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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질씨드 Aug 16. 2022

가을의 선물

귀뚜라미가 

확 펼쳐졌던 여름을

반으로 접어서

박고 있습니다


뚜르르르르르르르르


밤이 깊도록 

재봉틀 소리가 납니다


— 김철순, ⟨귀뚜라미⟩ 중에서




여름이 물러가기 시작할 무렵 바느질꾼들의 마음은 바빠지기 시작한다. 이제 서서히 겨울로 향해 갈 시간의 보폭에 맞추어 ‘이번엔 기필코’를 되뇌며 지난 계절에 만들다 둔 옷, 미루어 둔 계획을 마음속 서랍에서 조심스레 꺼내본다. 여름 내내 손도 대지 않았던 두터운 원단을 오랜만에 만져보며 계절을 가늠하고 다시금 계획을 점검한다. 


더위라는 방해꾼이 물러가며 가을바람이라는 새 손님이 다시 찾아오는 늦여름의 저녁, 그는 새 손님의 달콤함을 온몸으로 느끼며 꿈꾼다. 가령, 트렌치코트까지는 아니더라도 분위기 있는 가을 코트를 만드는 꿈. 금손의 고수든 서투른 초보든 실력이나 시간 여유와 관계없이 마음껏 꿈꾸어도 좋은 순간이 있다면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환절기가 아닐까? 


사계가 주는 선물 중에서도 가장 차분한 기쁨을 주는 것이 초가을인 것 같다. 흥분해서 떠들어대거나 알 수 없는 열정에 휩싸이거나 일을 팽개치고 놀러 나가고 싶어지는 마음이 아니라 생활의 자리에 그대로 붙어 앉아 해야 할 일을 하고 싶어지는, 놀이할 때처럼 쾌적한 기분으로 자발적으로 즐겁게 일하고 싶어지는 시기이니까 말이다.


늦게까지 공부를 못 끝낸 탓에 꽤 오랫동안 그 시기는 나에게 불안과 회한으로 점철된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여름 동안 계획했던 일을 다 하지 못한 채로 지도교수의 얼굴을 다시 봐야 한다는 압박감에 짓눌려 긴장과 자책감이 뒤범벅된 상태로 최악의 시간을 보내곤 했으니까 말이다. 마침내 더 이상 학생이 아니게 되었을 때 받게 된 보상 중에서도 초가을의 쾌적함을 만끽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내가 받은 최상의 선물이었다. 바느질을 시작하고나서부터는 그 위에 새로운 즐거움이 덧붙여졌다.


그 시기가 좋은 것은 꿈을 꿀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추석이라는 트랩에 걸려 허우적대다가 어느새 본격적으로 접어든 가을의 한복판에 서면 초가을에 꿈을 꿨다는 사실조차 잊고 만다. 가을은 짧다. 얼마 안 가 한 해가 기울 것이고, 그전에 달성해야 할 목표량에 도달하려면 아직 멀었다. 마음은 바빠지고 실제로 받는 요구도 많다. 직장인이든 프리랜서든 강사든 비슷할 것이다. 


그 해 가을도 마찬가지여서, 가을 내내 만든 옷이 몇 벌 되지 않았다. 그중 네 벌은 어머니의 추석 선물로 만든 티셔츠들이었고, 늦여름-초가을에 꾼 꿈의 색깔을 현실화한 작품은 단 한 벌 뿐이었다. 그것은 당시 내가 큰 도움을 받고 있었던 바느질 카페 ⟨페이퍼-핏⟩에서 ‘뒤겨돌셧’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디자인의 도톰한 가을 셔츠였다.


이중 거즈로 만든 체크 셔츠 (2019. 10.)


그 셔츠를 완성했을 때 나는 블로그에 이렇게 적었다.


옷을 만들다 보면 재미없을 것이 뻔한데도 수다를 늘어놓고 싶은 옷이 있는데 이 옷이 바로 그런 옷이에요. 패턴에 대한 얘기를 먼저 해볼까, 원단에 대한 얘기를 먼저 해볼까, 만드느라 고생한 얘기를 늘어놓을까 망설이게 되는 포스팅이 있는데 이 글이 바로 그런 글이에요.

