 나는 20대의 절반을 국경과 대양을 넘나들며 보냈다. 당시 나의 입버릇은 "내 사주엔 역마살이 꼈어"였다. 짧게는 3개월, 길게는 3년 가까이 살기 위해, '낯선 곳'이라는 표현이 가볍게 느껴질 정도의 이방의 땅에서 몇 번이나 '나의 방'을 찾아 이사를 다녔던 나였다. 그러니 한국, 서울의 얼마나 낯선 동네일지라도, 매번 지나치며 발 한걸음 내디뎌 본 적 없는 동네일지라도, 이 이사는 그간의 이사 경험에 비하면 정말 사소한 이벤트에 지나지 않았어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지난 이사는 참 다사다난했다. 교환학생 신분으로 학교의 도움을 받아 편하게 방을 구했던 일본에서의 첫 자취를 제외하면 삶은 마치 나의 한계와 성장을 시험하려는 듯 내가 이사를 할 때마다 그 난이도를 하나씩 높여갔다.
처음은 미국이었다. 일본에서의 교환학생 경험 이후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해 당장 어느 곳이든 달려갈 준비가 되어 몸이 근질거리던 상태였다. 첫 해외생활에서 전 세계의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그들로부터 받은 영감과 열정을 양손 한가득 쥐고 귀국했던 나는 새로운 기회를 모색했고, 그렇게 미국을 가게 되었다. 물론 미국은 한 번도 가본 적도 없고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 곳이었지만 어떻게 운 좋게 방도 미리 구했겠다, 미숙하나마 언어가 아예 통하지 않는 곳도 아니겠다, 자신감이 넘쳤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겠다는 포부와 희망, 설렘이 미국행 짐으로 가득 찬 트렁크 사이로 실실 흘러나왔다.
방을 미리 한국에서 구했으니 이사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다만 공항에서 택시를 탈만한 여유가 없던 만큼 방이 있는 건물까지 지하철역에서 도보로 짐을 옮겨야 하는 게 과제라면 과제였다. 하지만 구글 맵으로 가는 길도 철저히 예습했고, 이삿짐이라고 해봤자 일본에도 가져갔었던 트렁크 하나가 전부였기에 큰 문제는 아니었다. 한국인의 평균 키보다 한참 모자란 내가 한 손으로 지도를 보며 한 손으로 내 몸만 한 트렁크를 끄는 게 결코 간단한 일은 아니었지만, 넘치다 못해 흘러나오는 자신감과 설렘이 어떤 우려도 지워냈다.
"야! 너가 그 트렁크에 들어가겠다!"
트렁크를 끌며 역에서 내려 한 10분쯤 걸었을 때였을까, 누군가가 내게 소리쳤다. 눈은 지도에, 손은 트렁크에만 잔뜩 집중했던 나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돌아보니 길 모퉁이 작은 슈퍼 옆에 낯선 아저씨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선풍기를 쐬며 날 보며 웃고 있었다. 과연 길거리에서 낯선 사람에게도 친근하게 말을 건넨다는 미국다운 첫인사였다. 짐을 옮기는 것에 집중하던 나는 아저씨의 농담에 그제야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길 모퉁이 볼록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훑어보았다. 지하철역에서 나와 얼마 걷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얼굴이 새빨갛게 익어 이마에서 땀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제야 한국과도, 일본과도 다른 미국 여름의 바싹 마른 따가운 햇살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한 손으로 트렁크를 잘 끌고 가고 있다고 생각한 것과 달리, 나도 모르게 내 몸만 한 트렁크를 온몸으로 지탱하며 밀고 있었는지 반바지 아래로 드러난 양 무릎이 새빨갛게 까져있었다. 한눈에 봐도 이 동네에 처음 온 것 같은 키 작은 이방인이 자기 몸만 한 트렁크에 매달려 가는 모습이 얼마나 웃겼을지, 아저씨의 말이 이해가 갔다. 구글 맵으로 예습했을 땐 분명 도보로 5분이면 도착할 방이었는데, 도착하고 보니 30분이 넘어있었다. 트렁크를 방에 들여놓고 땀에 완전히 젖은 셔츠만 갈아입은 후, 당장 필요한 생필품을 사러 역 주변으로 다시 향했다. 그제야 알았다. 역에서부터 아저씨가 앉아있던 모퉁이 슈퍼까지의 길이 오르막길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프랑스로 이사했을 때는 난이도가 훌쩍 뛰었다. 대학 졸업 후 취직과 진학 사이에 끝없는 고민을 하던 내가 선택한 진학을 위한 프랑스행이었기에 부담과 긴장으로 양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더 어려운 도전이 얹어졌다. 바로 방을 구하는 것이었다. 일본과 미국에서와 달리 프랑스로 가기 전에 미리 방을 구하지 못했던 나는 당분간 에어비앤비에서 지내면서 현지에서 직접 발로 뛰어 방을 구해야 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프랑스에서, 기초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프랑스어만 겨우 겨우 익힌 내가, 영어도 잘 통하지 않는 파리에서 방을 구한다는 건 큰 난관이었다. 일본과 미국에도 가져갔던 그 트렁크에는 설렘과 기대, 자신감보다 불안과 긴장이 더 많은 무게를 채웠다.
