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인해 이직이 미뤄진 것이 타격이 컸다. 면접을 보러 다니면 특이한 이력에 갸우뚱하는 사람도 있었고, 너무 오랫동안 단순 작업만 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들었다. 새롭게 일할 곳이 없었다. 다시 사회복지로 돌아가야 하는 건지 고민이 깊어졌다. 그러던 중 반려동물 관련 회사에서 콘텐츠 에디터 모집공고가 올라왔다. 회사가 집과 가까웠고, 반려동물도 좋아했기에 눈길이 갔다. 지원 전 잡플래닛에 회사를 검색했지만, 리뷰는 없었다. 불안함을 뒤로하고 지원했다. 그렇게 면접을 보게 되었다.
면접 당일. 알려준 사무실에 들어가려는 순간, 큰 소리가 울렸다. ‘여기... 분위기가 안 좋은가?’ 걱정이 들었다. 면접 보러 왔다는 나의 말에 갑자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는 사람이 있었다. 대표 K였다.
언뜻 보면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또 언뜻 보면 고집이 세 보이는 인상이었다. 나름 사람 인상을 파악하는 데엔 도가 텄다고 생각했는데 K는 어떤 사람인지 감이 전혀 잡히지 않는 사람이었다.
K는 노션으로 만든 내 포트폴리오를 하나하나 열어보며 이것저것 잔뜩 물어봤다. 아무래도 이력이 특이한 탓이었다.
“이제 면접은 대충 마무리된 것 같고, 뭐 궁금한 거 없어요?”
“아... 이 회사가 바라보는 미션과 비전은 무엇인가요?”
K는 처음 받아보는 듯한 질문에 꽤 당황했다. 사회복지를 4년이나 떠나있었지만, 모든 일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잡고 가야 한다던 부장 C의 말이 생각나서 던진 질문이었다. 내가 다니게 될 이 회사의 걸음이 나와 맞지 않는다면, 미션과 비전이 뚜렷하지 않다면, 함께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또 콘텐츠를 억지로 만드는 건 정말 못하는 성격이니까.
조금 당황한 듯한 K는 곧바로 회사의 미션과 비전을 능숙하게 설명해 주었고, 훈훈한 분위기로 마무리가 되었다. 1대 1 면접이었는데도 장장 한 시간 반이 걸렸다. 회사를 빠져나오자마자 엄청난 피로감이 몰려왔다. 터덜터덜 집에 오니 엄마가 놀라 물었다.
“너 뭐 하고 왔기에 얼굴이 죽상이야?”
“어? 면접”
“압박 면접이었어?”
“아니 그건 아닌데... 피곤하네”
4일 후 K에게 합격했다는 연락이 왔다.
설레는 마음으로 첫 출근을 했다. K는 일찍 출근해 있었다.
“어- 왔어?”
순간 느껴진 쎄한 느낌.
‘뭐지?’
S와 있던 3년 동안, 상사의 존댓말이 익숙해진 탓일까? 갑자기 훅 들어온 K의 짧은 말이 찰나의 신경을 건드렸다. 복지관에서 근무할 때는 상사의 반말은 일상이었기에 한 번도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K의 말에는 무언가, 신경을 거스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모든 직원이 출근하자 K는 직원들과 나를 인사시켰다.
“다들 인사해. 이번에 새로 들어온 방 대리야. 에디터랑 디자인을 맡아서 할 거야”
‘디자인? 웬 디자인? 뭔 디자인?’
갑자기 나를 디자이너라고 소개해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뭘 잘못 알고 계신 건가? 이후 근로계약서에도 직무에 에디터 겸 디자이너라고 적혀있었다.
“대표님 제 직무는 에디터인데요. 저는 편집디자인 위주 경력이라 회사에서 원하는 디자인 업무는 어렵습니다.”
“응 알아~지금 디자이너로 있는 김 대리가 인쇄물 쪽은 해본 적이 없어서~ 그냥 보조라고 생각해! 별거 아니야. 신경 쓰지마.”
