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그리고 정체 중

느린 일기 - 도와준 동생을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형이라니

by 블랙스톤

2023년 10월 19일 목요일

새벽부터 먹구름이 꿈지럭하더니 점심부터 간헐적으로 맑았다가 소나기 찔끔 반복


홍천 이후 들어갈 예정이었던 현장과의 계약이 엎어졌다. 해서 쉬다가 다시 인천 청라 현장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한동안 계속 오던 현장이라고 익숙함이 느껴졌다. 말 한마디 나눠본 적은 없지만 익숙한 얼굴들이 많았다. 내가 그렇게 느낄 정도니 나를 보는 반장님들도 같은 걸 느끼는 모양이었다.

오전 쉬는 시간에 다음 작업 확인을 위해 동생이 자리를 비웠다. 내가 홀로 쉬는 것을 보고 목수 대장이 슬쩍 다가왔다. 벌써 그만 둘 줄 알았는데 안 도망가고 아직까지 버티는 걸 보니 끈기는 있다면서 내게 말을 걸었다. 사소하고도 잡다한 이야기들이 지나가고 그가 하고 싶은 말은 결국 처음에는 무조건 힘든 법이니 참고 견디라는 말이었다. 더럽다 싶어도, 때려치우고 싶어도, 저 인간들이랑 못 하겠다 싶어도, 좆같은 새끼, 씨발새끼, 쌍놈의 새끼, 욕이나 거하게 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현장으로 매일 나오면 그 하루들이 쌓여서 경력이 되는 거라고. 표현이 거칠 뿐 생각해서 말해주는 것을 안다. 웃으며 알겠다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대장은 어깨를 두들기며 지나쳤다. 현장에서는 서로 금방 헤어질 사람들이라서 굳이 서로에게 친한 척을 하지 않고 친한 척을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마음을 쓰진 않는다. 이렇게 말을 걸고 격려해 주는 사람은 정말 귀하다. 동생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와서 격려를 해주는 것도 동생과 내가 괜히 껄끄러워할까 봐 마음을 써준 거라는 걸 안다. 끝에 한 번 더 고맙다는 말을 붙였다.


떠나가는 목수 대장의 뒷모습을 보다가 쉬는 기간 동안 동생과 술을 마시며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내가 일을 더디게 해서 답답한 것보다도, 하루 작업량을 맞추지 못할까 봐 닦달할 수밖에 없는 자신이 주변에 얼마나 나쁜 사람으로 비칠까 그게 걱정된다고 했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그러려니 했다. 공감이 되는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실 현장에는 자기 일만 하느라 바쁜 사람들만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오늘 슬쩍 내게 다가와 격려를 해주는 목수 대장을 겪어보니 시선을 주변에 두고 있는 사람들도 있구나 싶다. 얼마나 일에 적응이 되면 저럴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경력이 오래된 동생도 아마 주변을 다 확인하고 있었겠네. 그러니 주변의 시선들까지 신경이 쓰이는 거지. 하긴 저번 홍천 현장이나 일산, 노원 현장도 작업을 하다 만난 인연으로 소개를 받은 거긴 했다. 확실히 내가 버벅거리는 걸 주변에서 다 쳐다보고 있다고 느꼈다면 내가 특히 더 답답하긴 했겠구나 싶다.

