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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홀로 Aug 16. 2022

빨간 약과 파란 약

약물치료






“만약, 고흐가 정신질환을 앓지 않았다면 지금의 명화를 그릴 수 있었을까요?”


내 질문에 의사는 잠시 침묵하다 답했다.


“못 그렸을 거라고 봅니다.”


나는 그의 답변에 불안해졌다.


“그럼, 제 창의력도 약을 먹는 동안에 사라질 수 있겠네요? 예전처럼 일하지 못할 수도 있나요?”


그는 안경 너머로 나를 찬찬히 살피며 입을 열었다.


“불안과 함께하며 창의력을 지킬지, 평범하지만 편안하게 살지, 그건 환자의 선택이에요. 하지만, 단기적으로 의사의 처방 아래 먹는 약은 그 정도로 영향을 주지는 않아요. ”




하기야, 회사에서 잘린 거나 마찬가지인 마당에 창의력이며 일이 지금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자꾸 핑계를 대는 건 두려움 때문이었다. 정신과 약은 독하다던데. 뇌가 영구적으로 망가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한 장면이 머리에서 맴돌았다. 전두엽 절제술을 받고 멍하니 누워만 있던 잭 니컬슨의 눈빛. 약을 먹으면 나도 그렇게 될 것만 같았다. 내 불안을 읽은 의사는 요즘 약들이 얼마나 좋은지 설명하며 나를 안심시키려 했다.




집에 돌아와 약에 관해 모조리 검색했다. 엄청난 목록의 부작용이 보였다. 간질 발작, 환각, 마비, 호흡곤란, 운동실조, 자살 충동 등 무시무시한 이름들이 약봉지를 뜯으려는 손을 자꾸 멈춰 세웠다. 처방받은 약은 <리보트릴>이라는 항불안제와 <렉사프로>라는 항우울제였다. 그래, 진통제나 감기약도 부작용 목록은 대단하잖아. 일단, 미용실도 가고, 지하철도 타야지. 전화 통화도 하고.




무너진 일상은 두려움을 이겼다. 모든 능력을 잃어버린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이 극한의 던전을 마주한 기분이랄까. 악마의 힘을 빌리든, 영혼을 팔든 뭐라도 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나는 마법의 알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이 약이 내게 어떤 기적을 행하길 바라면서.








며칠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생생한 꿈’으로 인한 ‘수면장애’가 부작용이었다. ‘생생하고’ ‘기괴한’ 꿈이 매일 밤 이어졌는데, 두 형용사의 조합은 어린 시절 처음 본 생선회를 떠올리게 했다. 갓 포를 뜬 생선회가 접시에서 눈을 부라리며 꼬리를 꿈틀거리던, 그 생생함과 기괴함. 한 번은 무지개색의 거대한 앵무새를 타고 형광빛이 돌 정도로 새파란 하늘을 종횡무진 날아다녔는데, 앵무새의 목이 뎅겅 잘려 나갔다. 나는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채 목 없는 앵무새와 추락했다. 아악. 소리를 지르며 깨어나고 나서도 몇 분 후에야 꿈이었다는 걸 알아차릴 정도로 현실과 분간이 되지 않았다. 비명을 지르느라 그랬는지 한참 벌어져 있었던 듯 버석거리는 입을 축이러 부엌으로 가면서 ‘아, 고흐가 이래서 색을 과감하게 쓴 건가?’ 말도 안 되는 추측을 했다. 새벽 3시였다. 수면장애는 약 2주 정도 지속되었다.




한편, 항불안제의 위력은 대단했다. 온갖 신경이 생생한 꿈에 다 소진되었는지, 평소 예민했던 감각들이 무뎌졌다. 예전 같으면, <사람이 보인다 - 저 사람이 나를 보는 것 같다 - 당황스럽다 - 얼굴이 화끈거리며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 땀이 난다 - 발걸음을 급히 돌려 사람을 피한다> 이 과정이 3초 안에 벌어졌는데, 지금은 온갖 번민이 사라져 버린 수도승처럼 느긋하게 걸을 뿐이었다.



‘아아... 저어어기 사람이네에에. 아아… 저거어어언 개네에.’



마음의 소리도 느렸다. 그리고 뒤따라오는 생각이나 감정도 없었다. 그냥 사람이고 개였다.




만약, 내가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면 약의 위력은 분명 일에 악영향을 줬을 것이다. 좋은 아이디어는 스트레스 상황에서 집요하게 팠을 때 나왔다. 온갖 감정과 뒤죽박죽으로 섞인 생각들이 서로 접 붙거나 충돌해서 뇌를 온통 헤집어 놓았다. 뉴런의 시냅스들이 미친 듯이 전기신호를 보내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밥을 먹을 때에도, 길을 걸을 때도, 취침 직전에도 늘 머리는 어수선했다. 어수선한 머리는 하반신과 직통으로 연결되었는지, 내 다리는 늘 해머 드릴처럼 콘크리트 바닥을 뚫을 듯 맹렬하게 떨어댔다. 짧으면 2~3일, 길면 일주일을 넋이 나간 채 살다가 유레카를 외쳤다.



약은 *호더(hoarder)의 쓰레기 방을 미니멀리스트의 방으로 바꿨다. 뇌의 모든 방은 텅 비어 고요했다. 일을 하던 중이었다면, 이 고요한 머리가 나를 곤경에 빠트렸겠지만, 백수에게는 별일이 아니었다.






2주가 지나자, 부작용이 거의 사라졌다. 아, 이게 보통 사람의 삶인가. 고속도로의 스포츠카처럼 빠르고 시끄러웠던 세상이, 경운기가 달리는 전원 풍경처럼 조용하고 여유로웠다. 창의력 따위도 미련 없이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 창의력을 버리고 평온한 세계에서 살 것이냐, 창의력과 함께 무너지는 세계에서 살 것이냐 


        

약은 매트릭스의 모피어스처럼 두 갈래의 선택지를 주었다.           







*호더(hoarder): 일종의 강박장애.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모아둔다. 심지어 쓰레기도 쌓아둔다.

    

**오해하지 마시라. 본인의 창의력이 썩 훌륭하지는 않다. 하지만 창의력이 밥줄인 분야라, 먹고살아야 했기에 집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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