찝찝한 마음이 들었지만, 일단 알겠다고 하고 계약서를 받아들었다. 이후 친화력 좋고 성격도 좋아 보이는 신 사원이 회사 곳곳을 소개해 주었다. 여기서 꽤 오래 일했다고 했다.
“아! 그러면 여기 입사한 지 얼마나 되셨어요?”
“저 5개월이요!”
“5개월?!?”
“네! 제가 이래봬도 두 번째로 왕고예요! 김 대리님이 4개월 차구요.”
아... 뭔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전임자도 없었고 제대로 된 인수인계서도 없었다. 전임자의 업무를 모든 직원이 나눠서 했기에 인수인계 또한 모든 직원에게 받아야 했다. 정신이 없던 와중에 K가 불렀다.
“방 대리 노션 잘하던데~ 우리 회사 홈페이지 노션으로 좀 만들어봐.”
“홈페이지요?”
“어~ 우리 홈페이지는 자세한 설명이 없으니까 노션 홈페이지가 별도로 있었으면 좋겠어서.”
“아. 제가 홈페이지를 만들 정도로 잘하지는 않는데...”
“응 그런 것 같더라고. 그러니까 강의 찾아서 들으면서 해.”
“아... 네”
“홈페이지 만들면서 노션으로 직원들이 프로젝트 업무를 공유할 수 있게 업무툴도 구상해 봐.”
갑작스럽게 주어진 업무였다.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강의를 들으며 노션의 기능들을 익히기 시작했다. 타 회사의 자료들도 모았다. 홈페이지 기획을 해야 하는데 회사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다. 제대로 된 소개자료도 없었고, 귀동냥한 것이 전부였다. K는 그냥 알아서 만들라는 말만 했기에, 기존에 있던 홈페이지와 제품 상세 페이지, 홍보 리플렛을 찾아서 눈이 빠지도록 읽고 재구성해서 제작했다.
신 사원, 김 대리, 방 대리 이렇게 세 사람은 나이도 비슷했고 성향도 비슷했다. 신 사원은 일에 대한 열정이 많았다. 거의 매일 야근했는데, 본인의 말로는 일이 많아서가 아니라 자기의 손이 느려서, 자기가 일을 못 해서라고 했다. 괜히 저 때문에 눈치 보고 야근하지 말라는 말을 자주 했다.
김 대리도 완벽을 기하는 사람이었다.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집요하게 집중하는 사람이었고, 일을 시작하면 끝까지 해내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늘 셋은 쭈뼛거렸다. 업무를 앞두고 쭈뼛거린 것은 절대 아니었다. 일에 대해선 누구보다 열정이 있었고, 누구보다 의욕이 있었다. 쭈뼛거린 건 늘 K 앞에서뿐이었다.
제품을 새로 런칭하면서 제품 상세 페이지 기획 업무가 주어졌다. 상세 페이지도 처음 해보는 일이지만, 제품 자체도 굉장히 생소해서 작성이 더욱 어려웠다. 그리고 역시나, 제품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듣지 못했다. 기존 상세 페이지를 뜯고 뜯어 상세 페이지 기획안을 작성했다. K가 노션을 업무 툴로 사용하고 싶어 했기에 기획안도 노션으로 작업했다.
“방 대리! 난 노션 할 줄 모르는데 어떻게 보라는 거야?”
“그냥 보이는 데로 읽으시면 되는데요.......??”
“모르겠으니까!! 그냥 워드로 작업 하라고!”
‘아니 눈으로 읽기만 하면 되는데... 노션만큼 직관적인 게 어딨다고...?’
좀 억울(?)했지만, 시키는 대로 다시 작업했다.
“너는 우리 회사 제품도 잘 모르니?”
“지금 상세 페이지 나와 있는 내용 말고는 잘 몰라요.”
“아! 내가 알려준 적이 없나?”
“네.”
그렇게 한동안 제품 설명이 이어졌다. 밤 10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이후 K의 상세한 피드백이 주구장창 쏟아졌고, 피드백을 반영해서 기획안을 제출하자 K는 나를 쳐다보았다.
“방 대리~ 초안이 더 좋은데?”
