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빛으로 거리를 수놓던 벚꽃은 거품처럼 사그라지고 뜨뜻미지근한 공기만이 남는다. 눅눅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마주하며 나는 ’아 드디어 여름이 오고야 말았구나 ‘ 하고 가벼운 탄식을 내뱉었다.
내리쬐는 태양빛에 이글거리는 아스팔트, 그 위를 걸을 수밖에 없는 곤욕의 계절이 찾아온 것이다. 무조건 에어컨이 있는 실내만 찾게 되고 밖에 나가면 질식할 듯 몰려오는 더운 공기에 연신 부채질을 하기 바쁜 계절… 땀이 많은 체질인 나로선 여름이 정말 싫었다. 끈적거리는 습도에 웽~거리며 주위를 맴도는 모기까지 여름은 내가 싫어하는 것들의 집합체였다.
하지만 올여름의 초입은 생각보다 선선해서 놀랐다. 이 정도의 햇빛 세기라면 야외 생활도 큰 무리 없이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거리의 매미들도 유난히 조용했다. 올해 매미들은 단체로 휴가를 간 걸까? 이토록 조용한 여름이라니 낯설기까지 했다.
그런데 역시 장마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듯이 햇빛은 무섭게 뜨거워졌고 휴가를 떠난 매미들은 본업에 복귀했다. 귀 따갑게 우는 매미소리를 들으면서 올해 더위는 별거 아니라는 생각도 와르르 부서졌다.
으, 역시 덥구나. 너무 더워서 기진맥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일 낮에는 더위를 체감하지 못하다가 주말에 볼일 보러 낮시간에 외출하면 내 몸은 엿가락처럼 늘어졌다. 정신을 못 차릴 정도인 불볕더위 앞에 나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그렇게 뜨겁고도 질긴 햇빛도 절기 앞에선 속수무책인가 보다. 요 근래 끈질기게 따라올 것 같았던 태양빛이 서서히 멀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가을에 접어든다는 입추가 지나니 신기하게 눅진한 바람이 생기를 띄며 가벼워졌다.
발그스레한 바람이 반갑기도 하지만 올해 들어 유난히 여름밤이 저무는 게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가을의 쓸쓸한 분위기도 좋아하지만 싱그러운 여름의 에너지가 벌써 그리워지는 건 내가 변덕쟁이라서 그런 걸까?
뜨거운 태양빛을 피해 실내로 숨어들었던 사람들이 활기차게 걸어 나오는 저녁 풍경이 좋았다. 그 풍경 속을 걷는 여름밤의 퇴근길이 좋았다. 아직 해가 떠있어 밝은 하늘을 보면 퇴근 후 온전한 내 시간이 더 길어진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넷플릭스를 보는 재미도 있었다.
이렇게 천천히 나열해 보니 여름에도 좋은 점들이 많았구나. 덥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여름을 너무 싫어하고 있었던 거다. 가로수 위로 찬란하게 부서지는 태양빛, 다양한 지역 축제와 신나는 여름 노래, 달달하고 상큼한 빙수까지 이 모든 건 여름만이 선사해 주는 선물인데 귀한 줄 몰랐다. 어쩌면 여름은 생각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의 집합체였던 것이다.
나는 올해가 들어서야 그 모든 걸 알게 되었다. 이때까지 얼마나 편협한 사고로 여름을 생각했던 걸까. 끈적한 습도, 성가신 모기도 있지만 그 밖에도 좋은 것들이 많았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그것들의 소중함을 이제야 느낀다. 오로지 덥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계속 미워해왔던 여름에게 괜스레 미안해진다.
여전히 더운 건 싫지만 여름이 주는 선물 같은 순간들은 오직 여름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순간이기에 지금의 여름밤도 더 귀하게 느껴진다. 얼마 남지 않은 여름을 소중하게 보내고 싶다. 내년에 여름이 다시 찾아와서 눅눅한 바람을 마주한다면 탄식보단 탄성으로 여름을 시작할 것이다. 아 드디어 왔구나 여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