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마지막 퇴근

느린 일기 - 손을 놓지 못하는 이유가 그저 주변의 시선 때문이란 걸

by 블랙스톤

2023년 11월 04일 토요일

구름만 한가득 바람은 선선한데 묘하게 더움, 어항 속에 있는 기분


마지막 날. 기분이 이상했다. 출근부터 퇴근까지 그냥 그랬다. 좋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고 하다못해 별 감정이 없어서 오히려 이상했다. 오전에는 일을 제대로 못해 혼이 났다. 오후에는 그나마 정신 차렸다고 칭찬 들었다. 정신을 바짝 차리면 그렇게 잘할 수 있는데 그동안 왜 그랬냐는 말을 들었다. 마지막 날까지도 욕먹고 또 혼나고 우쭈쭈 다독임을 받는, 지독하게 평범해서 오히려 기분이 이상한 그런 날이었다. 혼날 때도 칭찬을 받을 때도 큰 감정의 동요가 없었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지겨운 이야기를 들어주듯이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하고 다음 작업을 준비했다. 이런 내가 낯설게 느껴졌지만 이내 깨달았다. 아, 오늘이 정말 마지막이구나. 내 마음은 이미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구나. 내 마음을 깨닫자 일하는 게 더 쉬워졌다. 행동이 단호해지고 맞는지 틀리는지 눈치를 보던 망설임이 사라지자 손놀림이 빨라졌다. 그걸 보고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 마지막 날에야 내가 일이 돌아가는 걸 조금 알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그들에게 웃어 보이며 사람은 정말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며 살아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다시 뵙겠다고 인사하고 차 타러 가는 길. 청라 현장에는 차를 댈 곳이 없어서 두세 블록 떨어진 곳에 주차를 한다. 마지막이라고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동안 수고했다는 말이 몇 번 오가고 우리는 서로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평소처럼 인사하고 내일 볼 것처럼 여상하게 헤어져 걸어가는 길. 사람들과 멀어질수록, 현장에서 멀어질수록, 그제야 조금 가슴이 홀가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동생은 가끔 나에게 당당하던 사람이 쪼그라 붙은 게 보기 싫어졌다고 말했다. 조금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차로 가는 그 사이, 그 발걸음마다 가슴에 붙었던 것들이 떨어져 나가고 조금 내 숨이 편해진다.


차를 타고 시동을 걸고 한참이나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작아져 있었는지 왜 자꾸 쉬는 시간마다 차라리 조금 멀찍이 앉아 있었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쉬는 시간마저도 나는 모두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혹시라도 누가 먼저 일어나면 뭐라도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을 것만 같아 그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 괜찮다, 쉬어라 소리를 들은 후에야 다시 돌아와 휴식을 취했고 잠깐 쉬다가도 먼저 일어나 작업하던 곳으로 향했다. 뭐라도 정리하고 준비를 하는 게 편하다고 말했지만 사실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내가 너무 견디기 힘들었다. 쉬는 시간이 끝나기 전 혼자 있는 현장은 고요했고 그곳에서 일할 때와는 다르게 조금 느긋하게 움직이며 준비하는 시간이 내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느긋해진 마음으로 돌아보는 현장은 아까 내가 왜 그리 허둥댔는지, 다음에는 이렇게 해야겠다는 복기를 하기에도 좋았다. 막상 일이 시작되면 이리저리 눈치를 보다가 다시 머릿속은 엉망이 되고 복기했던 것들이 하얗게 사라져 버리기는 했지만.


돌이켜보면 사실 나는 겁이 났던 거다. 이미 퇴사까지 한 상태에서 이 일을 배워보겠다고 와놓고 제대로 일을 배우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거다. 그걸 인정해 버리면 이미 다 버리고 와버린 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정말 이유 없이 일을 그만둔 사람이 된다. 그래서 더 매달리고 싶었던 거다. 어떻게든 잘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더 잘하려고만 하다 보니 실수했을 때 자연스럽게 넘어가질 못했다.

첫 퇴사를 앞뒀을 때 이전 회사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어딜 가도 일 못하겠느냐고 열심히 매달리다 보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말했다. 그래, 나는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편이니 그냥 열심히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열심히 하다가 혼날 때마다 뭔가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이내 잘못됐다로 이어졌고 열심히에도 방향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떠올렸다. 동생에게 물어보고 나 스스로 아무리 복기해 보아도 어떻게 열심히 해야 할지 방향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그저 매달려만 있는 내 모습을 자각할 때마다 더더욱 이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그저 매달린 손마저 놓아버리면 정말 실패하는 거라서, 끝까지 매달려 보고 싶었다.