K는 이미 바라는 내용과 구성이 머릿속에 있었다. 그게 결과물로 나오지 않자 결국 기획안을 같이 수정했다. 나는 꼭두각시였다. K는 뒤에서 지시했고, 나는 손을 움직였다. 5개월 왕고 신 사원은 야근으로 피폐해진 나를 보며 말했다.
“그녀는 항상 바라는 그림이 있어요. 우리 생각대로 하면 절대 안 돼.”
회사는 탄력 근무제였다. 8~10시 출근, 17~19시에 자유롭게 퇴근하면 되었다. 내가 입사했을 때는 대부분 10시에 출근하는 분위기였지만 퇴근이 19시에 이뤄지지는 않았다. 퇴근 시간이 되면 기가 막히게 K가 업무를 줬다. 일이 많든 적든 야근은 꼭 하는 분위기의 회사였다.
쭈뼛쭈뼛 3인방은 소심했고, 거절의 의견을 잘 내지 못했다. 그래서 늘 K의 눈치를 보며 야근을 해야했고, 불만을 토로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때마다 우리끼리 항상 하던 말이 있었다.
“대쪽 같은 사람이 입사해서, 분위기 좀 바꿔줬으면 좋겠어요. 칼퇴근 빡! 빡! 할 수 있게.”
스스로 대쪽 같아질 용기는 없었던 3인방이었다.
경영지원 직무로 장 대리가 새로 입사했다. 장 대리는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쭈뼛쭈뼛 3인방과는 다르게 시원시원하게 자기 의견을 피력했다. 우리가 그렇게 바라던 대쪽 같은 사람이었다. 장 대리는 8시에 출근해서 17시에 칼같이 퇴근했다. 우리보다 두 시간 먼저 출근한 거지만 두 시간을 먼저 퇴근하니 괜히 우리가 일을 더 많이 하는 기분이 들었다. 슬슬 우리의 출근 시간도 빨라졌고, 장 대리를 따라 조금씩 용기 내어 칼퇴근을 시도했다.
K는 그런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별거 아닌 일들로 장대리를 쥐잡듯이 잡기 시작했다. 장 대리의 기를 꺾고 싶어 했지만, 장 대리는 정말 대쪽 같았고 쉬이 꺾이지 않았다.
장 대리는 장 대리대로 억울했다. 분명 경영지원으로 들어왔는데, 쇼핑몰 운영 경험이 있다는 이유 하나로 경영지원 업무가 아닌 MD 업무를 도맡아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익숙하지 않은 일을 시키면서 뭐라 뭐라 하는 K가 맘에 들지 않았다.
추운 겨울, K와 장 대리가 붙으면 사무실은 더욱더 얼음장같이 싸늘해졌다. 장 대리는 K에게 피드백을 받는 와중에도 퇴근 시간이 되면 퇴근해야 한다며 인사하고 퇴근했다. 퇴근하겠다는 말 한마디를 너무너무 어렵게 꺼내는 우리로서는 장 대리가 마치 대장군처럼 보였다.
가장 오래 근무하고 K보다 나이가 많던 직원이 퇴사하며 송별 회식을 했다. 나에게는 첫 회식이었다.
K는 예전 직원과 회식한 이야기를 자주 했었는데, 꽤 위험하게 술을 많이 마시는 것 같았다. 술에 만취한 직원이 없을 정도였고 만취로 인해 큰 사고도 날뻔했다고 했다. 걱정이 되었지만 그래도 코로나로 모든 음식점이 21시까지 영업했기에 별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K는 회식 자리에 도착하자마자 기분이 업되어 거의 하늘을 날아다닐 지경이었다. 시간이 2시간 밖에 없다며 미친 듯이 술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복지관에 근무할 때도 술을 자주 마시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K는 차원이 달랐다.
“대표님, 저 술 많이 마시면 응급실에 실려 가요. 안 돼요.”