나는 동생에게 고마운 마음이 크다. 기술을 배워보겠다는 아는 형을 데려다가 반년이 넘도록 붙잡고 가르치려고 하는 사람이다. 평소 성격을 보면 집에 보냈어도 벌써 보냈을 텐데 그 불같은 성격을 참아주고 있는 것도 고맙다. 내 일에만 매몰되어 있는 나는 느끼지 못했지만 어쩌면 동생은 나를 닦달할 때마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고 자신의 평이 나빠지고 있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오늘의 목수 대장만 보더라도 동생이 나를 질책할 땐 강하게 한다는 느낌이 있었기에 몰래 따로 다가와 격려를 해주는 것일 테니. 데면데면하게 지내던 이에게서 뜻밖의 격려를 받아 기분이 좋으면서도 뭔가 착잡해졌다. 도와준 동생을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형이라니. 가슴 위에 무언가가 올라간 것처럼 숨이 가빠 왔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진 시간에 현장에 큰소리가 났다. 현장의 큰소리야 항상 있는 일이지만 웅성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리는 폼이 뭔가 일어난 모양이었다. 나는 시끄러워지는 것과는 상관없이 동생이 작업하는 것을 보조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동생은 사다리 위에 있어서 일단 작업을 하는데만 신경을 쏟고 있었다. 소란은 점점 우리 쪽으로 다가왔고 이내 시야 안으로 들어온 것은 현장소장과 목수 대장의 언쟁이었다. 일 하는 것에 대한 이견은 언제나 있는 법이지만 이번에는 조금 심각해 보였다. 목수 대장은 삿대질을 하고 줄자로 뭔가를 재고 여보라며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장을 불러댔지만 소장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저었다.

목수 대장은 점점 우리 쪽으로 다가오더니 동생에게 어떤 작업에 대해 물었다. 동생은 사다리에서 내려와 이야기에 합류했다. 이런 작업을 했으며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할 거라는 이야기였는데 목수 대장이 현장에서 치수를 이렇게 준다며 이건 다 뜯어야 되는 상황이라고 말을 했다. 동생도 난색을 표하며 그렇게 하면 지금까지 작업한 거 다 뜯어야 하고 자재로 새로 들여와야 한다고 말했다. 현장 소장은 이번에 들어와 설치될 천장 환풍구나 에어컨들이 들어오려면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동생은 단기간에 수정이 어려울 거라고 그렇게 하려면 지하 3층부터 마감을 싹 다 고쳐야 하는데 그게 가능하겠느냐고 물었다. 목수 대장은 더 흥분해서 욕을 섞기 시작했고 현장 소장은 난감해하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야기는 결국 처음 목수 대장이 도면을 보고 문제를 지적했었다는 것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그때 소장이 문제없다고 해놓고 이제 와서 다 고치라고 한다는 거다. 둘이 싸우는 것은 그러려니 하겠는데 우리 사다리를 잡고 싸워대서 나나 동생이 슬쩍 자리에서 빠지기도 애매했다. 현장 소장과는 말이 잘 안 통한다면서 목수 대장은 중간중간 동생을 끌어들여 그를 설득하려고 애썼다. 하다못해 안 보이는 부분은 그냥 가자고. 소장은 여전히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저었다.

이십 분이 넘게 싸우던 그들은 결국 소장이 주장하는 대로 하기로 했다. 목수 대장은 공시 기일이 두 달은 늘어나도 나는 모르는 거라며 욕을 허공에 마구 흩뿌리며 장비 다 빼고 내일은 다른 현장으로 간다면서 사라졌다. 문득 아까 목수 대장이 해준 격려가 생각났다. 욕을 마구 해가며 아무 생각 없이 내일 나오면 경력이 된다라고 했던 말. 확실히 저렇게 욕을 마구 흩뿌리면 속에 뭔가 앙금이 남을 거 같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형, 봤지? 사람들 이미지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거야. 저 목수 아저씨가 매번 욕은 해도 싱글싱글 웃으면서 다 받아주고 다니니까 이런 상황에서 소장이 밀어붙여버리잖아. 아마 저렇게 말은 해도 장비 못 빼고 내일 나와서 처음부터 작업 다시 할걸. 저거 다시 뜯으려면 엄청 힘들 텐데.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내 이미지는 어떨까? 거의 매일 혼나며 일을 하고 있었는데. 아마 목수 대장이 격려하러 왔을 만큼 도망가지 않은 게 용한 녀석쯤인 걸까.


집으로 가는 길.

강변북로에 사고가 났는지 차가 움직이질 못했다. 그러다 퇴근시간이 되고 나는 오도 가도 못하고 그저 차 안에 갇혀 조금씩 조금씩 앞 차가 내어주는 공간을 따라갔다. 그마저도 그 작은 공간을 옆에서 끼어들지는 않을까 주변의 눈치를 확인하며 바짝 붙어야 했다.

