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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삭바삭 Dec 28. 2023

잔잔한 수면에는 돌을 던질 것

나를 지키는 워킹맘으로 살 수 있을까?

오늘은 잠시 난치병 아기를 낳은 엄마의 이야기를 해볼까.


디자이너로만 16년을 살아온 만 38세 평범한 대한민국 워킹맘.


목표가 생기면 빨리 해치워 버리는 성격이라 학점이수를 일찌감치 해버리고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던 때가 2007년이었던가? 

대학교 같은 과 선배가 소개해준 에이전시 수습인턴이 시작점이었다. 그 당시 업계에서 국내에서 가장 잘 나가는 1위 회사(라고 알고 있었다)였기 때문에, 원래의 꿈과는 상관없이 선택한 

'경험'을 위한 첫 발이 요새 말하는 가스라이팅의 시작이었고 그 가스에 취하여 그때 몸담은 직무로 눌러앉아 순수한 일개미로 16년을 살고 있다. 


그동안 참 다양한 사람들, 우여곡절을 경험하고 3번째 회사에서 10년째 버티고 있다. 


이 회사에서 9년간의 이미지는 

자신감 있어 보인다. 일에 욕심이 있고 잘한다. 당차다.라는 평가를 많이 받은 것 같고, 

그 결과로 대부분의 일감을 획득했다. 

그 과정의 에피소드는 책 한 권 분량이 넘을 만큼의 스트레스가 동반되었으나 언제나 시기적절하게 쏟아지는 달콤한 피드백은 적절한 보상을 받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필 또 가지고 있는 강점 하나가 회복탄력성인 터라 점점 더 회사와 일과 성과에 깊게 취해 있던 나는 중요한 '일'이 많다는 이유로 미루고 미루던 임신을 30대 후반에 맞이하고 아이를 낳고, 아이의 아픔을 경험하며 그동안 짙은 안개에 취해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기록하고 보니 16년간의 서사가 꽤나 단출하다.







임신을 하니 시선이 달라졌다고 느껴진다. 

괜히 움츠려 들고 위축된다.

동료 간의 2000년대의 '정' 이라던지 '의리'와 같은 단어는 다들 잊은 걸까? 


출산을 하고 오니 더욱더 달라진 평가는 내 호르몬의 영향일까, 잠재되어 있던 내면의 피해의식일까? 


예민 수치가 극도로 치솟는다. 


아기의 치료과정을 겪다 보니, 세상을 보는 관점과 시야가 180도 달라진 이유일테다. 

원래도 진지한 성격이었으나 더 진지해졌고, 심각해졌음을 느낀다. 하지만 예전처럼 불같은 화가 솟구치더라도 이제는 마음 한구석에 '그러려니' 할 수 있는 메타인지 작동이 수월해짐을 느낀다. 


오락가락, 감정 RPM이 고장 난 것 같다.


특히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영혼이 상처 입는 상황에 대해 대처가 쉽지 않은 것이,

이럴 때 보통은 드라마처럼

난 엄마니까 강인해! 이런 거에 무너지지 않아!라고 속으로 외치지만 웬걸

출산 호르몬의 잔재는 도대체 얼마나 지속되는지

화장실에서, 퇴근길 운전하며 얼마나 눈물을 쏟아내는지 모른다.


위축된 마음은 생각을 많이 하게 했다. 말 수도 적어지게 한다. 


예전과 똑같은 마음으로 업무에 임하고 있는데 육아와 회사일을 병행하기 힘에 부치고 시간이 부족하다. 둘 다 잘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심지어 육아는 남편이 도맡고 있는데 일에만 집중이 되지도 않는다. 


밤 9시까지 업무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픈 아기가 눈에 밟히는데 말이다. 

상사에게 "챙겨야 하는 일과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실장님이 말했다. 


"너 아기 낳았으니까 돈 벌어야 하잖아."

"웃어, 웃어야 아픈 아기한테 복이 가지."


조금만 불편한 이야기를 하면 아기의 아픔을 이야기하며 입을 닫게 만들었다. 

걱정해 주는 것 같았지만 바로 팀장 레벨도 내렸다. 


자존심은 나의 기억이고, 회사는 이익이 되는 선택을 한 것이겠지?


영혼에 상처는 계속 났지만 바닥까지 내려와 움츠려 숨죽여 있어 보니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다. 


어쩌면 아기가 기적을 만드는 동안, 엄마도 살린 기분이다. 


위축되어 고요해져 버린 마음이 안개에 잠식되기 전에 깨어 다행이고, 이제 이 안개를 내 손으로 휘적휘적 걷어내야 할 타이밍이 왔다. 






이제라도 다시 시작할 마음이 생겨서 다행이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모르겠지만 적어도 확실히 알게 된 것은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나의 모습이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

'출산' 때문에 침묵해서도 안된다.

'출산'한 엄마라서 위축되면 안 된다.


스스로 고요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잔잔한 수면은 무섭다. 

잔잔한 수면에는 안개가 낀다. 

잔잔한 수면에는 자의든 타의든 돌을 던져서 물결을 일으켜 줘야 한다. 




얼마 전 한 달 먼저 출산한 회사 동료가 나에게 짤 하나를 보내줬다. 

어이없는 웃음이 피식 나온다. 별 것 아닌 것에도 이렇게 실 없이 웃는데 오늘 하루 얼마나 웃을 일이 많을까. 상상해 본다. 내일은 어떤 웃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물결이 일었다. 

이제 다시 흘러갈 준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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