사실이었다. 술을 많이 마시면 6~8시간을 게워 내서 응급실 가는 것이 일상이었다. 응급실을 얘기해도 K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김 대리가 나섰다. 아예 술을 더 먹여서 K를 보내버리려는 계획이었다. 김 대리는 취한 적이 없다고 했었지만, K에게는 어림없었다. K는 소주 한 잔을 가지고 세 번을 끊어 마셨고, 우리는 소주 한 잔을 원샷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끊어서 마시면 세상이 멸망할 듯 소리를 질러댔다.
2시간 만에 초토화가 되었다. 어떻게 집에 왔는지 가물가물할 정도로. 다음 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12시간 동안 구토를 했다. 최고 기록이었다. 출근도 하지 못했다. 김 대리도 연락 두절 되었는데, 나중에 김 대리를 보니 얼굴이며 종아리며 아스팔트에 다 갈려 상처투성이였다.
K는 그 이후 더 이상 우리에게 술을 권하지 않았다. 꼭 이렇게 눈으로 봐야만 아는 걸까.
어느 날 아침. K가 출근하자마자 장 대리를 불렀다. 본능적으로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30분쯤 지나고 장 대리는 혼자 웃으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대표가 저 나가래요. 서로 안 맞는 것 같다고”
“예에..... 나가라고요...??!?!?!?!?”
“그래서 그냥 저도 안 하겠다고 했어요~ 이딴 회사 내가 왜 다녀. 사람을 도구로만 아는 사람이랑은 저도 일 같이 못해요. 대표랑 얘기할 거 있어서 다시 나가볼게요!”
권고사직이었다. 눈앞에서 권고사직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장 대리가 일을 못 한 것도, 회사에 큰 해를 끼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출퇴근 시간을 칼같이 지키고 K의 억지를 말로 받아친 것일 뿐이었다.
“장 대리가 오늘까지 근무하기로 했어~ 다들 인사하고.”
아침에 권고사직을 통보한 K는 점심시간 직전에 장 대리를 보내버렸다. 그렇게 순식간에 장 대리가 짐을 싸서 나갔고 우리는 두려움에 달달 떨어야만 했다. K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권고사직을 했다고 큰 소리로 말했다. 통화를 하고 있었지만 마치 우리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내 심기를 거스르면 너희도 잘릴 수 있어.’
장 대리가 별 말없이 회사를 나가자, K는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리고 다시 야근 분위기를 잡아갔다. 퇴근하려고 짐을 챙기면 K는 갑자기 부산스러워졌다.
“방 대리! 이거 안 되어있던데!? 해야 하지 않겠어?”
쭈뼛쭈뼛 3인방은 다시 야근을 하게 되었다.
박람회 준비에 돌입했다. 박람회는 직원 모두가 경험해 보지 않은 일이었다. 제품 판매 부스, APP 홍보 부스 이렇게 두 부스를 하기로 했다. K는 기존에 어떻게 진행했는지 보고 셋이 알아서 준비하라고 했다. 그놈의 ‘알아서’ 참 지겹다.
기존에 진행되었다는 박람회 파일을 열어보았지만. 서류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고 사진만 몇 장 있을 뿐이었다. 사회복지사로 일했을 때는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계획서를 작성했다. 그 안에는 목적과 목표, 행사 진행 방식, 업무 분담, 예산, 타임테이블 등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 서류를 공유하며 직원들과 합을 맞춰 나갔다. 계획서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정말 기본적인 서류 한 쪼가리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가이드라인 없이 준비하려니 너무 막막했다.
부스 컨셉, 홍보, 이벤트 등을 기획해서 K에게 보여주었지만 돌아오는 건 안 된다는 피드백뿐이었다. 생각이 없다며, 이게 가능할 것 같냐며, 일을 해봤다는 애들이 왜들 그러냐며 자존감을 깎기 일쑤였다. 예산도 알려주지 않았기에, 어느 정도로 예산을 잡고 지출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냥 기획해서 가져가면 ‘비싸다’. 좀 줄여서 가져가면 ‘없어보인다’를 반복했다. 이벤트를 하라는데 상품으로 줄 것도 없었다. 그 상품도 알아서 구하라는 K의 지시였다.