문득 웃음이 났다. 고작 한 칸만큼 더 빨리 가기 위해 머리를 디미는 사람들이나 그거 안 뺏기겠다고 앞으로 바짝 붙는 나나. 아등바등 대고 있는 게 퇴근을 해도, 퇴사를 해도 달라지는 게 없었다.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도 달라지는 건 없을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집으로 가야 할 길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다리는 쉬지 않는다. 자리가 날 때마다 앞으로, 조금씩 앞으로.


계속 꽉 막힌 상태로 시간이 오래 지나면 오히려 될 대로 돼라 하고 그 자리에 순응하게 된다. 아득한 감정은 이미 저만치 가버렸고 뭔가 머리가 텅 빈듯한 느낌. 그저 앞차를 따라간다. 저 옆으로 빠지는 길은 다리를 건널 길이거나 혹은 시내로 들어가는 길일 것이다. 분명 어디쯤으로 가겠지만 거기도 다를 바 없이 그저 앞차를 따라 집으로 가는 길이겠지.

문득 오늘 현장에서 욕을 하던 목수 대장이 생각났다. 가만히 욕을 뱉어 보았다. 소리를 지르며 욕을 몇 번이나 목이 터져라 내뱉는다. 그런다 해서 앞의 차들이 사라지진 않았다. 크게 숨을 쉬며 그가 했던 격려가 지금에도 통용된다고 생각했다. 참고 견디며 앞차를 따라 아주 조금씩 전진하다 보면 집에 도착할 것이다. 괜히 도망가봐야 어차피 다른 곳도 힘든 건 매한가지다.


차 안에 들려오던 음악이 뭔가 시끄러운 것 같아 꺼버렸다. 자동차 엔진음이 은은하게 들려온다. 뭔가 변화를 가질 수 없는 꽉 막힌 도로에서 그저 앞차만 따라간다. 아무 생각 없이 앞을 보고 조금씩 다리를 놀려 앞으로 간다. 내가 아니라도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

처음 일을 그만둘 때가 생각났다. 그 자리에 순응하고 선 그 모습을 견디지 못했었다. 언제고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아서, 달라지지 못할 것 같아서, 지금이 아니면 새로운 무언가를 해 볼 엄두도 내보지 못할 것 같아서 뛰쳐나왔었다. 그리고 나는 앞뒤가 꽉 막힌 이곳에서 천천히 앞으로 따라 걷고 있다. 주변의 눈치를 보며 그 한 칸의 자리를 누군가에게 내주지 않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들이밀면서 걷고 있다. 왠지 한숨이 나왔다.


크게 한숨을 내쉬는데 눈에 새 한 마리가 들어왔다. 새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창 밖의 강에 햇빛이 산란하고 있었다. 끝없이 부서지고 깨지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찬란하여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그 빛조각. 그리고 강 표면을 쓸어 그 빛조각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살랑이는 바람. 이 안에서 저 밖을 내다보면 그보다도 더 아름다울 수 없다는 걸 안다. 아름답고 이상적으로 보이고 금방 손에 닿을 것만 같고. 너무 예쁘고 부러워서 금방 손에 묻어 나올 듯하다는 걸 아주 잘 안다. 하지만 그 밖은 춥다. 전에는 그저 아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겪어보기까지 했다.

분명히 다 아는데, 겪어보기까지 했는데 눈이 가는 것을 어쩔 수 없다.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입 안 어딘가가 당길 정도로 부럽고 침이 고인다. 나도 몰래 군침을 삼키고 그 아름다움을 내 안에 욕심껏 가득 담으려는 듯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앞차를 따라 바짝 붙어 앞으로 가는 것을 잊지 않는다. 눈을 떼지 못한 채로.





지극히 단순한 이치인데 서운한 감정이 들 때면 늘상 누군가를 탓하려고만 한다. 왜냐하면 나는 그동안 나는 너무 많은 기대와 실망을 겪었으니까. 그것이 정말로 다 내 탓이라면 내 삶이 너무 가여워지잖아.

