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홀로 Aug 17. 2022

인생은 장밋빛보다 핏빛

치료 종료






3개월여의 치료 프로그램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간 사회 불안증으로 꺼려왔던 일을 수행해야 하는 미션이 주어졌다.




오랜만에 퇴근 시간 지옥철을 이용해 보기로 했다. 항불안제의 영험한 능력 때문에 지하철 역사 앞에 섰지만 별 느낌이 없었다. 시커먼 슈트를 입고 우르르 소 떼처럼 달려오는 직장인들을 보면서도 머릿속에서 항상 울리던 걱정의 소리가 방음창을 닫은 듯 싹 사라졌다. 이리저리 소 떼들에 떠밀리며 지하철에 탔다. 한 시간여가량을 사람들 사이에 구겨진 채로 앞에 앉아 조는 아저씨의 빈 정수리를 한참 내려다보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침착했다. 너무 멀쩡한 나를 대면하자, 기쁘면서도 착잡했다. 지하철 따위에 겁을 먹다니. 과거의 내가 참으로 한심하고 불쌍했다.

  



한동안 방치된 내 머리는 ‘거지 단발’이 되어있었다. 미용실에 갈 기회였다. 기회라니, 미용실에 가는 걸 기회라 말할 수 있다니. 작은 감탄을 연발하며 추레한 머리를 모자로 겨우 가리고 미용실로 향했다.


새로 생긴 헤어 살롱이었는데, 살롱이라는 단어를 쓴 것만 해도 이미 고급진 냄새가 났다. 골드와 짙은 그린 컬러가 잘 조화된 간판과 매장 인테리어, 절제된 타이포그래피가 돋보이는 이 살롱은 밤에도 찬란한 금빛 조명으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밥풀과 김치찌개의 추억이 묻은 츄리닝 바지와 삼선 쓰레빠의 앙상블로 한껏 초췌해진 나를, 직원들은 수년간 단련된 상업적인 미소로 맞아주었다. 예전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거친 숨을 내쉬며 땀을 흘리다가, ‘아직 늦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돌아가 버릴까’ 주저했을 것인데,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자연스럽게 그들과 인사하고 겉옷을 벗은 후, 비치된 과일 주스까지 뽑아 마셨다. 이거 무슨 주스지? 맛있네요. 가운을 준비하는 직원에게 천연덕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전에는 직원이 말을 걸까 두려워하며 시선을 피했는데, 예사롭게 행동하는 내가 낯설면서도 기특했다. 별것도 아닌 일에 자존감이 무럭무럭 자랐다.


가운을 두르고 다리를 꼰 채 코스모폴리탄지를 뒤적이는 내 모습이 어둑해진 유리창에 비쳤다. 머리는 거지꼴이었지만, 자세는 당당했다. 전에 없이 직원과 꽁냥꽁냥 끊임없는 대화를 하며 머리를 다듬었고, 거울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정정해달라 요구했다. 거울을 차마 보지 못해 눈을 감고 있다가 집에 오기 바빴던, 그래서 마음에 드는지 안 드는지를 집에 와서야 알 수 있었던, 결국 한동안 모자만 쓰고 다녔던 지질한 인간은 사라졌다. 아무 일 없이 머리만 예뻐진 채 미용실을 나온 나는 속으로 환호를 질렀다. 나 이제 정말 괜찮구나, 이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겠구나!






약의 용량을 서서히 줄여가기 시작했다. 강력한 효과만큼 의존성도 강했다. 의사의 지도를 잘 따라야 했다. 처음 시작할 때보다는 덜했지만, 금단증상으로 수면장애가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직면 훈련이 남았다. 가장 두려워하던 순간을 재현하면서 그 장면을 영상으로 찍어 확인해보는 것이다. 나는 프레젠테이션을 하기로 했다. 예전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퇴사 이후 처음으로 파워포인트와 포토샵, 일러스트 등 그래픽 프로그램을 켰다. 실제로 제안할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듯, 정성스레 작업했다. 직면 훈련 당일, 나는 비즈니스 미팅용 정장을 챙겨 입었다. 포멀한 디자인의 스카프도 둘렀다. 잔인했던 여름이 끝나가고 있었다.

  



카메라가 켜졌다. 의사 선생님의 사인이 내려지자 나는 발표를 시작했다. 열 명 남짓한 환자들을 광고주라 상상하며 입을 뗐다. 역시 긴장을 했는지, 말이 점점 빨라졌다. 열심히 준비한 시각 자료와 있어 보이는 전문용어를 써 가며 회사의 포트폴리오 및 광고 전략을 열심히 설명했다. 얼굴이 화끈거려서 그런지 3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이 30분처럼 느껴졌다. 발표가 끝나고 비디오를 다시 돌려보았다. 예상과 다르게 말이 빠르지 않았다. 표정은 여유로웠고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딱히 결점을 찾을 수 없었다. 와, 이게 되는구나. 다른 사람들도 각자의 고민 상황을 카메라 앞에서 재현했고, 녹화 파일을 확인했다. 그들 역시 생각보다 괜찮은 자기 모습에 놀라워했다. 다들 입꼬리가 마구 올라갔다.

 



각자의 설렘이 공간을 채웠다. 치료 동기들과 기쁨에 젖어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이제야 내 인생이 장밋빛으로 물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꽃향기가 아닌 피비린내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제야 깨달았다. 그 찰나의 행복이 장밋빛이 아니라 핏빛이었음을. 그저 잠깐의 착시였음을. 

이전 09화 빨간 약과 파란 약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