계속되는 야근과 까임에 지치고 화가 났다. 도대체 이 행사의 목적도, 목표도 불분명한 상황에서 뭘 만들어 오라는 건지. 다이어리에 마구잡이로 낙서했다. 분노의 낙서가 다이어리를 뒤덮었고, 야근의 횟수는 늘어났다. 우리는 지쳐가는데 K는 뿌듯해했다.
“박람회를 뭘 그렇게 기를 쓰고 준비하니? 참~ 예전에는 3일이면 다 준비했어~”
우리가 무능하다는 듯이, 헛심을 쓰고 있다는 식으로 계속 약 올리는 K가 미웠다. 그렇게 어찌어찌 박람회가 끝났다. 우리는 그동안 회사에서 참여한 박람회 중 가장 많은 매출을 달성했다.
박람회가 끝나고 진행된 평가회의. K는 뿌듯해하며 박람회 성과와 보완사항에 관해 이야기했다.
“내가 왜 박람회의 목적과 의도, 목표, 예산 이런 것들을 얘기 안 하고 그냥 일 시킨 줄 알아? 너희들이 직접 해봐야 깨닫고 배우기 때문이야~”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K가 언급한 단어들은 내가 다이어리에 휘갈겨 써놓은 단어였고, 적은 순서까지 그대로였다. ‘내 다이어리를 봤구나!’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왠지 K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로 업무 다이어리는 서랍에 감추고 다녔다.
박람회 준비로 이벤트 상품으로 협찬해 줄 회사를 여기저기 알아보던 신 사원은 연락을 주고받던 회사에서 입사 제의를 받았다. 집도 더 가깝고, 연봉도 높고, 야근도 없었다. 야근이 필요하면 야근수당도 준다는 회사였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신 사원이 퇴사를 통보했다. 가장 아끼던 신 사원이 갑작스럽게 다른 회사로 간다는 말에 큰 배신감을 느낀 K는 악담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람을 빼가는 회사가 잘 될 것 같니?! 너네 박람회 잘 끝내서 다들 연봉 올려주려고 했는데, 너 때문에 다들 못 올려주겠다! 난 너 연봉 못 올려줘! 가려면 가던가!”
보통 직원의 퇴사를 막기 위해서 더 좋은 제안을 하던가, 그럴 여력이 안 되면 잘 못 챙겨줘 미안하다할텐데... 보통은 그렇던데. K는 그러지 않았다. 그렇게 퇴사 날까지 신 사원은 투명 인간 취급을 받았고, 송별 회식도 없이 조용히 퇴사했다.
“대리님들~ 대리님들 만나서 진짜 좋았는데..... 너무 아쉬워요. 제가 자리 잘 잡아서 대리님들 꼭 오게 할게요. 다들 빨리 퇴사하셔야 해요.”
신 사원이 퇴사하고, K는 우리를 불렀다. 글로 쓰진 않았지만 장 대리 퇴사 이후에 들어온 다른 사원도 한 달 만에 퇴사했다. 연달아 신 사원도 퇴사했으니 혹여나 우리도 분위기를 탈까 걱정이 된 K였다.
연봉 인상을 이야기했다. 박람회 때 고생했다고, 이제야 우리가 한 팀이 되어서 일한 것 같은데 신 사원이 퇴사해서 아쉽다고 말하며 너희는 그렇게 무책임하게 그만두지 말라는 당부도 했다. 우리의 연봉은 10%씩 인상되었다. 나한테는 잘 적응해 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수습 기간 종료를 알렸다. 수습 기간 6개월 중에 조기 종료를 한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연봉이 인상된 것은 좋았으나,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일을 주려나 걱정부터 되었다.
모든 직원이 나가고 김 대리와 나, 둘만 남게 되었다. 회사는 굴러가야 했으니 나간 직원들의 업무를 나눴다. 어느새인가 에디터 업무와 멀어졌다. 디자이너인 김 대리는 MD를 맡았다. 에디터인 나는 어플 전반적인 운영을 맡았다. 뭐 그때그때 마케터도 되었다가 기획자도 되었다가 그랬다. 제품 하자 검수와 포장, 발송도 우리의 몫이었다. 박람회 준비도, 박람회에서 물건을 파는 것도 우리였다.