어느 날, 반년 이상의 시간이 지나고 내게 무엇이 쌓여 있을까 돌아봤을 때 답답해진 가슴과 움츠러든 어깨, 그리고 급하게 주변을 확인하는 떨리는 눈동자만 남아있었다. 그 순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올라서지도 떨어지지도 못한 채로 매달려 그저 메마르고 있을 뿐이라는 걸. 손을 놓지 못하는 이유가 그저 주변의 시선 때문이란 걸. 나이 마흔 처먹고 방황하는 놈, 그 소리가 그렇게 듣기 싫었다는 걸.


사십춘기.

퇴사하던 날 스스로를 지칭하며 떠들던 말. 이제는 자조의 의미가 더 많이 남은 말.


에라, 니미럴 거. 욕을 한참이나 했다. 꼭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된다. 한 대 맞아야 알게 되고 머리통이 깨져봐야 틀렸다는 걸 체감한다. 어렸을 때 맞아가며 커서 그런가 세상한테 한대 얻어맞기 전까지는 뭐가 잘못됐는지 모르는 편이다. 심지어 이번에는 퇴사하는 날이 되어서야 아, 이래서 그렇게 아팠구나, 하는 걸 느꼈다. 아마도 한참은 더 아프겠지. 쉬는 동안 문득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거나 피하고 싶을 때마다 이 아픔을 되돌아보게 될 거다. 그래도 다행인 건 이제라도 무엇 때문에 내가 그리 괴로워하면서도 그 일을 놓지 못했는지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저 그 일이 좋아서, 혹은 단순히 동생에게 미안해서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어서 조금 마음이 놓였다. 원인을 알게 되면 같은 실수를 할 확률이 낮아진다. 현장 마지막 날, 나는 가슴에 얹어두었던 것들을 다 내려두고 갈 수 있게 되었다.

달라지는 것은 없다. 방황은 이제 시작이고 좋아하는 것을 찾거나 해야 할 일을 찾거나 일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계속 헤매겠지. 그래서 뭐, 방황? 까짓 거 언제 또 방황하겠나. 더 나이 들면 정말 방황이고 뭐고 먹고살기 위해서 살아야 한다. 그럴 거라면 하루라도 젊은 지금 시원하게 방황하고 다 털어버리는 게 낫다. 괜히 더 나이 들어서 헛바람 들면 더 고생한다. 저지르기 전이라면 몰라도 저지른 후라면 고민할 필요 없다. 저지르자마자 후회할 필요도 없고. 방향 설정을 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이번 일에서도 나는 나의 최선을 다했다. 그거면 됐다. 앞으로의 방황도 최선을 다해 헤매고 괴로워하고 고민해야지. 다시는 방황할 엄두가 나지 않도록. 그래. 그거면 된 거다.


스스로를 위한 변명 하면서도 계속 욕을 하고 크게 소리 질렀다.

다 포기하고 나니 가슴이 조금 시원해졌다.

이제 다시 시동을 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퇴사 이후 나는 실패했다.





눈이 보이지 않으면 눈이 보이는 코끼리와 살을 맞대고 걸으면 되고, 다리가 불편하면 다리가 튼튼한 코끼리에 기대서 걸으면 돼. 같이 있으면 그런 건 큰 문제가 아니야. 코가 자라지 않는 것도 별문제는 아니지. 코가 긴 코끼리는 많으니까. 우리 옆에 있으면 돼. 그게 순리야.
훌륭한 코끼리는 후회를 많이 하지. 덕분에 다음 날은 전날보다 더 나은 코끼리가 될 수 있는 거야.
루리 글/그림,『긴긴밤』, 문학동네, 2021, 「코끼리 고아원」중에서


"누구든 너를 좋아하게 되면, 네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어. 아마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너를 관찰하겠지. 하지만 점점 너를 좋아하게 되어서 너를 눈여겨보게 되고, 네가 가까이 있을 때는 어떤 냄새가 나는지 알게 될 거고, 네가 걸을 때는 어떤 소리가 나는지에도 귀 기울이게 될 거야. 그게 바로 너야."
루리 글/그림,『긴긴밤』, 문학동네, 2021, 「망고 열매 색 하늘」중에서


나는 절벽 위에서 한참 동안 파란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바다는 너무도 거대했지만, 우리는 너무나 작았다. 바다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지만, 우리는 엉망진창이었다.
나는 세상에 마지막 하나 남은 흰바위코뿔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뛰어나간 노든의 아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직 죽지 않은 연인을 뒤로하고 알을 데리고 도망쳐 나오던 치쿠의 심정을, 그리고 치쿠와 눈을 마주쳤던 윔보의 마음을, 혼자 탈출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던 앙가부의 마음을, 코끼리들과 작별을 결심하던 노든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축축한 모래를 밟으며 나는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내 앞의 바다는 수도 없이 부서지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두려웠다. 하지만 나는 내가 저 바닷물 속으로 곧 들어갈 것임을, 모험을 떠나게 될 것을, 홀로 수많은 긴긴밤을 견뎌 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긴긴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빛나는 무언가를 찾을 것이다.
어쩌면 언젠가, 다시 노든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내 냄새, 말투, 걸음걸이만으로 노든은 나를 알아보고 내게 다가와 줄 것이다. 코뿔소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다른 펭귄들은 무서워서 도망가겠지만, 나는 노든을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코와 부리를 맞대고 다시 인사할 것이다.
루리 글/그림,『긴긴밤』, 문학동네, 2021, 「파란 지평선」중에서