하지만 프랑스의 첫 에어비앤비 숙소 앞에 도착하자마자 예상치 못했던 더 큰 난관에 부딪혔다. 방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 모습만을 상상하고 대비했던 나는 그전에 가장 큰 첫 번째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프랑스에 대해 무지했던 나는 전철역에서 도보로 3분 거리에 있다는 것만 보고 프랑스의 오래된 아파트의 6층 방을 에어비앤비로 예약했다. 공항에서부터 내 몸만 한 트렁크를 끌고 꾸역꾸역 건물에 도착해서야 알았다. 프랑스의 오래된 아파트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곳이 많다는 것도, 프랑스의 6층은 한국에선 7층이라는 것도. 오래된 프랑스 건물답게 트렁크 하나를 올리면 사람이 지나갈 틈도 없을 만큼 좁은, 빙글빙글 나선형으로 끝없이 감겨 올라간 계단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계단 위로 정성스럽게 깔린 카펫은 트렁크 바퀴가 중력을 타고 미끄러지기 딱 좋을 만큼 부드러웠다.
위로 올라가고 싶은 내 마음에 역행해 자꾸만 아래로 향하는 트렁크에 끌려가지 않으려 온몸으로 발버둥을 치며 계단을 올랐다. 로비에서 첫 계단을 오르고 약 한 시간이 지나서야 7층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양손이 벌벌 떨렸다. 한 칸 한 칸 트렁크를 올릴 때마다 부딪혔던 양 무릎에는 벌써 푸르스름한 멍이 올라왔다.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처음 와보는 낯선 땅, 그리고 내디딘 첫 발에 걸린 카펫이 깔린 좁은 나선형 계단. 출국 전부터 긴장과 불안으로 시작됐던 편두통보다 트렁크를 옮기면서 생긴 근육통의 고통이 더 커지자 울음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다. 하지만 나는 7층까지 트렁크를 끌고 온 힘으로 울음을 꾹 눌렀다. 나는 이제 막 에어비앤비에 도착했을 뿐 아직 내 방은 구하지 못했다는 현실이 코 앞에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랬던 내가 프랑스 생활 이후 오스트리아로 이사했을 땐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그것도 공항 한복판에서. 아직도 잊지 못하는 나선형 계단에 발을 내딛으며 시작한 프랑스에서의 삶은 3년간 이어졌다. 3년 동안 두 번의 이사를 거치며 역시 다사다난했지만, 결국엔 방도 구했고 엘리베이터 없는 아파트에 짐을 함께 들어 옮겨줄 내 사람들도 만났다. 하지만 나는 떠나야 했다. 낯선 땅이 시간과 함께 아무리 익숙한 나의 동네가 된다 한들, 이방인에게 허용된 시간은 길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한 여정이 프랑스에서 끝나길 간절히 바랐지만 나는 또 한 번 낯선 땅으로 옮겨야 했다.
