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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홀로 Aug 24. 2022

딩크족이 아닌 싱크족이 되어버렸다

잉여 인간의 슬픔



자식이 없다고 말하면 대부분 이렇게 물었다.


“아, 딩크족?”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듯 마는 듯 대답을 얼버무리고 넘어갔다. 딩크는 더블 인컴, 노 키즈(Double Income, No Kids )인데 사실 우리는 싱글 인컴, 노 키즈(Single Income, No Kids)였으니까. 그 애매함이 나를 위축시켰다.






처음부터 싱크족은 아니었다. 한국인이라면 의지를 불태울 수밖에 없는 ‘내 집 마련’을 위해 나도 남편만큼은 벌어야 했다. 불안 장애가 도지고 있었지만, 서울 어딘가에 뿌리를 박지 않으면 심정적으로 더 불안해질 것 같았다. 경제적인 문제는 불안증 따위에 대한 염려를 가볍게 넘겨버렸다. 동생의 사업체는 여전히 자리를 잡지 못했고, 나는 결국 그곳을 떠났다.




때마침, 예전 상사분이 자신이 속한 직장에 들어오라고 제안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대형 입시학원의 홍보팀 디자인 부서였는데, 교재 표지나 학원 홍보 광고물 제작 등을 맡았다. 예전 직장처럼 격무에 시달리지는 않았지만, 각 학원 지점에서 실시간으로 보내오는 자질구레한 의뢰를 보통 반나절이나 하루 내에 처리해야 했다. 주로 시간을 들여 아이디어를 고심해 낸 후 작업을 진행하는 나로서는 빠른 일 처리속도를 따라가기 힘들었다. 야근을 하지 않는 분위기 때문에 근무시간 내에는 화장실을 갈 새도 없이 바빴다.



   

경력자의 이직은 신입의 입사와 판이했다. 팀원들은 팀장인 나를 기대에 찬 눈으로 맞았다. 광고주와도 직접 소통해야 했다. 8시간의 근무시간 동안, 나는 화난 복어처럼 신경을 곤두세운 채 지냈다.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등골이 선뜩했다. 사무실 벽시계의 초침 소리가 고막을 후벼 팠다. 집에 돌아오면 씻지도 못한 채 침대에 쓰러졌고, 주말에는 침대 밖을 벗어나지 못했다. 외출하자고 조르는 남편에게 제발 혼자 나가라며 화를 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출퇴근 지하철에서 공황 발작이 다시 시작되었다. 게다가 편도선염에 주기적으로 걸렸고 신우신염까지 겹쳐 한동안 고생을 했다. 몸이 살려달라고 난동을 피우는 것 같았다. 병가를 내는 횟수가 잦아지자, 눈치가 보였다. 나를 데리고 온 상사의 체면을 더는 깎지 말아야 했다. 사직서를 쓰고 돌아오는 길에 아직 채 여물지 못한 달이 보였다. 한 달 전, 내 취직 소식과 연봉 액수를 듣고 뛸 듯이 기뻐하던 남편의 얼굴이 떠올랐다.    





  

퇴사 후 첫 일주일은 편안했다. 2주 차에 들어서자, 돈을 벌지 않는 삶이 어색하고 공허했다. 사회는 더 이상 네가 필요하지 않아. 콧바람에도 흔들거리던 자존감이 매캐한 연기만 남기고 꺼졌다.

   


지금 상황에 내 전공을 살려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디자인은 광고주와의 소통이 중요했다. 특히 직급이 올라갈수록 창의력이나 제작 기술보다는 소통과 협상, 설득의 기술이 필요했다. 채용 사이트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주요 직무 능력 중 하나가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다. 그 방면에서 나는 완벽하게 무능했다.



한 부분의 무능함을 깨닫고 나니, 또 다른 무능함이 기다렸다는 듯 존재를 드러냈다. 나는 몸을 쓰는 일에도 서툴렀다. 뇌가 골고루 발달하지 못했는지, 운동신경이나 방향감각이  떨어졌다. 배달을 나가면 대뜸 사고부터 낼 것 같았다. 사고가 나서 다치는 건 두렵지 않았다. 사고가 난 이후에 사람과 대면해야 하는 게 두려웠다. 운전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구에서 사람을 접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였다. 사람으로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심해 생물로 태어났어야 했나. 인적이 닿지 않는 깊은 정글의 뱀이었다면 어땠을까. 하긴 요즘 인적이 안 닿는 곳이 어디 있어. 그럼, 인류세가 시작되기 이전의 원시 생물로 태어났어야지. 아! 차라리 지구에서 몇백만 광년 떨어진 행성의 유기물은 어때? 망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나는 점점 더 작아졌다.



외출하지 않는 날이 더 많았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겨우 집 밖에 나갔다. 생필품이나 식품도 모두 온라인으로 주문했다. 지하철을 탈 일도, 버스를 탈 일도 없었다. 전화를 걸 일도, 받을 일도 없었다. 어떤 일도 없으니, 겉으로는 모든 스트레스에서 해방이 된 것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곯아가고 있었다. 이럴 거면 왜 사나. 결국 우울증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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