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코올 의존증
오래간만에 소개팅이 들어왔다.
월급을 택시비로 소진하고 있어 남친이라는 존재를 챙기기에 약간 부담스러웠지만,
외로웠다.
오로지 회사와 집만 오갔던지라 나의 인간관계는 가족과 회사 직원들에 국한되었다. 살면서 예쁘다는 소리를 들어본 횟수만큼 주말은 굉장히 희박하고 소중한 시간이었는데, 그 귀한 시간을 함께 누릴 사람이 없었다. 한가한 시간에 만날 사람이 없으면 외로움은 갑절로 불어났다. 그동안 바빠서 느낄 수 없었던 몫까지 한꺼번에 몰아칠 땐, 나는 왜 사는가 싶은 자괴감까지 들었다. 그 상황을 이미 나와 같이 겪고 있던 한 전우가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귀한 소개팅을 물어다 주었다. 기지배, 제 코가 석 자면서. 너무나도 고마운 나머지 소개팅에 충실히 임하기로 다짐했다.
소개팅 일주일 전부터 나는 미리 상사와 동료들에게 소개팅 사실을 널리 알렸다. 갑작스레 불쑥 맡게 되는 야근 업무를 막으려고 택한 고육지책이었다. ‘소개팅 잘 안 된 김 대리’로 이야깃거리가 될지언정, 소중한 소개팅을 사수해야 했다. 그동안 주야장천 일만 해댔던 직원에게 팀장님은 ‘소개팅만은 지켜주마, 올해는 남자 친구 생겨야지’라며 그날의 칼퇴를 약속했다.
칼퇴근 염원이 절정에 다다른 금요일 오후 6시, 퇴근이 임박한 시간에 야근은 혜성처럼 우리 팀에 떨어졌다. 사수와 팀장님께 감사를 표하고 미안한 표정을 장착한 채 퇴근 준비를 했다. 팀장님은 이렇게 된 마당에 꼭 남자 친구를 만들어야 한다며 진지하게 조언했다. 말 함부로 하지 말고, 한 번 더 생각하고 말해! 그의 잔소리가 사무실 문이 닫히기 전에 후다닥 쫓아 나와 귀를 간지럽혔다.
소개팅 장소로 걸어가는 길에 때아닌 두려움이 엄습했다. 두려움은 강박을 불렀다. 눈곱과 코털, 치아 위생 상태를 확인하거나 머리 스타일, 옷매무시까지 가다듬느라 길바닥에서 자꾸 멈칫거렸다. 걸어서 5분 거리를 20분 남짓 걸려 도착했다. 홍대 놀이터에서 일단 만나서 갈 곳을 정하자고 했기에, 사진 속 남자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렸다. 디자이너라더니, ‘내가 바로 디자이너’라고 온몸으로 보여주는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잘 다듬은 수염과 헤어스타일, 딱 봐도 비싸 보이는 브랜드 안경, 카고 바지와 감각적인 티셔츠를 걸친 남자는 ‘나 좀 힙한 듯’ 당찬 스웨그를 보이며 다가왔다. 동종업임에도 항상 후드티만 대충 입고 다녔던 나는 아무리 꾸며도 감출 수 없는 평소의 추레함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 같아 조금 더 부끄러워졌다.
“어디로 갈까요? 자주 가시는 데나 좋아하는 데 있으세요?”
소개남은 목소리마저 젠틀했고, 나는 성대를 덜덜 떨며 염소 같은 목소리로
“수… 술…. 술 마셔요.”
라고 가까스로 대답했다. 남자는 술을 많이 좋아하는지 내게 물었다. 나는 친구들에게나 쓰던 레퍼토리를 꺼냈다. 술을 너무 좋아하지만, 술이 나를 싫어해서 잘 취해요. 즉, ‘몸이 버티지 못할 정도로 술을 처마신다’라는 TMI를 날렸다. 긴장해서 무슨 말을 적절히 해야 하는지 판단조차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술을 마셔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힙한 홍대 거리를 아무 데나 발이 닿는 대로 걷다가, 아무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아무렇게나 생긴 술집에 앞장서서 들어갔다. 메뉴판을 들여다보는 그에게 나는 다급히 물었다.
“저기… 술부터 시킬까요?”
남자는 허겁지겁 술부터 요구하는 내가 살짝 당황스러운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더니 곧 ‘그럴까요?’라고 되받으며 주종을 고르기 시작했다. 첫 잔은 맥주로, 이후에는 각자 원하는 주종으로. 맥주가 나오자마자 나는 벌컥벌컥 들이켰다. 강한 탄산이 목을 긁고 내려가자, 체온이 살짝 떨어진 듯 온몸이 시원해졌고 흥분했던 심장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하, 이제 숨을 쉴 것 같네. 미어캣처럼 두리번거리며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번갈아 두드리다 다리를 정신없이 덜덜 떨던 여자는 맥주라는 안정제를 마신 후, 비로소 소개팅에 임한 보통 여자가 되었다.
우리는 소주와 맥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대화를 시작했다. 때마침 안주가 나왔다. 빈속에 술을 들이부어 난리가 난 위장을 달래느라 안주를 정신없이 입에 넣던 내게 남자가 한마디를 했다. 참 잘 드시네요. 남자는 애써 웃으며 조신하게 안주를 집었다. 그리고 그 이후 기억이 없었다. 2차도 가고, 3차도 간 것 같은데 단편적인 장면들만 사진처럼 남았을 뿐, 나는 풀메를 한 얼굴로 내 방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고, 무얼 먹었으며, 어디를 간 거지. 불현듯 우리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나를 부축하던 남자의 괴로운 표정이 떠올랐다. 오 마이 갓.
소개팅할 때마다 술을 찾으니 어떤 남자들은 쉬운 여자로 보기도 했다. 첫 만남에 대뜸 술부터 마시자니, 조신한 여성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으리라. 대부분은 술에 떡이 되기 전에 끝나긴 했지만, 이번에는 그 남자가 마음에 무척 들었나 보다. 마음에 들면 들수록 몸은 긴장을 풀려고 안간힘을 다해 술을 들이부었다. 기억이 슬슬 돌아오자 후회가 밀려왔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사라지길 바라며 두 손으로 비벼댔다. 마스카라와 아이라이너, 아이브로우가 간밤에 생성된 피지로 뭉개져 얼굴 여기저기로 거뭇거뭇 번졌다. 곧이어 카톡 알림음이 울렸다. 주선자였다. 대체 왜 첫 만남에 술을 죽어라 마시는 거니.
훌륭하게 말아먹은 소개팅 이후에도 나는 계속 새로운 인연과 술로 만났고, 술로 헤어졌다. 소개팅뿐만이 아니었다. 누구를 만나든 술은 항상 나와 함께 했다. 심지어, 친한 친구를 만날 때에도 술이 없으면 어색했다. 술이 없으면 대화가 안 된다며 너스레를 떨어보지만, 내게 문제가 있다는 걸 어슴푸레하게 느끼고 있었다. 한때 나는 외향형이라고 착각하기도 했다. 물론 술과 함께라면 가능했다.
나중에 병원에서 나의 이런 과거를 찬찬히 훑어보고 나서야 알코올 의존증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알코올은 불안을 더욱 악화시키는 기폭제라는 것도. 불안해서 술을 마시고, 술에서 깨고 나니 더 불안해져서 또 술을 마시는 악순환이 지속되었다. 꽤 오랜 기간 나는 알코올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