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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가다 May 22. 2024

역할놀이

  맘카페에서 한 어머니의 고민 글을 보다가 빛보다 빠르게 댓글을 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저희 아기는 이제 5세 됐어요(여아) 근데 정말 하루죙~~~일 역할놀이만 합니다. 블록을 갖고 놀아도 역할놀이. 만약 역할놀이 할 만한 인형이 없으면 사물로도 역할놀이를 합니다.. 다른 집도 그런가요? 너무 힘들어요 ㅜㅜ’

  난 첫 번째로 댓글을 달았다.

‘남아인데 7세 초까지 미친 듯이 역할놀이만 했어요. 다행히 이제 8세 막 되었는데 잘 안 하네요. 힘내세요!’(나는 이때만 해도 이제 역할놀이를 좋아하지 않는 나이가 된 거라고 굳게 믿었지만 아니었다. 몇 달 후 잠시 휴식기를 거치고 또 미친 듯이 역할놀이를 원했기 때문이다.) 

  

  나의 댓글 뒤로 수많은 역할놀이 피해자들이 고통을 공유했다.

  동동이는 도라에몽을 좋아한다. ‘내가 어렸을 때 즐겨보던 만화를 내 아이도 좋아한다면 기분이 어떨까.’라는 생각에서 보여준 만화에 푹 빠지게 된 것이다. 하도 도라에몽 친구들 피규어를 사달라고 해서 인터넷을 뒤져서 ‘도라에몽, 진구, 비실이, 퉁퉁이, 이슬이’를 사 준 이후로 동동이의 모든 놀이는 역할놀이가 되었다.


- 블록으로 집을 만들어서 도라에몽 친구들과 파티하는 놀이.

- 색종이로 괴물을 만들어 도라에몽 친구들과 무찌르는 놀이.

- 보드게임판을 만들어 도라에몽 친구들과 모험하는 놀이.

- 클레이로 음식을 만들어 도라에몽 친구들과 식당놀이.

  

  나열하자면 끝이 없었다. 더 황당한 건 자기는 그냥 동동이고 다섯 명의 역할을 모두 내가 떠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슬이 목소리가 조금 굵어지면,

“엄마 이슬이 목소리가 왜 그래? 감기 걸린 거야?”

비실이 목소리가 덜 간사하면,

“엄마 비실이 목소리가 도라에몽 목소리 같잖아!”하며 사정없이 지적을 해댔다.

  

  그 역할놀이가 1년이 되어갈 무렵 나는 한계에 다다랐다. 역할놀이는 진심으로 몰입해야만 즐길 수 있는데 나는 파티 놀이도, 악당을 무찌르는 놀이도, 그 온갖 놀이가 진심으로 너무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캐릭터 목소리 흉내를 낼 때는 누가 보고 있지도 않은데 창피함에 숨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눈치가 빠르다. 내가 진심으로 그 역할에 몰입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대사들이 나태해질 때마다 내게 집중하라며 다그쳤다. 결국 난 짜증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이거 재미없어! 안 할 거야! 엄마 이제 도라에몽 놀이 안 해!!”

  참 부족한 엄마다. 동동이는 금방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땐 미안한 느낌도 들지 않을 정도로 역할놀이가 싫었기 때문에 모른 척했다.

  

  다른 인물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이들과 역할놀이를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어떤 상황을 도라에몽과 진구, 비실이, 퉁퉁이, 이슬이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 입을 빌려 말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이 어려움은 나의 생활 속에 그대로 나타난다.


  2022년의 우리 반 학생들은 나 때와는 많이 다르다. ‘나 때’라는 단어를 쓰는 걸 보니 나도 이제 꼰대가 되어가는 걸까 싶어 겁도 나지만 전과 지금의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예전엔 ‘생리결석’이 없었다. 지금은 여학생에 한해서 1달에 1번 생리결석을 쓸 수 있고, 이 결석은 개근상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 인정결석으로 처리된다. 물론 정말 너무 아파서 학교를 결석해야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학교에 나오기 귀찮거나, 늦잠을 잤을 때, 또는 모의고사 때 생리결석을 사용한다. 교사들은 대부분 그런 행동을 좀 얌체스럽다고 생각하는데 고3 7월 모의고사에 자기 반 여학생 중 7명이 생리결석을 쓰니 화가 나기도 한다.

“오늘은 아주 생리로 대동단결하는 날이네요. 그 반은 몇 명이나 빠졌어요?”

“우리도 지금 연락 오고 난리도 아니에요.”

“우리 반 애는 어제 아예 오늘자로 생리결석 쓰겠다고 통보하고 갔다니까요.”

  

  교무실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가 문득 생각했다. 교사는 수업 때문에 학기 중에 연가 사용이 어려운데 만약 아무런 제약 없이 생리결석을 쓰게 해 준다면 나는 과연 쓸까? 다시 생각해도 쓸 것 같다. 수업 부담만 없다면 자주 쓸 수도 있을 것이다. 합법적 결석제도라면 내가 학생이라도 공부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쓸 수 있고, 만약 내가 공부를 일찍 놔버렸다면 더 자유롭게 쓸 것이 분명했다. 어린 학생들을 유혹하는 이 제도는 필요하지만 대학에 출결 특기로 아예 반영되지 않기에 이런 꼼수가 빈번하다. 매력적이면서도 허점이 많은 이 제도를 내 상황에 대입해 보니 그동안 조금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던 학생들의 입장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런 역지사지도 동동이와의 역할놀이 덕분이다.

  

  이제 동동이는 유치원 졸업을 갓 앞둔 8세가 되어 더 이상 역할놀이를 하지 않는다. 대신 포켓몬스터 피규어를 가지고 혼자 놀고, 카드와 띠부씰을 모으고, 포켓몬스터 게임을 하러 마트에 가자고 한다. 그때의 역할놀이가 조금 그립기도 하지만 이건 과거를 미화했기 때문일 것이다. 역할놀이는 여전히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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