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어메이징한 기억
헉~헉~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장거리 마라톤은 아니었지만 꽤 오랫동안 달리고 있었다. 온몸이 땀에 젖었지만 기분은 상쾌했다. 같은 팀인 카터와 케빈은 날쌘돌이 쏘니처럼 훨씬 앞에서 달리고 있었다. 거리가 꽤 벌어져 있었지만 불안하지 않았다. 따라잡아야 한다는 조급함도 없었다. 어쩐지 모를 신뢰감이 있었다.
그날의 분주했던 움직임, 상기된 목소리, 주어진 미션이 적힌 메모를 급히 읽으며 눈동자를 굴리던 모습이 선명하다. 홍콩 곳곳을 하루 종일 누비던 퍼즐 조각 같은 기억들이다.
동기인 카터Carter 먼저 ‘어메이징 레이스’에 같은 팀을 같이하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카터, 케빈과 한 팀이 되었다. 카터는 중국에서 태어나 홍콩에서 자란 친구였고, 케빈은 홍콩 태생으로 미국에서 성장한 친구였다.
MBA 강의 시간에 카터가 발언할 때마다 집중해서 들었다. 그는 금융계 출신으로, 늘 간결한 정장 차림에 민첩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말이나 행동에서 과시하는 법은 없었지만, 묘하게 스마트함이 느껴졌다. 오히려 담백한 태도에서 자신감과 여유가 전해졌다.
케빈은 키가 크고 훤칠한 외모에, 과하지 않은 근육질과 듣기 좋은 영어를 갖춘, 미국에서 잘 자란 아시아인의 전형 같았다. 대화할 때마다 고개를 살짝 숙여 귀 기울이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고, 입이 양쪽 귀에 걸릴 듯한 환한 웃음을 지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MBA 생활 초반, 나는 꽤 조용한 편이었다. 수줍은 성격도 있었지만, 약간 주눅이 들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100명이 넘는 학생들 앞에서 당당히 의견을 말하는 카터와 케빈의 모습은 나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어메이징 레이스는 MetLife와 홍콩 과학 기술대학교(HKUST)가 공동 주최한 행사였다. 200명이 넘는 참가자들이 40여개 팀을 구성해 홍콩 전역에서 미션을 수행했다. 이 레이스는 리더십, 팀워크, 지능, 인내, 결단력을 강조하며 정교하게 설계되된 프로그램이었다. ‘홍콩 신경근육질환협회’를 위한 기금 마련을 취지로 하면서도, 다양성과 포용의 문화를 강조한 행사였다. 클리워 워터 베이 캠퍼서를 출발해 포람, 다이아몬드 힐, 침사추이 시계탑, 중앙 우체국, 호프 웰 센터 등 다양한 지점을 거치는 코스였다.
1등을 목표로 시작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미션이 숨겨진 장소를 향해 달리는 마음만은 누구보다 치열했다. 대중 교통이나 도보로 이동해야 했는데, 버스를 기다릴 여유도 없이 몇백 미터씩 뛰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하루 종일 홍콩을 달렸다. 한 미션은 콩 9개를 젓가락으로 집어 다른 접시로 옮기는 것이었다. 중간에 실수하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다. 미끄러운 손, 가쁜 숨을 다잡고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허공에 콩이 떨어질 때 들러오는 탄식 소리, 젓가락을 꽉 쥔 손가락에 쥐가 날 듯한 느낌, 그 순간, 옆에서 터지는 카터의 응원 소리는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모든 미션을 마친 뒤, 캠퍼스로 돌아왔다. 파도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오는 해변 바비큐장이 도착지였다. 이미 도착한 팀들이 환하게 맞아 주었다. 그 순간 가장 먼저 든 감정은 우리가 몇등을 했는지가 아니었다. 모든 미션을 끝냈다는 성취감, 모두가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 마라톤 완주나 산속 트레킹이 끝났을 때 느낄 법한 감정과 닮아 있었다.
이 어메이징 레이스는 사실 MBA 과정 중 대기업과 협업한 부차적 행사에 불과했다. 하지만, 2년의 MBA 생활 전체를 돌아봐도 가장 기억에 남는 이벤트 중 하나였다. 그날은 최고의 팀워크가 발휘돈 날이었다. 팀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매 미션마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빠른 판단을 내려야 했던 하루였다.
커리큘럼을 따라 수업을 듣고 rkhwp를 잘 해내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한 발 더 나아가보기를 권하고 싶다. 그 곳엔 예상치 못한 경험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직 경험하지 못한 희열, 스트레스, 기쁨, 그리고 치열함이. 조직에서 맡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건 중요하다. 그러나 때론, 의무가 아닌 부차적인 경험이 오히려 주 역할의 완성ㄷ를 높여준다.
어느 날,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작은 탐험가처럼 무언가를 찾아보기를. 당신만의 어메이징한 경험이, 그 어디서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