퇴사 이후 전 회사 사람들에게 연락을 하진 않았다. 가끔 모임을 하던 이들에게도 모임에 관련된 일이 아니면 연락하지 않았다. 굳이 내가 힘들다고, 혹은 힘들지 않은 척을 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하루에 열 번도 넘게 통화하고 안부를 묻고 누군가를 욕하고 점포의 물건 상황을 이야기하던 이들과도 퇴사 이후로 한통의 전화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우리의 연결고리는 회사였으니까. 이번 퇴사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그렇게 친하게 지냈던 사장 동생과도 연락이 뜸해질지 모른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친하게 지냈던 이들과도, 현장을 주제로 이야기할 수 있었던 이들과도 모두 멀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당연히 멀어지게 되겠지. 아쉬워하지 않기로 했다. 결국 남을 건은 남는다.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음에도, 회사라는 공통 주제가 없어졌음에도 아직 나를 기억하고 연락해 주는 이들이 남는다. 일을 하며 배웠던 것들, 사람을 대하는 마음가짐이나 일을 하는 태도가 남는다. 마음에 남은 그것들이 맨땅을 들이받아가며 갈 길을 찾아야 할 내게 남을 것들이다. 지금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더 확실하게 알게 될 것들이다.


마지막 퇴근을 하는 날 시동을 걸면서 내가 어떤 것을 가장 두려워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것이 내게 극적인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다만 마지막 일탈, 늦은 방황을 선택한 이상 감수해야 하는 것에는 당연히 주변의 시선도 포함된다. 쉬는 동안 내게 필요한 것은 주변의 시선에 당당해지는 것. 나를 드러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대신 나를 위해, 내 연약한 심장을 위해 아주 조금씩만.


사실 나는 취미가 글쓰기라는 말을 대학 이후 해본 적이 없다. 친한 친구들은 내 취미를 알고 있음에도 가끔씩 바 동생을 통해 소설집을 만들었다고 들고 오면 당황하기도 한다. 평소에 워낙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니 잊고 지내는 거다. 스무 살 때부터 글쓰기는 내게 취미이자 재미있는 놀이였지만 그걸 주변에 보여주면 꼭 사람들은 결과물을 원했다. 목표가 있어야 하고 또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 것처럼 말하기도 했다. 내가 문예창작과를 나왔고 취미가 글쓰기라는 이유 때문에. 나는 한 번도 뭔가 결과물을 노리고 글을 써본 적이 없다. 그저 상상을 끄적이는 게 재미있었을 뿐이다.

취미를 밝혔더니 술자리에서 시를 요구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이는 내가 적은 글을 보고 웃기도 했다. 모두들 잠깐의 농담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누군가에게 글쓰기가 취미라는 말은 하기가 어려웠다. 그저 독서라는 취미만으로도 한없이 가벼운 내 캐릭터로는 충분히 이상한 시선을 받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내게 놀이는 놀이였다. 커피를 시켜놓고 휴지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처럼, 누군가의 말을 들으며 의미 없는 낙서를 끄적이는 사람처럼, 그저 자리에 앉아 뭔가를 보면 머리로 상상하는 놀이다. 그리고 그 머릿속에 있는 것이 종이 위에 잘 구현되었을 때 만족하고 툭, 던져놓는 놀이였다. 그렇기에 굳이 다른 이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방황할 시간이 되었다.


되든 안되든, 머리가 깨지든 말든 일단 들이박기 위해서, 나는 일단 일기를 다듬기 시작했다. 가장 편하고 제일 잘 아는 것부터, 조금씩 아주 천천히 나의 세계를 보여주기로 했다. 언제나 그랬듯 큰 일을 하기 전에는 큰 심호흡이 우선이다. 크게 숨을 쉬고 크게 숨을 내쉬고 아아, 조금만 쉬었다 할까? 아니다. 지금 미루면 계속 미루게 되겠지. 눈 딱 감고. 마지막 퇴근을 하는 날, 결말이 정해진 첫 이야기를 일기장에 담아서 천천히 펼쳐 보인다. 부디 누군가에게 닿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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