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무도 없는 곳>
우리가 슬픔을 느끼는 대부분의 경우에 기억과 사람의 상실이 있다. 사람은 속절없이 흘러가고야 마는 '시간' 위에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기억과 사람을 잃으며 살아간다. 누군가 내 곁을 떠나고 기억은 점점 흐릿해져 간다. 영화 <아무도 없는 곳>에는 그 상실을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주인공 창석은 7년 간 영국에서 지내던 소설가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4명의 사람과 차례로 만남을 갖는다. 이들은 모두 기억이나 사람을 잃은 사람들인데, 그 상실의 증상은 제각각이다.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사람, 기적에 마음을 지나치게 기대게 된 사람, 필요 이상으로 시니컬해진 사람, 조금은 미치게 된 사람 등. 2~3가지 증상을 함께 보이는 사람도, 미미하게 보이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그 증상과 상실의 이야기를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창석에게 내보인다.
그런 그들의 이야기를 묵묵한 표정으로 들어주는 창석이다. 자신의 기억과 이야기를 기꺼이 내어주기도 한다. 때론 실제 경험을, 때론 지어낸 이야기를. 소설가다운 위로의 방법이었다. 분명 어딘가 쓸쓸해 보이고 힘겨워 보였지만 창석은 끝까지 그들의 말을 들으며 그들을 위한 이야기를 건넨다.
그렇게 4명을 만난 후, 공중전화 부스에서 터져 나온 창석의 상실은 누구 못지않게 절절했다. 영화 전반에 그의 어두운 표정이 언뜻언뜻 비쳤기에, 예상은 했지만서도 서러움이 터져 나오는 그 장면은 어떤 장면보다도 어두웠고, 느렸고, 몰입하게 만들었다. 타인의 아픔을 마주하면서 자신의 아픔도 참을 수 없을 만큼 커졌던 것일까. 증상을 숨기며 애써 다듬어왔던 슬픔의 모양이 제어할 수 없이 요동치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아픔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창석처럼 '아무도 없는 곳'에서만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창석은 그간 타인에게 말하지 못했던 상처를 소설에 써내려 왔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가 아픔이 너무 커질 때쯤에는 '죽음'으로 소설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창석 자신의 말처럼 "때론 지어낸 이야기가 가장 솔직한 법"이니까.
그리고 그 소설은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만 상처를 드러낼 수 있는 사람들. 아픔을 아는 사람만이 아픔에 공감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창석은 글로도 이야기를 내어주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대신 이번에는 좀 더 솔직한 방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듯이. (실제로 극 중 유진은 창석의 소설을 읽은 소감에 대해 '몰랐던 선배의 인생에 대해 알게 된 기분이었어.'라고 말하기도 한다.)
사람과 기억의 상실을 겪지 않는 사람은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많이 아파하고 있을 것 같아 슬픈 기분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창석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이야기를 나누어주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묵묵히 말할 수 있게 된 슬픔의 이야기도, 미소가 지어지는 따뜻한 이야기도, 흥미롭게 지어진 이야기도 좋다. 마음에 이야기 하나를 품고 있다가 누군가에게 말로, 글로 내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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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관 감독의 영화라니! 보러 가지 않을 수가 없어서 혼영을 예매했다. 영화를 보러 가기 전 <박하선의 씨네타운>에서 김종관 감독과 연우진 배우의 인터뷰를 들었다. 김종관 감독은 '대화'를 여러 형태로 풀어내고 있다고 말했다. <최악의 하루>는 둘의 대화를 길게, <더 테이블>은 한 테이블을 거쳐가는 4쌍의 대화를, <밤을 걷다>는 죽은 사람과의 대화를, 그리고 이번 <아무도 없는 곳>은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을 만나며 하게 되는 대화를 담았다고 했다. 전보다 어두운 분위기라고도 덧붙였다.
영화는 이야기 구성도, 어두운 분위기라는 것도 감독의 설명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우리들의 감정과 관계가 세심하게 녹아 있었다. 아픔을 표현하고 받아들이는 저마다의 방식, 주변 사람들의 멍한 표정, 그리고 그걸 바라보다가 내면을 마주하게 된 연우진 배우의 표정 변화까지. 포스터를 감싸는 여러 은은한 색감들 만큼 매력 있었던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