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소리-듣지 않을 자유

by 바삭

지금과 달리 어린 시절의 나는 텔레비전과 친했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셨기 때문에 집에 둘 뿐일 때가 많았던 언니와 나는 이런저런 놀이를 발명해 놀곤 했는데, 어린이의 상상력이란 비루하기 짝이 없어 놀이는 금방 지루해지거나 허점이 드러났다. 반면 텔레비전 속 세상은 끊임없이 새로운 재미를 주는 별천지였다. 나는 그 화려한 세상에 금방 매료되었다. 인기 드라마의 시청률이 50%를 넘어가는 것은 예삿일일 정도로 텔레비전의 영향력이 큰 시절이기도 했다. 종이 신문에서 TV 편성표를 오린 다음, 좋아하는 프로그램에 형광펜으로 표시를 하고 방영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보통의 주말 일과였다.


우리 집의 텔레비전은 거의 항상 켜져 있었다. 어릴 때의 나는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상황을 무서워했고, 모두 잠이 들어 조용한 밤 시간을 싫어했기 때문에 텔레비전 속 밝은 세상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가 큰 위안이 되었다. 그때는 무엇이 그렇게 외롭고 무서워서 늦은 밤까지 잠 못 들며 텔레비전을 끄지 말라고 떼를 썼을까? 어쨌거나 육아 난이도가 매우 높았던 이 어린이는 자라서 밤과 고요를 사랑하는 정반대의 어른이 되었으니, 역시 육아란 한 치 앞을 모르는 일이다.





텔레비전을 잘 보지 않게 된 건 아마 중학생 때부터였던 것 같다. 머리가 좀 크고 나니 텔레비전 속 세상이 좀 달라 보였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그 안에 살면 마냥 즐거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방송 PD’나 ‘탤런트’ 같은 직업의 세계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면서 환상이 깨졌다. 그곳은 더 이상 환상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 세계의 연장일 뿐이었다. 동시에 학업과 친구 관계, 진로 같은 것에 신경을 쏟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텔레비전 소리는 그저 집중을 방해하는 소음으로 전락해 버렸다.


어른이 되면서 바깥세상은 점점 더 시끄럽게 느껴졌다. 더 이상 어떤 자극도 수용할 수 없을 만큼 질려버린 상태로 귀가하는 날도 더러 있었다. 나는 점점 더 조용함을 찾아 헤매게 되었다. 음소거 상태로 드라마를 시청했으며, 집에서도 이어폰을 착용했다. 사실 부모님으로부터 독립을 한 일에는 텔레비전 소음도 어느 정도 일조했다. 연로하신 부모님의 청력이 퇴화할수록 텔레비전의 음량도 서서히 커져, 가끔은 현관문 밖에서부터 들릴 정도로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나는 텔레비전이 없어도 되는 집을 계약하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한 평화를 찾을 수 있었던 셈이다.


빈 집에 들어섰을 때의 적막이 싫어 텔레비전을 항상 켜 둔다는 사람도 있는 반면 나는 절간처럼 조용한 집에서 하루 동안 쌓인 소음을 털어내는 걸 좋아한다. 어릴 때는 현란하고 소란스러운 TV 화면 속으로 도피하며 평화를 찾았지만, 지금 내게는 굳이 듣고 싶지 않은 소리들을 듣지 않는 것이 곧 쉼이고 평화다. 왁자지껄함은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날 때나 신나는 액션 영화를 볼 때처럼 가끔씩. 딱 그 정도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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