마음에 쏙 들어서 쟁여놓았지만 제 바느질 실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묵혀둔 원단들 중 하나로 만들었어요. 리플지*처럼 우글거림이 있는 부드럽고 도톰한 거즈** 원단인데 도무지 제대로 다룰 엄두가 안 나는 데다가 적당한 패턴도 없어서 2년을 묵혀뒀었어요. 이번 가을에 쏘잉핏***님이 만들어 올려주신 '뒤겨돌셧' 패턴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가 드디어 썰었어요.

뒤겨돌셧은 '뒤' '겨'(겨드랑이)가 '돌'먼****으로 되어 있는 '셔츠'에요. 언뜻 보면 평범한 셔츠 같지만 평범하지 않은 핏의 특별한 셔츠에요.

밑단 올 풀림 디테일을 살려주고 모든 봉제선을 이중 상침해서 분위기를 내봤어요. 원단이 워낙 빈티지 느낌이라 스타일이 제대로 살아났어요.

이 셔츠는 두꺼운 모직으로 만들어 아우터로 입어도 멋지겠어요. 겨울이 오기 전에 또 다른 체크 버전으로 하나 더 만들어보려 합니다.

(2019. 10.)


같은 패턴으로 한 벌 더 만들겠다는 야무진 계획은 거의 3년이 흐른 뒤 이번 여름에야 실현되었지만 그 셔츠는 아직도 내 자부심 재산 목록의 상위를 차지하는 아이템으로 남아있다. 패턴과 디자인이 훌륭한 것과는 달리 옷의 만듦새가 굉장한 것은 물론 아니지만, 그 옷을 입을 때마다 나는 정말로 나 자신이 된 듯한 편안한 기분이 되고, 과거의 나에게서 지원을 받는 듯한 느낌에 마음이 든든해지곤 한다.


내가 만든 옷을 입는 기분이 바로 그렇다. 내가 나에게서 서포트받는 느낌. 어제의 나에게서 도움을 받아 오늘의 내가 자신감을 갖고 사람들 앞에 선다. 


그것은 또한 세상에 존재하는 최고의 옷을 입은 느낌이다. 고급 원단이나 비싼 원단으로 만든 것은 물론 아니다. 봉제가 완벽한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당연히, 재단이든 바느질이든 내 솜씨가 최고일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그 옷은 현실적으로 최고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당시의 내가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였기 때문이다. 최고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원단의 선택이든 재단이든 재봉이든 시간이든 체력이든, 제한된 조건에서 많은 타협을 해야만 했는데, 왜 그래야 했는지를 완전히 알고 있고 그 선택에 대해 전적으로 수긍하고 받아들이고 지지한다는 의미에서다.  


그러므로 그 옷이 최고라는 것은 군데군데 삐뚤어진 상침이라든지 어긋난 체크무늬, 삑사리가 나서 찢어질 뻔한 단추구멍의 땜질을 포함하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나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그것은 아마도 바느질이 나에게 선사한 가장 큰 선물일 것이다. 


2019년의 겨울은 그때까지 보낸 어떤 겨울과도 같지 않았다. 이제 나는 내 손으로 옷을 만들어 입는 사람으로 거듭났으니까. 이 때부터 나에게는 환절기가 돌아올 때마다 실행하는 새로운 과제가 생겨났다.  옷장을 정리하고 새롭게 필요한 옷을 점검해 계획을 세우고 만들어내는 일이다. 필요와 욕망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도 해야 했다. 그 때부터 나에게 계절의 변화는 새로운 고민의 시작을 의미하게 되었다. 


블라인드 틈으로 들어온 햇살을 받은 거즈 체크 셔츠



———

*요루지, 지지미, 리플지 등은 오글오글한 입체감이 있는 다양한 원단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시어서커(seersucker)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거즈(gauze)는 얇고 올이 성긴 직물을 가리킨다. 면, 견, 합성섬유, 레이온 등 다양한 소재로 직조되고 때로는 이중, 삼중으로 도톰하게 짜이기도 한다.


***쏘잉핏(sewing fit) 님은 의류 산업의 현장에서 패터너로 일하는 전문가이면서, 한편으로는 온라인 커뮤니티 ⟨페이퍼-핏 Paper-fit⟩에서 비상업적 옷 만들기의 새로운 문화를 이끌고 있다.


****돌먼(dolman)은 돌먼 소매, 혹은 돌먼 핏이라고도 하는데 가오리, 날다람쥐, 박쥐를 연상시키는 상의 디자인으로, 넓은 소매가 몸판에 붙어 있는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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