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좋아하는 작가 은유의 '해방의 밤' 북토크에 다녀왔다. 마포에서 북토크를 할 때 꼭 가고 싶었는데 남편이 그날 일찍 올 수 없다고 해서 가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수원의 행궁동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일찌감치 자리를 예약해 놓고 남편에게 그날은 무조건 일찍 집에 오라고 통보를 했다.
혼자 행궁동에 간 것은 처음이었다. 행궁동은 수원의 핫플로 20대의 어린 커플들이나 카페를 좋아하는 여자들로 생기가 넘치는 곳이다. 거기에 웬 40대 여자가 혼자 어슬렁거리는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사람 구경하며 예쁜 가게들을 구경하며 골목골목을 걸었다. 집에서 나왔다는 해방감과 7시가 북토크인 것이 명분이 되어 아이의 저녁을 차리고 먹이고 재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들뜬 날이었다. 내게도 그날은 말 그대로 ‘해방의 밤’이었다.
역시나 북토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진행됐고, 내 마음속에는 설렘이 가득했다. 나는 작가에게 손편지를 쓴 것도 모자라 질문시간에 용기 내어 수줍게 손을 들었다.
"작가님의 책을 보면 육아를 하면서 절실하게 고민하신 걸로 보입니다. 저 역시도 지금 9살 아들이 있는데요. 항상 기대하고 실망하고 욕심내다 망연자실하길 반복하고 있거든요. 육아 선배시고 이제는 아들딸을 많이 키워두셨는데 저처럼 고민하는 육아 후배에게 조언해 주실 것이 있나요? 혹은 다 키워놓은 육아에도 요즘 다른 고민이 있다면 무엇인지도 듣고 싶습니다."
목소리가 왜 그리 파르르 떨렸는지 모르겠다. 육아로 얼룩진 마음을 꾹꾹 눌러내느라 그랬는지, 문장으로만 만나고 혼자 짝사랑한 것 같은 사람을 대면하고 질문까지 하고 있다는 감격 때문인지 헷갈렸다. 나는 발표가 무지 긴장되는 학생처럼 염소 목소리를 내고야 말았다. 은유 작가님은 그런 나를 보고 대답 전에 빙그레 웃었다. 무슨 마음인지 알겠다는 공감의 표정을 한껏 짓고 난 후 입을 뗐다.
"저는 소위 학구열이 높은 지역에 살았잖아요. (목동) 그러다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아이들 공부에 대해 내려놓게 된 케이스거든요. (당시 남편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힘든 시간을 겪음) 그냥 공부 욕심만 내려놓으면 되는 것 같아요. 요즘도 학교에서 1년에 성적표가 4번 나오나요? 그럼 1년에 그 4일만 꾹 참으면 되더라고요. 그럼 최소한 사이가 나빠질 일은 없어요.(웃음) 아.. 그리고 요즘은 제가 첫째를 군대에 보내면서 힘들었거든요. 군대에 의문사가 실제로 많아요. 그런 일들이 나한테 생기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죠. 그래서 그런 것들을 감시하고 파헤치는 시민단체에 후원을 해요. 그럼 세상이 좀 더 나아지겠죠. 사교육비를 줄여 그런 곳에 후원을 해보세요. 그게 훨씬 나은 일이고 내 아이의 행복에도 기여하는 일입니다."
답변은 명쾌했다. 어쩌면 나는 내가 못 받은 것, 못 이룬 것을 자식에게서 이루려는 최악의 욕심으로 육아를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어릴 때 제대로 지원받지 못한 것에 대해 내 자식에게는 그런 대우를 대물림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사교육을 시켰고, 돈을 들였음에도 숙제를 하기 싫어하는 아이에게 실망해 왔다. 숙제를 시키다가는 이해력이 부족한 아이를 보고 천불이 나 속을 끓이기도 했다. 숙제가 남았는데 아무 생각 없이 노는 아이가 밉고, 책을 읽으라면 만화책부터 펴는 아이가 짐짓 한심했다. 그러니 잔소리가 늘고, 내 잔소리에 속이 상한 아이도 말대꾸를 하면서 사이가 틀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게 정말 제대로 된 사랑일까.
은유 작가의 조언을 들을 즈음 육아로 고통받던 나는 처방전을 찾는 심정으로 도서관에서 박완서의 에세이를 찾아들었다. 대출하고 나오는 내내 내게 해답을 줄 것 같은 책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를 끌어안았다. 본래는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에 실렸던 산문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가 다시 이 에세이집에 실려있었다.
아이들의 책가방은 무겁다. 그러나 단순히 책가방의 무거움으로 한창나이의 아이들의 어깨가 그렇게 축 처진 것일까? 부모들의 지나친 사랑, 지나친 극성이 책가방의 몇 배의 무게로 아이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거나 아닐지.
"내가 너한테 어떤 정성을 들였다구. 아마 들인 돈만도 네 몸무게의 몇 배는 될 거다. 그런데 학교를 떨어져 엄마의 평생소원을 저버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 장가들자마자 네 계집만 알아. 이 불효막심한 놈아."
이런 큰소리를 안 쳐도 억울하지 않을 만큼, 꼭 그만큼만 아이들을 위하고 사랑하리라는 게 내가 지키고자 하는 절도다. 부모의 보살핌이나 사랑이 결코 무게로 그들에게 느껴지지 않기를, 집이, 부모의 슬하가,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마음 놓이는 곳이기를 바랄 뿐이다.
-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中
박완서는 슬하에 1남 4여를 두었었다. 서울대 의대를 간 아들을 한창의 나이에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 고통을 겪었다. 그 일이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큰 고통이었지만 그 이후 더욱 겸손해졌다니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물론 저 글은 초판이 1977년이니 그 전의 글이겠지만 어떤 마음으로 아이들을 키워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은유작가와 박완서 님이 모두 같은 말을 하고 있다. 과도하고 극성스러운 사랑이 아이들을 큰 무게로 짓누르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정말 쉽지 않다. 하지만 육아에 답은 없다고 해도 옳은 방향이 있다는 것은 안다. 나는 내 아이가 타인의 슬픔에 공감할 줄 알기를, 그리고 박완서 님의 말대로 부자가 못 되더라도 검소한 생활을 부끄러워하거나 인색하지 않기를 바란다. 됨됨이가 갖추어지려면 부모를 보고 배울 것이 있어야 할 텐데 나는 아직도 갈 길이 먼 느낌이다. 욕심내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한 가지 바라는 것은 아이가 성인이 되더라도 두런두런 엄마와 수다 떠는 것을 지금처럼 즐겼으면 하는 것이다. 그런 아들로 성장하길 바란다면 지금껏 해왔던 육아에서 한참을 되돌아가야겠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발길을 돌리겠다. 그게 최소한 옳은 방향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