낯선 도시로의 네 번째 이사. 프랑스에 왔을 때처럼 집을 미리 구하지 못해 한동안 또 에어비앤비에 머물며 현지에서 방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3년간 유럽을 조금이나마 더 알게 된 나는 에어비앤비를 검색하며 엘리베이터가 있는 건물인지, 엘리베이터는 트렁크를 실을 만큼의 크기인지부터 확인하고 예약을 마쳤다. 카펫 깔린 나선형 계단의 악몽은 재현되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삶은 언제나 순조롭게 흘러가는 듯 보일 때 중지 손가락을 얼굴 앞으로 들이민다고 하던가. 나는 오스트리아 공항에 무사히 도착했으나, 내 짐은 그렇지 못했다. 짐을 잃어버린 것이다. 국경과 대양을 몇 번씩 넘어 다니면서도 단 한 번도 공항에서 짐을 잃어버린 적이 없던 나는, 한 시간이 넘도록 하나둘씩 짐이 줄어드는 레일 앞에 서서 멍하니 그 내 몸만 한 트렁크를 기다렸다. 짐을 잃어버렸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설마, 아닐거야' 애써 부정도 하며 스스로가 쓸데없는 상상력이 과하다고 자책하며 현실을 회피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나와 함께 도착했던 승객들이 하나 둘씩 짐을 챙겨 자리를 뜨고, 결국 텅 빈 레일에 홀로 남겨졌을 때 내 앞에 떨어 진 것은 한시간이 넘도록 기다린 트렁크가 아닌 더이상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빈 양손이 떨려왔다.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항공사 직원에게 문의하고 기다리기를 또 한 시간. 짐은 아직 프랑스에 남아 있고 언제 오스트리아에 도착할지 모른다, 확인되는 대로 연락해주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다행히 짐이 국제 미아가 된 것은 아니었으나 3년간의 프랑스에서의 삶 이후 내몰리듯 도착한 이 낯선 땅에서의 낯선 경험에 놀란 나는 항공사 직원 앞에서 눈물을 왈칵 쏟았다. 낯선 도시에서의 첫날, 온몸이 땀으로 젖고, 온몸이 시퍼렇게 멍들고, 근육통으로 잠에 들지 못했던 프랑스에서도 방을 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울음을 꿀꺽 삼켜냈던 내 지난 경험이 무색하게 그냥 울음을 쏟았다. 3년간 지어 올린 나의 삶을 등지고 와서였을까. 내 20대의 끝이 바로 앞인데 난 아직도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해서였을까. 오스트리아에서는 과연 난 얼마나 머물 수 있게 될 까. 나는 과연 이곳에서는 해답에 가까워질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해답이란 것은 존재하는 것일까. 찾을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궁극적으로, 난 오스트리아에서 제 때에 내 방을 구할 수 있을까. 방을 구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머릿속에서 꼬리를 물듯 끝없이 이어지는 물음표들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하루 종일 빈 배를 움켜쥐고 겨우 이 낯선 땅에 도착했는데 맞이한 첫인사는 '분실된 짐'이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내 짐을 기다리기를 한 시간. 항공사 직원의 답을 기다리기를 한 시간. 그리고 쏟아지는 눈물을 갈무리하고 진정하기를 한 시간. 난생처음 와본 오스트리아 공항에서 진을 빼 더 이상 걸을 힘도 없던 나는 없는 돈을 모아 택시를 타고 에어비앤비로 향했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택시에서 내려 토를 했다. 깨끗하기로 유명한 비엔나의 길거리에 첫 발을 내딛자마자 토를 쏟았다.
'지속가능한 공백기'를 위해 했던 일곱 번째 이사는 참 간단하게 끝났다. 도보 5분 거리를 30분에 걸쳐 트렁크를 옮길 일도, 끝없이 똬리를 튼 나선형 계단을 트렁크와 함께 등반할 일도, 그렇게 옮겨 다녔던 트렁크를 잃어버리고서 쓰레기 하나 없는 깨끗한 길거리에 속을 게워낼 일도 없었다. 지난날들에 비하면 정말 간단한 이사였다. 이사를 하고 나는 그동안 나와 함께 일본과 미국, 프랑스, 오스트리아를 오갔던 트렁크를 버렸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나와 함께 낯선 언덕과 계단을 오르고 때론 국경을 제때 넘지 못하고 미아가 되었던 트렁크의 고무 바퀴가 다 닳아 부서져 손만 대면 툭 하고 고무조각이 떨어져 나갔다. 생각해 보면 오래 버틴 것이었다. 그 일련의 일들을 겪은 후 한국에 다시 돌아올 때까지, 그리고 한국에서 첫 직장을 얻어 여섯 번째 이사를 하고, 다시 그만두고 일곱 번째 이사를 할 때까지 용케도 잘 버텨주었던 것이었다.
