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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질씨드 Jun 07. 2022

단순한 것이 좋아

2019년 이후 나의 작업은 주로 옷을 만드는 데 집중되었다. 몇 번의 계절이 바뀌자 내 옷장은 차츰 내가 만든 옷들로 채워지게 되었다. 옷의 종류는 많고 아직 내가 해보지 않은 것들은 잔뜩 남아있었기에 매번 작업은 새롭고 흥분되었다. 새로운 것을 해본 후의 나는 더 이상 그 이전의 내가 아니었기에, 나는 매번 새로운 마음, 또 다른 태도로 작업을 시작했다. 


옷 만들기는 절대로 물리지 않는 여행과도 같았다. 매번 내 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풍경 앞에, 나는 새로운 경험으로 한 단계 성장한 여행자가 되어 서 있곤 했다. 하지만 지루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이 모험의 세계에서도 어려움은 있었다. 나는 머지 않아 난관에 부딛치게 되었는데, 그 한 가지 요인은 옷장 공간의 한계였고, 또 한 가지는 팬데믹이었다. 


새로 만든 옷은 점차 늘어나는데 공간은 늘어나지 않으니 수납과 활용이 차츰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가다가는 오래 가지 못하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피로감이 극에 달한 어느 순간, 그 때문에 옷을 만들 의욕까지 한풀 꺾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자 낭패감이 들었다. 매년 안 입는 옷을 정리해서 처분하고 있어 더 이상 내보낼 옷도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좌절감은 더욱 컸다. 


그러던 중, 자주 가던 바느질 커뮤니티의 게시판에서 L님의 글을 보았다.  2021년 2월의 일이다. 깔끔하게 정리된 옷장의 내부를 찍은 한 장의 사진 앞에서 갑자기 머릿속에 환하게 불이 켜졌다. 구입한 원단은 바로바로 모두 소비하고 쌓아두지 않는다는 대목, 입지 않는 옷은 정리하고 정말로 좋아하는, 잘 활용할 옷들만을 남겨놓는다는 대목, 손수 만든 옷으로만 채워진 작지도 크지도 않은 단정한 옷장의 모습.


그 때까지 내 옷장에는 입지 않는 옷, 못 입는 옷들이 수두룩했다. 정말로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 철저하게 생각해보고 우선 순위를 정하지 않으면, 진짜로 좋아하는 것들을 결코 가질 수 없으리라는 것을 갑자기 깨달았다. 본질적인 것을 분간해내고 거기에만 집중하는 것, 그것만이 지속가능한 바느질의 핵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 생활을 하던 시기에 어쩔 수 없이 구입한, 내 취향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남의 옷 같은 옷들, 갑자기 살찐 몸을 감싸기 위해 울며 겨자먹기로 구입한,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고 여전히 매력 없는 옷들, 좋아하는 아이템이지만 최고를 선택할 수 없어 대충 가격과 타협한 대용품 같은 옷들. 나는 그런 것들을 여전히 껴안고 살고 있었다. 옷 만드는 속도가 느리니까 진짜 원하는 것을 만들어낼 수 있기 전까지만 가지고 있자고 생각하며 처분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들이 옷장 속 공간을 잔뜩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들을 버리지 못한 이유를 갑자기 깨달았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언제 다시 살이 찔지 모른다는 두려움, 어쩌면 내일 당장 바느질을 그만둬야 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바느질을 계속하더라도 영영 마음에 쏙 드는 옷을 만들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포멀한 착장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내 취향과 선택을 밀고 나가기보다는 포기해야 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나는 충분히 당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내일을 마주 할 나 자신을 믿지 못했고, 용기가 없었던 거다. 


L님의 옷장 앞에서의 깨달음은 옷에 대한, 그리고 미래에 대한 내 태도를 바꿔 놓았다. 그 해 봄, 나는 몇 달 전에 정리한 옷장을 다시 뒤집어 엎었다.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하자 다르게 보였다. 이런 저런 이유로 보관만 하고 있었던 옷들을 추려내자 라면 박스 크기의 상자가 네 박스나 나왔다. 미련 없이 그것들을 아름다운가게에 기증했다.  


그 사건은 나를 정말 많이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옷장도, 집도, 나 자신의 미래에 대한 생각도 훨씬 가벼워졌고, 그 가벼움과 여유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들이 보였다. 생각과 생활이 조금 더 단순해졌고, 단순함 속에서 생각하고 생활하자 모든 것이 훨씬 명료해졌다.


그러나 또 하나의 난관이 있었다. 옷 만들기 프로젝트는 삐걱거리면서도 천천히 지속적으로 굴러갔지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나의 의욕을 꺾는 외부적인 요소가 있었다. 2020년부터 계속된 코로나19다. 팬데믹 기간 내내 내가 맡은 강의들은 모두 온라인 강의로 진행되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약속과 모임의 기회도 드물었다. 옷을 입고 나갈 일이 없는 상황에서 옷 만들기가 신이 날 리 없었다. 목적이 사라지자 동기도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멈춘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차츰 여러 가지 계획들을 미뤄두기 시작했다. 재킷이나 코트 만들기는 기한 없이 미뤄졌고 티셔츠, 속옷, 트레이닝 바지 같은 것들이 주된 작업이 되었다. 손이 많이 가고 복잡한 것은 점점 기피하고, 만들기 쉽고 단순한 작업을 선호하게 되었다. 그런 경향이 제일 강했던 것이 2022년 상반기였던 것 같다.


