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면 공포
어린아이라면 특유의 밝음으로 어른들을 미소 짓게 하는 법인데, 나의 고개는 대부분 땅을 향해있었다.
유난히 자주 붉어지는 얼굴이 무겁고 버거웠다. 낯선 어른이 말을 걸 때나 새로운 친구와 인사를 나눌 때, 심지어 누가 불러서 ‘네?’라고 대답하는 찰나에도 얼굴은 순식간에 타올랐다. 머리 쪽으로 피를 열심히 밀어 올리는 심장 때문에 두피와 얼굴, 목 전체가 뜨거워졌다. 방화범은 자주 예고 없이 얼굴에 불을 질렀고, 몸은 언제나 긴장 상태였다.
활활 타오르는 얼굴은 ‘아무것도 아닌 일’을 ‘별일’로 만들었다. 관심도 없던 남자아이가 말을 걸어도 내 낯은 눈치 없이 벌겋게 물들었다. 붉은 얼굴은 마음을 속였다. 그저 자극에 의한 ‘무릎반사’에 감정을 담아버렸다. 어쨌든 소년을 좋아한다고 착각하기 시작하자 그를 볼 때마다 얼굴은 물론이고 귀와 목까지 격렬하게 붉어졌다. 하필 남녀공학인 중고등학교에 다녔다. 피부는 수시로 붉어졌고, 나는 반사신경이 지목한 수많은 아이를 짝사랑했다. 오늘은 1반의 키 큰 학생, 그다음 주는 3반의 안경 쓴 학생. 이러다 전교생을 짝사랑하게 될까 봐 결국 남학생들을 피해 다녔다.
거짓말도 할 수 없었다. 거짓말의 ‘ㄱ’이라도 입술에서 흘러나오면, 마치 거짓말 탐지기의 전원이 켜진 듯 얼굴은 금세 붉게 달아올라 ‘거짓말, 거짓말!’이라며 알람을 울려댔다. 정직해서 좋을 게 없는 세상이지만, 나는 할 수 없이 정직하게 살아야 했다.
성인이 되고부터는 낯짝을 두꺼운 파운데이션으로 덮고 다녔다. 추운 겨울날의 오리털 파카처럼, 메이크업은 얇디얇은 얼굴에 뻔뻔함을 입혀주었다. 사회에서는 어느 정도의 거짓이 필요한 법이다. 특히나 면접을 볼 땐 솔직함보다 자신을 얼마나 잘 포장하느냐가 관건이다. 평소보다 더욱 강력한, 유성 매직도 가려버리는 파운데이션을 장착하고 면접을 보았다. 하지만, 메이크업이 차마 닿지 못한 목과 귀가 불에 타올랐고, 나의 꼴은 얼굴만 도려내어 허연 가면을 씌운 듯 기괴했다. 결국 목까지 파운데이션 갑옷을 둘렀다. 몇 번째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면접을 치른 날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옷을 벗었다. 땀과 피지 때문에 흰 셔츠 깃은 진한 황톳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셔츠를 비누로 빡빡 문질렀지만, 초강력 파운데이션이라 잘 지워지지도 않았다. 세면대에는 수돗물이 콸콸 흘렀고, 내 입에서는 짜증 섞인 울음이 흘러나왔다.
나이가 들면 뻔뻔해진다는데, 내 얼굴은 도무지 나이가 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젊을 땐 수줍어 보였겠다만, 얼굴이 붉은 노처녀는 화가 나거나 더워 보일 뿐이었다. 민낯으로는 그 누구도 만날 수 없었다. 얼굴 전체를 피부색으로 문신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도 했다. 슬프고 구질구질한 사연을 들은 반영구 화장의 달인들은 ‘차라리 피부과를 가 보지 그러냐’며 당혹스러워했다.
두꺼운 낯짝은 사람을 설득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을 가능하다며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큰소리를 치거나, 아무 대안이 없어 보이는 일에도 천연덕스럽게 좋은 대안이 있다고 침착하게 어르면 상대는 일단 그 말을 믿었다. 회사의 대표와 능력 있는 상사들은 얼굴색이 거의 변하지 않았다. 두꺼운 얼굴로 이해관계자들과 두터운 신뢰를 쌓았다. 사회생활에서 부끄러움과 소심함은 신뢰를 쌓는 데 걸림돌이 되었고, 신뢰를 얻지 못하는 사람은 약자나 마찬가지였다.
약자의 표식을 감추기 위해, 나의 고개는 어른이 되었지만 늘 땅을 향해있었다.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