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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가다 May 22. 2024

제발 내 얘기를 들어주세요

   이제 막 8살이 된 아들이 학습지를 한다고 앉아서는 그림만 그리고 있는 걸 보고 남편이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공부할 때는 딱 앉아서 공부만 해야지!” 그러자 동동이는,

“아 진짜 지금 중요한 거 하고 있다구요!” 

“지금은 숙제하는 시간이잖아?”      

  몇 마디 이어지기 무섭게 동동이가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남편은 그 행동에 언성을 높였다.      

“그런 행동하지 말랬지!!”     

  

한 두 번 있는 일도 아니었고 우리 집에만 있는 일도 아닐 것이다. 아이를 재우고 남편과 앉아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남편은 종종 내게, ‘니가 화가 많은걸 동동이가 닮은 것 같다’고 장난처럼 이야기했다.      


‘그래, 아이가 부모를 닮는 건 당연하지. 내가 화가 많은 건 나도 알고.. 진짜 내 기질을 닮았나?’

  이런 생각을 하다 문득 억울해졌다. '원래부터 그런' 것은 하나도 없다. 내가 날 때부터 화를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닐 테고 동동이 역시 그런 게 아닐 텐데 도대체 그 화는 어디서부터 쌓여 온 걸까.     

  

  학창 시절을 서울의 변두리였던 구로동에서 보냈다. 세상은 다 구로동 같은 곳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대학에서 만난 친구를 집에 처음 초대했을 때 우리 집까지 걸어가던 길에,

“야 니네 집 가는 길 너무 무섭다,”라고 해서 하나도 안 무섭다며 안심시킨 적이 있다. 구로동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그곳에서 친구들, 길에서 만난 모르는 사람들, 가게 아주머니 아저씨들과 치열하게 싸워 왔다.


  한 번은 중학교 때 친한 친구 두 명과 구로시장을 걸어가다가 옆 학교 학생들을 만나 자신들을 째려봤다는 이유로 뒷골목으로 끌려간 적이 있다. 앞서 걷던 우리가 뒤에 오는 사람을 째려본다는 건 말도 안 되지만 우릴 데려간 목적이 어차피 감정 때문이 아닌 이상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상대는 6~7명쯤 됐고 우린 셋이어서 뺨을 몇 대 맞고 발로 몇 번 차이고 철천지원수에게나 뱉을 말들을 들었다. 동네였음에도 너무 낯선 느낌이었다. 햇빛도 잘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공사장에서 여럿을 상대하기에 셋이란 숫자는 무력했다. 얼마나 오래 그곳에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자습서 살 돈 몇 만 원을 빼앗겼다. 그들이 떠난 뒤 한동안 두려움에 그 자리를 뜨지도 못하고 터져 나오는 울음을 삼키며 서 있었다. 그리고 주문처럼 어디서든 그 자식들을 한 명씩 만난다면 죽여버리겠다는 말을 반복했다. 조금 진정이 돼서 집으로 돌아갔을 때 엄마는 내가 자습서 살 돈을 전부 빼앗겼다는 말에 화가 나셨는지 늦게 다니니 그런 일이 생긴다고 뺨을 때리셨다. 그때 뿔테 안경이 부러졌는데 억울하게 돈을 빼앗긴 일보다 훨씬 더 절망적이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적이었고 엄마는 내 편이었는데 그런 엄마가 갑자기 적이 된 것이다. 이해 안 되는 일 앞에서 내가 아무리 설명하고 화를 내도, 소리를 지르고 울어도 이미 부러진 안경테가 다시 가 붙진 않았다. 그리고 25년이 지났다.


  <글쓰기의 최전선>에서 은유 작가는 말한다. ‘자기 자신을 설명하지 못할 때, 자기 언어를 갖지 못할 때 누구나 약자다.’ 나를 미성숙하다고 판단해 내 말을 들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약자가 되었다. 엄마와의 일화에서 나는 분명 약자였다. 나를 아무리 설명해도 들어주는 귀가 없으면 그 말들은 그저 공중으로 흩어져 먼지가 된다. 


  동동이가 허공에 주먹을 날리고 인형을 바닥에 던진 일을 떠올리다 아차 싶은 기억이 났다. 내가 행동에만 몰입되었을 때 허공으로 날려버린 그 아이의 먼지 같은 말들이 이제야 다시 들린다.

“아 진짜! 지금 중요한 거 하고 있다구요!” 

  

  분명히 중요한 것을 하고 있다고 했었는데 그게 뭐였을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한 번이라도 다가가서 “중요한 게 어떤 거야? 이건 뭘 그린 거니?”라고만 물었어도 아이가 허공에 주먹을 날렸을까 싶다. 그냥 신나서 자기가 그린 그림을 한참 설명하지 않았을까. 그게 정말로 중요한 일인지야말로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약자가 되면 화가 많아진다. 나의 언어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건 외로운 일이고, 내가 외롭다는 것조차 아무도 몰라주면 화가 난다. 그런 괴로움들이 쌓여서 일기도 쌓인다. 독자가 나뿐이라 자기 검열이 필요 없는 그 감정의 찌꺼기들을 휘갈기고 나면 그 괴로움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었다. 그렇게 내 학창 시절 일기의 권 수도 늘어났다.   


  오늘 저녁 학습지 앞에서 또 아이가 중요한 일을 한다. 무엇을 하는 거냐고 물으니 내일 친구들이랑 가지고 놀 보드게임판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구불구불 빼곡하게 많이도 그려 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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