이사를 마쳤는데 땀도, 멍도, 근육통도 없는 몸으로 침대에 눕는 경험이 신선했다. 이사를 마치고 새 방에서 맞이한 첫날밤. 몸을 침대에 뉘이고 아직은 낯선 천장을 바라보았다. 지난 몇 주간 이사를 잘 끝내자는 것에 골몰했던 것에서 겨우 해방된 나는 후련함을 기대했으나, 어쩐지 후련함보다 비참함이 침대 밑부터 스멀스멀 올라왔다. 편하게 이사를 마쳤는데, 몸이 아프지도 않은데, 짐도 잃어버리지 않았는데 그간의 모든 낯선 땅에서 보낸 첫 날 보다 더 무겁고 질척거리는 비참함이 엄습했다. 침대에 누워 바라본 깜깜한 천장이 마치 갯벌 같았다.
'지속가능한 공백기'를 준비한다는 허울 좋은 핑계를 들며 낯선 동네로 이사 왔지만, 사실 난 이곳에 올 이유가 없었다. 목적이 없었다. 그동안 이사를 다녔던 낯선 도시들에서조차 뚜렷했던 목적이, 방을 구하고 짐을 풀면 바로 시작해야 할 새로운 학업이나 직장이 이곳에는 없었다. 나는 내일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한 달 후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 무엇 하나 결정된 것 없이 그저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목적지이길 바랐던 곳들을 경유지로 지나치고서, 그동안 지하철로 수만 번 지나쳤던 경유지에 불과했던 이곳에 나는 이르게 된 것이다. 목적지를 찾아 그렇게 헤매던 내 지난날들이 무색하게 시간과 실패에 떠밀려 나는 이곳에 이르렀다. 낯선 곳에 피, 땀, 눈물을 흘리며 내디뎠던 첫 발보다 정해진 '내일' 없이 짐을 푼 이곳이 한없이 더 아득했다.
갯벌 같았다. 내딛을 때마다 바닥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불안감과, 끝없이 펼쳐진 아득한 목적 없는 내일이, 그렇게 침대 밑에서 부터 올라오는 비참함의 질척거리는 습도와 깜깜한 낯선 천장이 꼭 갯벌 같았다. 난생처음 가보는 낯선 도시로 향할 때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에 내 몸만 한 트렁크에는 점차 설렘과 희망보다 불안과 긴장이 가득 차올라 무거워져 갔지만, 그래도 버틸 수 있었다. 역시 한 치 앞을 알 수 없었으나, 목적을 갖고 내딛는 발 끝에선 땅의 단단함이 느껴졌으니까. 낯선 땅에 발을 내딛는 건 전혀 두렵지 않았기에 그렇게 낯선 땅을 돌고 돌아왔지만, 발을 내디딘 땅이 이렇게 흔들리는 건 처음이었다.
오르막길인줄도 모르고 올랐던 길이 더 나았다. 끝없이 미끄러지던 나선형 계단이 더 나았다. 내가 노란 토사물로 물들인 오스트리아의 깨끗한 거리가 더 나았다. 다사다난했던 지난 여정을 함께 했던 트렁크가 이곳에서 수명을 다하고 부서졌듯, 가만히 있어도 땅 밑으로 끌려갈 것 같은, 끝이 보이지 않는 갯벌 같은 이곳에서 나도 버틸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사 온 첫날 폐기 된 트렁크처럼, 나도 앞으로 조금도 나아가지 못한 채 갯벌 한가운데에 홀로 남겨져 결국 밀물에 삼켜져 버려, 결국 폐기 될 것 같았다. 그동안의 실패가 쌓이고 쌓여 내가 이 갯벌에 이른 순간, 이곳을 빠져나가기엔 이미 너무 늦은 것 같았다. 밀물이 벌써 발목까지 차오르는 것 같았다.
2022년 4월 1일. 나는 갯벌로 이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