혼자서 조금씩 남 탓을 한다고 해서, 내가 되게 못되고 나쁜 사람은 아닐 거야 하고 나를 달랜다. 속으론 나도 당연히 알고 있다. 그 사람 잘못이 아닌 거. 아마 내가 어른스럽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기대는 더 큰 이상을 낳고 그 이상에 기대고 있는 나를 기다리는 것은 언제나 실망이라는 덫이었다. 혹시 어른스러워지는 건, 크게 실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닐까. ‘아, 또 안 됐네. 내가 그럼 그렇지.’ 실패를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어른은 아닐까. 왜냐하면 지금껏 그래왔으니까.

어른이 되면서 조금씩 남 탓이 아닌, 내탓을 하게 된다.
몸은 이렇게 커버렸는데 자존감은 조금씩 작아져 간다.
김민준,『서서히 서서히 그러나 반드시』, 자화상, 2017, 「기대하게 되고 기대게 되고」중에서
사실 인생에서는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김민준,『서서히 서서히 그러나 반드시』, 자화상, 2017, 「길위에서」





충동적으로 대학 동기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퇴사를 했을 때 남한산성 산책을 함께 했던 그 누나다. 언제나 나를 응원해 주고 고생했다고 말해주는 사람. 처음 만났을 때부터 가정환경이나 성격이 비슷해 아직까지도 연락을 이어가고 있다. 둘 다 소심하고 누군가에게 속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전화를 하면 주변 이야기를 한참이나 한 후에 아주 조금 진심을 털어놓곤 한다. 아직 퇴근 전일 텐데 다행히도 전화를 받아주었다. 시간 괜찮냐는 질문에 전화할 여유가 있으니 편하게 이야기하라는 누나. 평소처럼 요즘은 어떤 일을 하는지, 누나는 어떻게 지내는지, 그리고 오늘의 날씨는 어떤지, 전화 걸기 전 생각했던 말이 머리에 소용돌이를 쳤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몇 번이나 입을 뗐다가 닫았다. 그 조용함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함께 조용히 있던 누나가 가만히 말했다.


괜찮아. 하고 싶은 말 해도 돼. 내가 들어줄게.


왠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만히 하고 싶은 말들을 가슴에 꾹꾹 눌러서 한마디로 만든 후 건넸다. 고마워. 그리고 잠시 다음 말을 골랐다. 물꼬가 트이니 이제 조금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고. 힘드네. 참. 그냥 위로를 좀 받고 싶었어. 퇴사를 해도 다시 일을 시작해도 뭐가 선명하지가 않네. 세상은 참 이상한 것 같아. 내가 이상한 건가.

누나가 살풋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 나도 힘들다. 퇴사하고 싶어. 매일 출근하기 싫고 왜 다들 나를 괴롭히지 못해서 안달인지 모르겠다. 근데 나도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 그런데 우리 직장 상사도, 후배도, 친구들도 다 자기가 뭘 하는지 모르면서 사는 것 같아. 다 그렇더라. 그러니까 괜찮아. 조금 더 헤매고 이상하고 아파도 괜찮아. 다들 그래. 너는 십 년이나 버티고 참았잖아. 그건 아주 대단한 일이야. 난 네가 부러워. 나는 용기가 없다. 이제.

누나가 회사에 있기에 이야기를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누나가 해준 이야기는 내 가슴을 든든하게 해 주었다. 누군가가 내 등을 단단하게 받쳐주는 느낌. 그저 단순한 위로여도 좋다. 누나의 말은 오늘을 돌아보게 하고 내일을 위해 준비하게 한다. 조금 기운이 났다. 기분이 나아졌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단단하면 된다. 나를 단단하게 하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전부터 망설이던 마음을 다잡았다. 망설이며 외면하던 시선을 단단히 고정하고 끝까지 고민하고 생각한다. 조만간 결정을 내려야 한다. 고민은 나를 더 흔들고 약하게만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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