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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홀로 Sep 08. 2022

얼굴이 빨개서 슬픈 짐승

적면 공포




어린아이라면 특유의 밝음으로 어른들을 미소 짓게 하는 법인데, 나의 고개는 대부분 땅을 향해있었다. 




유난히 자주 붉어지는 얼굴이 무겁고 버거웠다. 낯선 어른이 말을 걸 때나 새로운 친구와 인사를 나눌 때, 심지어 누가 불러서 ‘네?’라고 대답하는 찰나에도 얼굴은 순식간에 타올랐다. 머리 쪽으로 피를 열심히 밀어 올리는 심장 때문에 두피와 얼굴, 목 전체가 뜨거워졌다. 방화범은 자주 예고 없이 얼굴에 불을 질렀고, 몸은 언제나 긴장 상태였다.           






활활 타오르는 얼굴은 ‘아무것도 아닌 일’을 ‘별일’로 만들었다. 관심도 없던 남자아이가 말을 걸어도 내 낯은 눈치 없이 벌겋게 물들었다. 붉은 얼굴은 마음을 속였다. 그저 자극에 의한 ‘무릎반사’에 감정을 담아버렸다. 어쨌든 소년을 좋아한다고 착각하기 시작하자 그를 볼 때마다 얼굴은 물론이고 귀와 목까지 격렬하게 붉어졌다. 하필 남녀공학인 중고등학교에 다녔다. 피부는 수시로 붉어졌고, 나는 반사신경이 지목한 수많은 아이를 짝사랑했다. 오늘은 1반의 키 큰 학생, 그다음 주는 3반의 안경 쓴 학생. 이러다 전교생을 짝사랑하게 될까 봐 결국 남학생들을 피해 다녔다.



   

거짓말도 할 수 없었다. 거짓말의 ‘ㄱ’이라도 입술에서 흘러나오면, 마치 거짓말 탐지기의 전원이 켜진 듯 얼굴은 금세 붉게 달아올라 ‘거짓말, 거짓말!’이라며 알람을 울려댔다. 정직해서 좋을 게 없는 세상이지만, 나는 할 수 없이 정직하게 살아야 했다.




성인이 되고부터는 낯짝을 두꺼운 파운데이션으로 덮고 다녔다. 추운 겨울날의 오리털 파카처럼, 메이크업은 얇디얇은 얼굴에 뻔뻔함을 입혀주었다. 사회에서는 어느 정도의 거짓이 필요한 법이다. 특히나 면접을 볼 땐 솔직함보다 자신을 얼마나 잘 포장하느냐가 관건이다. 평소보다 더욱 강력한, 유성 매직도 가려버리는 파운데이션을 장착하고 면접을 보았다. 하지만, 메이크업이 차마 닿지 못한 목과 귀가 불에 타올랐고, 나의 꼴은 얼굴만 도려내어 허연 가면을 씌운 듯 기괴했다. 결국 목까지 파운데이션 갑옷을 둘렀다. 몇 번째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면접을 치른 날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옷을 벗었다. 땀과 피지 때문에 흰 셔츠 깃은 진한 황톳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셔츠를 비누로 빡빡 문질렀지만, 초강력 파운데이션이라 잘 지워지지도 않았다. 세면대에는 수돗물이 콸콸 흘렀고, 내 입에서는 짜증 섞인 울음이 흘러나왔다.      






나이가 들면 뻔뻔해진다는데, 내 얼굴은 도무지 나이가 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젊을 땐 수줍어 보였겠다만, 얼굴이 붉은 노처녀는 화가 나거나 더워 보일 뿐이었다. 민낯으로는 그 누구도 만날 수 없었다. 얼굴 전체를 피부색으로 문신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도 했다. 슬프고 구질구질한 사연을 들은 반영구 화장의 달인들은 ‘차라리 피부과를 가 보지 그러냐’며 당혹스러워했다.      




두꺼운 낯짝은 사람을 설득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을 가능하다며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큰소리를 치거나, 아무 대안이 없어 보이는 일에도 천연덕스럽게 좋은 대안이 있다고 침착하게 어르면 상대는 일단 그 말을 믿었다. 회사의 대표와 능력 있는 상사들은 얼굴색이 거의 변하지 않았다. 두꺼운 얼굴로 이해관계자들과 두터운 신뢰를 쌓았다. 사회생활에서 부끄러움과 소심함은 신뢰를 쌓는 데 걸림돌이 되었고, 신뢰를 얻지 못하는 사람은 약자나 마찬가지였다.




약자의 표식을 감추기 위해, 나의 고개는 어른이 되었지만 늘 땅을 향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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