나는 단순 반복 작업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뜨개질도 자수도 하지 않는다. 물론 뜨개질이나 자수도 깊이 들어가면 단순 반복만은 결코 아니겠지만 말이다. 어쩌면 나는 단순 작업을 좋아하지 않는다기보다는 끈기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런 내가 한 가지 단순 작업에 깊이 빠져들었으니 그것은 머플러 술 꼬기이다. 천의  씨실을 한 올 한 올 풀어낸 다음 혼자 남은 날실들을 가닥 가닥 잡아서 새끼 꼬듯 꼬아 묶어주는 작업이다. 몇 년 전에 처음으로 머플러를 만들었을 때는 그 방법을 모르기도 했지만, 올을 풀어서 어떤 가공을 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런 수고를 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2021년에 머플러 술 꼬는 법을 배운 다음부터, 적당한 원단을 구하면 언젠가 꼭 한 번(딱 한 번만!) 만들어보고 싶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기회가 찾아왔다.


사실 기회가 찾아왔다는 것은 극적인 효과를 위한 표현일 뿐이고, 한참 전에 구입하여 원단장 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원단, 처음부터 원피스 감으로 못박아뒀던 얇고 부드러운 모달 워싱 거즈가 어느날 갑자기 머플러 재료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원단을 구입할 때 나는 처음부터 쓰임새를 대충이라도 정해놓는 편인데, 하나의 원단이 처음에 생각했던 목적과 전혀 다른 아이디어로 연결되는 일은 사실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단지, 그 발상의 전환이 어떤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는지가 오리무중일 뿐.


2022년 2월에 내게 일어난 일도 그 중 하나였다. 원단장을 뒤적거리다가 오랜만에 그 원단을 꺼내 만져보았는데, 원피스 감으로는 말도 안 되게 얇고 흐느적거린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고 순간적으로 짧은 실망감을 맛보았고, 곧바로 실망의 구렁텅이에서 새 희망의 빛 속으로 튀어 오르는 감정의 변화를 느꼈다. 그렇다. 발상의 전환이 일어날 때는 감정의 변화가 먼저 찾아오고, 분명한 실체가 드러나는 것은 그 다음 일이다.


원피스는 안 되겠지만 이렇게 부드럽고 얇은 천은 구할래야 구할 수 없는 희귀한 아이템이다. 그런데 뭣 때문에 이런 원단을 구하려고 했더라? 오호라! 머플러를 만들고 싶었지!


이렇게 하여, 단순 작업을 피하고 싶었던 나는, 반복 작업은 싫지만 예쁜 머플러는 만들어보고 싶었으므로 백 번 양보해서 일생에 딱 한 번만 만들기로 작정하고서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첫 번째 머플러 작업 (2022. 2.)


이 작업을 끝내고 나서 2월 17일에 나는 노트에 이렇게 기록했다.


단순 작업을 좋아하지 않는데, 이 작업은 아주 할 만할 뿐만 아니라 명상 효과가 있다. 이건 거의 엑스터시.


그러나 다시 읽어보니 속이 뻔히 들여다 보이는 거짓말이다. 그 명상 효과는 사실 작업 자체에서 온 것이라기보다는 외부에서 온 것이었다. 그 시기에 나는 에드 시런(Ed Sheeran)에게 푹 빠져 있었는데, 어떤 아티스트의 팬이 되는 일이 대체 어떻게 그토록 갑작스럽게 일어나는지 나로서는 전혀 알 수 없지만, 그 당시에 나는 그러니까 약간 흥분된 마음으로 살고 있었고, 이 단순 작업을 하는 내내, 그에게 나를 끌어들인 문제의 곡, ⟨Shivers⟩를 무한 반복해서 들었던 것이다. 사실 그 머플러 술 꼬기 작업은 아무 생각 없이 한 곡을 반복해서 듣기 위한 최적의 행동이었고, 그 결과 작업하는 내내 행복한 도취감으로 엑스터시에 가까운 희열을 맛보았던 것이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 곡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술 꼬기 작업은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으며 끝내기가 아쉬울 정도로 중독성이 있었다.


그리고 나서 석 달이 흐른 5월 초의 어느날, 나는 다시 느긋하게 거즈 리넨 머플러를 만들고 있었다. (일생에 단 한 번만 만든다더니?) 2월의 열정은 다행히도 더 이상은 열렬히 끓어오르지 않았다. 이제 나는 다시 예전의 내 취향으로 무사히 귀환하여, 조금 더 넓어진 스펙트럼으로 컨템포러리 포크와 인디펜던트를 주로 듣는 느긋한 청취자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Shivers⟩가 아니더라도, 나는 머플러 술 꼬기 작업에 음악이 곁들여질 때 최적의 효과를 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작업을 위해, 단지 그것만을 위해서는 물론 아니지만, 제일 좋아하는 곡 102 곡으로 스포티파이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었다.


