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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홀로 Aug 21. 2022

너와 나는 빛과 어둠이었다

외향인과 내향인의 만남






사회로 돌아갈 길이 묘연해진 나는 계속 동생과 함께 일을 했다. 동생의 등 뒤에 숨은 채, 불안 증상이 보일 만한 장소나 상황을 회피하며 반쪽짜리 사회인으로 살았다.




문제는 선 자리였다. 이미 삼십 대 중반을 넘어선 나는 노처녀의 경계를 넘어가고 있었다. 어르신들은 과년한 처녀가 안타까워 보였는지 선을 적극적으로 주선해주었다. 어른들이 엮인 자리에서 상대에게 술을 권하기는 어려웠다. 술이나 약 대신 우황청심환을 먹고, 라벤더 오일 같은 민간요법으로 나대는 심장을 안정시키려 부단히 노력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상대를 만나 카페에 들어가면, 일단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부터 들렀다. 땀을 닦아내고 잔뜩 흥분한 심장을 가라앉히면서 메이크업을 수정하는 데에는 10여 분 이상이 걸렸다. 남자는 한참을 혼자 앉아있었다. 자리로 돌아오니 남자의 표정이 떨떠름했다.

  

“집에 가신 줄 알았습니다.”


“미, 미안해요…아, 그게… 정말 미안해요.”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이유를 대기도 난감했다. 낯선 사람을 만나면 땀이 많이 난다거나, 술을 마시지 않으면 불안해서 그랬다고 차마 말을 할 수 없었다. 시작부터 삐걱거리자 불안은 금세 나를 사로잡았다.


나의 ‘제정신’은 불안에 차근차근 살해당했다. 죽어가는 ‘제정신’을 가까스로 차려봤지만, 나는 이미 상대의 물컵을 엎질렀고, 질문에 엉뚱한 답을 하고 있었다. 적극적으로 나를 관찰하는 이성의 시선에 내 눈은 갈 길을 잃고 사방을 정신없이 훑었다. 그 와중에 앞니에 뭐가 끼지 않았는지, 머리카락에 먼지가 비듬처럼 앉지는 않았는지 자꾸 잡생각이 들었고, 방황하던 두 손은 앞에 있는 냅킨을 갈기갈기 찢었다. 상대의 눈동자에 냉기가 돌았다. 결국 우리는 겉도는 대화만 하다가 만난 지 한 시간도 채 안 되어 헤어졌다. 헛웃음이 나왔다. 병원을 졸업한 지 3년이 된 환자의 일상은 예전처럼 삐걱거렸다. 




연이은 실패에 낙담한 내게 친구는 소개팅을 주선했다. 당시 나의 바람은 오직 하나였다.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착하기만 하면 돼. 당시 친구는 미국 교포와 교제 중이었는데, 그를 통해 교포를 소개받게 되었다. 친구의 남자 친구는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했고, 애정 표현에도 열정적이었다. 공공장소에서도 사랑 표현에 거리낌 없는 미국 문화가 좋아 보였다. 




친구는 상대의 사진을 여러 장 보내주었다. 다수의 사람과 찍은 사진이 대부분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16개의 앞니를 다 드러내며 웃고 있는 그가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하필 소개팅이 잡힌 때가 초여름이었다. 긴장성 다한증이 나타날까 봐 고민이 되었으나, 내가 교포를 언제 만나보겠냐 싶어 위험을 감수하고 만남을 수락했다.           





 

멀리서 기다란 남자가 손을 흔들었다. 해가 막 지려는 초저녁, 길게 늘어진 그림자 때문인지 남자는 더 길쭉해 보였다. 미국산 젖소의 위력을 느꼈다. 반바지를 입은 그의 팔과 다리에는 털이 수북했다. 어휴, 보기만 해도 더워. 얼음이 가득 찬 음료를 쭉쭉 빨아들이며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갑자기 쏟아지는 영어에 아연실색했다. 어버버버.



그는 한국어를 거의 할 줄 몰랐다. 주선자가 뛰어난 한국어 실력을 가졌기에 나는 그 역시 한국어를 웬만큼 할 줄 알았다. 슬프게도 우리의 대화는 네? 예스? 파든? 아임 쏘리? 로만 이어졌다. 더운 날씨, 낯선 이와의 만남, 외국어로 나는 이미 초토화가 되었고 결국 한 마디를 뱉었다.


“렛츠 드링크!”


남자는 속도 모르고 그뤠잇 쏼라쏼라를 연발했고, 나는 근처 주점에 들어갔다. 과거 소개팅 대참사(4번째 에피소드, 술이 들어간다, 쭉쭉쭉쭉쭉! 을 참고하시면 소개팅 흑역사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가 머리에 떠올랐지만, 지금은 그걸 걱정할 여유가 없었다. 일단 술부터 시켰다. 남자는 내가 무얼 하든 눈치 없이 빙글빙글 웃기만 했다. 판단하거나 재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속없어 보이는 그 모습에 안도감이 들었다. 마음의 소리는 원래 털보들 마음이 따뜻하다며 남은 방어벽을 토닥토닥 허물었다.





10년 전 다녀온 어학연수 시절의 <드렁큰 잉글리시>가 술을 마시자마자 혀를 타고 나오기 시작했다. 알코올이 다시 여유로움과 자연스러움에 발동을 걸어주었다. 물론, 다 발라먹은 생선 가시처럼 나의 영어는 앙상한 데다 즉시 폐기처분을 해야 할 정도로 망가졌지만, 술 때문에 분위기는 밝았다. 남자 역시 되지도 않는 한국어를 하나씩 뱉었고, 술에 취하자 빌 클린턴 성대모사를 하며 까불었다. 아, 그대는 푼수였군요. 푼수 앞에 있으니 긴장이 완전히 풀렸다. 시뻘건 얼굴로 우리는 위아더월드를 외치며 새벽 2시까지 달렸다.





여러 차례 술자리를 거치며, 속없는 남자와 정신없는 여자는 연인이 되었다. 남자는 사진 속 모습처럼 완연한 외향인이었는데 항상 친구 모임이나 동아리 모임, 파티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사람을 만나야 에너지가 끓는 그는 여자 친구를 여러 친구에게 보여주고 싶어 했다. 우리는 그 문제로 많이 다퉜다. 보통 그들이 지칭하는 ‘파티’에는 기본 20명 이상이 모였다. 절친으로 구성된 소규모 모임이 아니면 불편해하는 나를, 그는 이해할 수 없다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물론, 술판이 벌어지는 자리에는 몇 번 참여했지만, 이제는 간이 버티지 못하는지 초면에 죄송하게도 뻗어버리기 일쑤였고 남친의 친구들은 그런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다른 국가에서 자란 둘은 성격적으로도 너무 다른 세계에서 살았다. 극단적 외향인과 극단적 내향인은 빛과 어둠처럼 한 공간에 공존했으나 빛은 어둠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했고, 어둠은 빛의 세계가 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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