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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홀로 Aug 25. 2022

‘현실이’가 물었다. 작가는 아무나 되냐?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침대 위에서 살았다. 밥도, 살림도 하지 않았다. 세포 하나하나가 손도 댈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버린 것 같았다. 사회에서 평범한 기능을 가진 인간이 되는 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었다. 고쳐서 쓸 수 있기는 한 걸까.




화가 났다. 무능력한 내게, 사회 불안증에 우울증까지 겹친 것에, 부모님과 남편에게, 내 심정 같지 않은 청명한 날들이, 베란다 창 아래 활기차게 걷는 사람들과 그 외 지구를 이루는 모든 물질에. 그리고 살아있다는 사실이. 




한편, 화가 나서 다행이었다. 뭔가 바뀌어야 한다는, 바꾸고 싶다는 의지니까. 극심한 무기력에 빠지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의지조차 사라진다. 무저갱으로 굴러 들어가기 전에 이 상황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여기저기 인터넷 손품을 팔고 심리 책들을 뒤져 상담치료사를 찾아보았다.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했다. 따스하고 조곤조곤한 문장에 위로를 받았다. 이메일을 보내자 답이 왔다. 인연이 되려니 여러 가지 조건이 운명처럼 맞아 들어갔다. 방문 상담을 하는 분이었다. 그분은 동네로 찾아와 나를 밖으로 끌어내었다. 우리는 조용한 카페들을 전전했다. 그녀는 잔뜩 주눅이 든 나를 하나하나 분해해서 들여다봤고, 내 흩어진 재능 조각들을 구슬에 꿰려고 실타래를 풀었다. 엄마와 찐득찐득한 이메일도 주고받았다. 죽은 듯 아무 반응이 없던 나의 세상은, 주변 사람들의 응급처치로 다시 얕은 숨을 쉬기 시작했다.








3개월여의 상담이 종료되었다. 



‘없어요, 아니요, 몰라요, 싫어요’로만 응답하던 내가 

‘해 볼게요, 그렇군요, 괜찮네요, 감사합니다.’를 말했다.



상담사는 내게 글을 써보라고 했다. 글재주가 꽤 있다며. 초등학교 졸업 이후 글을 써본 적이 없어 망설이는 나를 그녀는 글쓰기의 치유 효과를 강조하면서 재차 독려했다. 치유의 효과라. 귀가 날갯짓을 했다. 그날 밤, 단편소설 쓰기 강좌를 등록했다.






소설 반 선생님은 유쾌했다. 큰 키에 짧은 커트 머리, 웃음기 어린 눈으로 걸쭉한 농담을 강의 중에 쏟아내어 강의실은 종종 폭소로 들썩거렸다. 어깨와 목에 잔뜩 힘이 들어간 채 좁은 책상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나도, 한 번 입에서 웃음이 터지자 긴장으로 굳은 근육들이 부드러워졌다.



대부분이 소설을 처음 써보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기대에 찬 눈으로 서로의 소설을 합평했고, 선생님은 특유의 재치와 부드러움으로 학생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주의하며 고쳐야 할 부분들을 짚어줬다. 그녀는 내게 재능이 있다고 치켜세웠다. 현존하는 소설 작가의 칭찬을 들은 나는 이미 강의실 천장을 뚫고 나가 인공위성과 하이 파이브를 하며, 진로를 정해버렸다. 




그래, 작가가 되는 거야.






붕 뜬 나의 자아는, 한동안 내려올 줄을 몰랐다.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왔던 터라, 오랜만에 본 한 줄기 빛은 나의 눈을 멀게 했다. 글을 쓰는 일은 오로지 혼자 하는 일이어서 더욱 마음에 들었다. 정신적으로 팔다리가 잘린 장애인이나 마찬가지인, 사회로부터 격리된 사람이 집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등의 온라인 콘텐츠를 만드는 일이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꽤 트렌디하게 보였다. 어, 나 좀 요즘 스타일인데. 




긍정 회로를 무한 재생하고 있던 그때, 오랜만에 ‘얄미운 현실이’가 한껏 올라간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얘, 내 말 좀 들어봐. 어릴 때부터 줄곧 ‘현실’은 나의 꿈을 밉살스럽게도 자근자근 짓밟았다. 그의 논리가 야속할 정도로 이성적이어서 나는 대부분 설득당하기 마련이었다. 현실은 하늘을 날고 있던 내 뒤를 조용히 밟다가 기다렸다는 듯 나를 끌어내렸다. 




“현재 한국에 작가 지망생이 몇 명인 줄 세어봤니?”


“너보다 뛰어난 사람들도 10년이고, 20년이고 지망생의 길을 가는 걸 아니?”


“예체능 전공이면 잘 알 텐데. 대학 가니 전국구 천재들만 모여있었잖아. 넌 아무것도 아니었고. 기시감이 느껴지지 않니?”


“결과 없이 10년을 보낸 다음엔, 대책은 있어? 너 그러다 나중에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된다.”




속사포 같은 질문이 끝나자 나는 되물었다.




“........ 그래서?”




안 들렸고, 안 보였다. 이미 나는 ‘현존 작가님의 칭찬과 인정’이라는 강력한 환각에 빠져있었다. 현실은 입을 샐쭉하게 내밀더니, 얼마 안 가서 자기를 다시 찾게 될 거라고 중얼거리며 발길을 돌렸다. 




오랜만에 무모한 일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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