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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홀로 Aug 23. 2022

나를 구한 비대면 시대

외향인과 내향인






“당신 진짜 안 갈 거야? 다 부부 동반으로 오는데?”

“다들 부부 동반으로 온다고 우리도 그러라는 법 있어요? 어쨌든 난 안 가요!”



사십 년 지기 부모님의 갈등은 부부 동반 모임을 함께 나가느냐 아니냐에서 시작했다. 



“당신은 참 이기적이야, 사람들이랑 좀 어울리고 그래야지!”

“아니, 거기 내가 아는 사람이 있어요? 죄다 당신 친구들이며 지인들인데, 당신이 이기적인 거 아니에요?!”



갈등은 인신공격으로 이어진다. 결국, 아버지는 현관문을 거칠게 닫고 홀로 외출한다. 내겐 너무나 익숙한 광경이다. 부모님의 결혼생활뿐만이 아니라, 나의 결혼생활에서도.


  

딸은 엄마 팔자를 닮는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이 원칙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는 듯, 딸은 아버지와는 판이한 남자를 남편으로 선택했건만, 오이디푸스의 망령은 그녀의 눈을 가렸었나 보다. 결혼 이후에야 나는 그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상당 부분 발견했다. 남편은 빨간 날이면 밖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렸다. 친하든 아니든 그에게는 모두 친구였다. 사람을 좋아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편, 지인의 지인이 만나 인사를 나누고 가벼운 대화를 나누는 미국식 파티문화는 내게 너무 낯설었다. 넓고 얇은 관계가 소모적으로 보였다. 남편은 끝도 없이 인간관계를 확장해 나갔다. 주변 사람을 주로 가위질해왔던 나는 그의 피상적인 인간관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또 하나의 장애는 언어장벽이었다. 만약 남편이 토종 한국인이었다면 지금보다는 모임에 나가는 횟수가 살짝 늘었을지도 모른다. 남편의 지인들은 원어민, 유학생, 국제변호사, 외국계 기업 직원 등 해외에서 오래 거주했거나 영어를 일터에서 쓰는 사람들이었다. 20대 초반에 캐나다에 1년 잠깐 다녀와서(영어 못하는 외국인 친구들과 잘 어울려서 영어 실력이 늘지는 않았다) 10년 이상 영어 공부를 놓아버린 소위 영포자에게 그들은 감히 넘볼 수 없는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었다.



"야, 한국인이 한국어만 잘하면 됐지, 영어 좀 못한다고 그게 대수냐. 미국인이 한국어 잘하면, 놀랄 거리지 당연한 건 아니잖아."



친구들의 위로가 와닿지 않았다. 중학교 때부터 영어는 우리를 평가해왔다. 가장 중요하다는 국, 영, 수에 영어는 당연하다는 듯 있었다. 대학교에서는 영문학이나 영어 전공이 아니어도 토익 700점이 넘어야 졸업을 할 수 있었다. 영어를 쓸 일이 없는 회사에서도, 승진시험이나 입사 시험에 토익이 관여했다. 전혀 관련 없는 분야에서조차 내 능력을 가늠할 정도로 영어의 힘은 막강했다. 그런 나라에서 원어민 남편의 부인이 영어를 못한다는 건 능력 미달이었다. 야속하게도 능력 미달자의 영어 실력은 금방 늘지 않았다.



초반에는 몇 번 모임에 따라 나갔다. 남편은 내가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 돕겠다고 약속했다. 한 시간 전의 약속이 무색하게도 그는 매번 그의 친구들과 대화하기 바빴고,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그의 지갑과 함께 다소곳이 앉아 있다가 누군가 말을 걸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항상 다퉜다. 나를 챙긴다고 했던 사람이 혼자 신나게 노니 재미있었느냐, 그럴 거면 나는 왜 데리고 갔느냐, 내가 네 소지품이냐. 서너 시간 동안 닫혀있던 입은 댐이 열리듯 불만을 쏟아냈다. 남편은 미안하다며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 둘러댔지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폭격에 결국 화를 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친구들’, ‘파티’라는 단어만 나와도 몸서리가 쳐졌다. 다툼은 날로 격해졌다.

     





전 세계를 멈춰 세운 코로나바이러스는 부모님처럼 40년을 갈 것 같던 외향인과 내향인의 갈등도 중단시켰다. 남편은 한껏 풀이 죽은 모습이었지만, 비대면으로 사람들을 꾸준히 만났다. 방에 처박혀 자신의 모국어로 사람들과 수다를 떨며 웃는 걸 보면 한편으로 측은하기도 했다. 



내향인은 비로소 잔잔한 평화를 얻었다. 작은 집에 갇혀 24시간을 서로 붙어있으니 사사로운 다툼은 잦았지만, 모임 때문에 일어나던 큰 다툼이 사라졌다. 코로나 이전부터 이미 사회적 거리두기를 생활화하고 있었고, 몇 없는 나의 친구들과도 주로 통화를 하던 내게 ‘비대면’은 딱히 특별할 게 없었다. 한 가지 새로웠던 점은, ‘비대면’을 선호하는 사람을 예전에는 ‘비인간적’이고 ‘비상식적’으로 봤는데, 남편은 물론이고 전 세계 모든 이가 나처럼 지낸다는 것, 그리고 그게 ‘상식적’인 일이 되었다는 것이다. 남편은 다행히도 비대면 모임에는 나를 불러내지 않았다. 아마 그에게 비대면 모임은 ‘모임’이라고도 할 수 없는 모임이었던 것 같다.


 

비대면 시대는 한 부부의 위태롭던 관계를 되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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