5월을 거쳐 여름 내내 집에 머무르면서, 나는 정말로 그 플레이리스트를 끼고 살았다. 일을 하든 가사노동을 하든 바느질을 하든 음악으로라도 적절한 자극을 주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던 시기였다. 현재의 새 애인들과 과거의 연인들이 공존하는, 오래 못 본 옛 친구의 그동안 변화한 모습과 구남친의 과거 모습들이 동시에 담긴 사진 앨범과도 같았던 그 플레이리스트를 무한히 반복하고 있자면 과거의 내가 기억 속에 복기되고 현재의 나와 뒤섞여 내가 누구인지 조금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는 것 같았다.


어린이날 휴일, 그렇게 나는 머플러 술 꼬기 작업을 했다. 아침부터 하루 종일, 올을 풀다가 또 다른 일을 하다가 다시 와서 꼬다가 밥을 해 먹었고, 또 술을 꼬다가 살짝 지겨워지면 설거지를 하고 또 다른 일을 하다가...  그렇게 일과 가사노동과 취미 작업을 오가며 휴식의 시간을 만끽했다.


작업 중의 베이지 거즈 리넨 (2022. 5.)


게다가 이 원단은 함께 놀기 좋은 아름답고 장점 많은 원단이어서 머플러가 완성되기 전부터 새록새록 정이 들었다. 이 원단을 구입한 ⟨조이오브메이킹⟩의 카페 게시판에 나는 이렇게 썼다.*


언뜻 보기에도 예쁜 색깔이지만 작업하면서 보니 정말 아름다워요. 가지고 있는 베이지 계열 실들을 모두 꺼내 하나하나 맞춰보며 실 색을 고르다보니 알게 되었는데, 이 아이의 색깔은 아주아주 살짝 핑크 베이지 기운이 감도는 부드러운 색감이네요. 자연스러우면서도 살짝 해사한 느낌이 있어서 참 곱습니다.
 
실 색이 완벽하게 맞은 김에 미미지 쪽도 깔끔하게 잘라내고 말아박기했어요. 3mm 랍빠로 했는데 말아박기도 무척 잘 됩니다. 올이 성근 거즈 리넨이지만 얘가 나름 절도가 있네요. 마냥 흐물거리지 않고 올이 하염없이 폴폴 풀리지도 않고 얇게 접기도 쉬워서 작업하는 손맛이 좋아요. 은은한 풀 향기를 맡으며 거즈 리넨의 촉감을 느끼며 작업하는 시간이 너무나 좋아요. 눈도 코도 손도 모두 함께요.

이 원단의 모든 장점들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어요. 이렇게 아름다운 원단을 만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애써 만드신 만큼 정말 멋진 아이가 탄생했네요.

원단이란 게, 집에 들여놓으면 일단 눈으로 감상하고 손으로 쓰다듬으며 느껴보고, 작업하면서 요리 조리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다루면서 더 친해지잖아요. 뭐랄까, 그러면서 정이 든달까요? 좋은 친구랑 오래 있을수록 새록새록 정들며 행복해지는 것처럼, 좋은 원단과 보내는 시간도 그런 것 같아요.

다 만들어서 목에 두르고 다니기 전부터 이미 알뜰살뜰 정들고 있어요.


완성 후에는 물에 적셔 꼬아서 주름을 잡아 건조하는 작업이 남아있었다. 예쁘게 주름을 잡기 위해 중간에 다시 펼쳐 길이로 팡팡 잡아당기고 다시 꼬아두고.


완성된 베이지 거즈 리넨 머플러


주름을 잡기 전과 잡은 후의 느낌이 상당히 달랐다. 또한, 주름을 잡아 건조한 후에는 더 빳빳해졌다. 풀기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이 거즈 리넨은 아무래도 물에 들어가면 부드럽게 풀어지고 완전히 건조되면 풀 먹인 것처럼 빳빳해지는 것이, 딱 모시와 비슷하다. 그리고 아마도, 부산 사는 바느질 지인의 말씀대로, “질을 내면"(길들이면) 저 너무 센 주름들은 조금 더 부드러워지고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바로 이러한 물성 때문에, 한국적인 느낌과는 거리가 있는, 아마(flax)로 만든 이 리넨 원단은 나에게 저마(ramie)로 만든 모시를 연상시켰고, 그 연상 작용은 내가 모시 이야기를 꺼내도록 이끌었고, 그 대화는 결국 엄마에게서 외할머니의 모시옷과 광목을 받는 일로 연결되었고, 그 사건은 세탁, 건조, 단순 소품 만들기라는 단순 작업으로 나를 이끌었다.


화려한 옷들을 꿈꿨던 초보 시절과는 달리, 나는 점점 단순한 것들에 이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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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이오브메이킹⟩은 디자이너이자 패터너인 조이님이 운영하는 패턴 및 원단 판매 사이트이자 온라인 바느질 커뮤니티의 이름이다. 조이(배효숙)님은 거의 20년의 세월 동안 직접 디자인한 옷 패턴과 기획 제작하는 원단으로 DIY 옷 만들기의 새로운 차원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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