그렇다. 여기는 커뮤니티에서 그렇게 조롱하던 좆소기업이었다.
박람회로 매출을 크게 올린 K는 이후 박람회도 전부 신청해 버렸다. 우리의 주말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박람회가 다가오면 매번 박람회 부스를 꾸밀 물품과 판매할 물품을 챙겨갔다. 3톤 탑차에 꽉 차는 물량이었다. 남자 직원도 없었다. 그 많은 짐은 항상 김 대리와 내가 옮겼다. 목장갑은 늘 책상 위에 있었다. 짐 나르는 요령도, 카트 운용도 익숙해졌다.
안타깝게도(?) 김 대리와 나는 요령을 피우는 성격이 아니었다. 성격도 급했고 직접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우리가 힘을 쓰니 K는 사람을 부르지 않았다. 회사를 다니는 건지 이삿짐센터를 다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공장에서 제작된 제품들을 사무실로 옮기는 것도 우리 몫이었다. 한 박스당 3~40kg 무게, 100박스가 넘는 수량.
“아-씨! 여기 여자밖에 없어요?”
“네- 사장님 가시죠!”
.
“아니;;; 다들 잘하시네~”
화물 아저씨는 여직원밖에 없다고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내 우리가 일하는 걸 보고는 감탄했다. 오랜 짐 나르기 경험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비가 오는 날 배송 온 제품들. 박스가 젖어 쌓아 올려 놓은 짐들이 우리를 덮쳐 아찔한 상황까지 벌어졌지만, K는 걱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우리는 툭툭 털고 일어날 테니.
우스갯소리로 우리끼리 이삿짐센터나 하자고 웃었다.
“누가 우릴 보고 디자이너, 에디터라고 생각하겠어요.”
“뭐...타고난 짐꾼이죠.”
함께 점심을 같이하던 직원이 퇴사하자 K는 점심을 거르기 시작했다. 원래 점심을 먹지 않는다고 했다. 점심을 먹으면 졸리고, 속이 더부룩하다는 이유였다.
문제는 본인이 식사하지 않으니, 점심시간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점심을 먹으려고 하면 업무지시를 했고,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시간에도 그녀의 말이 끝나지 않는 순간들이 많았다. 김 대리도 점심을 챙겨 먹지 않아서 식사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특히 박람회 준비하는 날에는 점심을 당연하다는 듯이 건너뛰었고 15~16시에 점심을 먹게 되는 일이 많았다.
먹는 것을 좋아하고, 단 한 끼라도 굶으면 큰일 나는 나로서는 정말, 정말 너무나 고역이었다.
“월요일은 내가 쏠께!”
K는 직원들과의 대화가 너무 없는 것 같다며, 월요일에 점심을 함께 먹자고 했다. 본인이 점심을 살 테니, 도시락은 싸 오지 말라고 했다. 나중에 보니 채용공고에 직원 복지로 ‘월요일은 회사가 점심 쏴요!’라는 문구가 추가되어 있었다.
그렇게 월요일에는 주간 회의를 마치고 점심을 함께 먹었다. 그러나 K는 점점 본인의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외근을 나가야 한다는 핑계로 점심을 먹지 않았다. 월요일에 점심을 쏘겠다는 말은 본인이 같이 먹지 않으면 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매주 월요일마다 직원과 대표의 눈치싸움이 벌어졌다.
‘우리끼리 먹으라는 건가... 같이 먹겠다는 건가...’
K는 점심시간 때마다 말도 하지 않고 모니터만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월요일 점심 문화는 사라졌고, 채용공고에 올라간 ‘월요일은 회사가 점심 쏴요!’ 문구도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서울에 기록적인 폭우가 온 날, 곧 수출될 제품이 보관된 창고가 침수되었다. 퇴근을 30분을 앞둔 시간, 갑작스러운 침수 소식에 달려가야만 했다. 처참하게 젖어있는 제품에 K는 넋이 나가버리고, 김 대리와 나는 수습을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아이고- 어떻게...”
“아까워... 이게 무슨 일이야 세상에”
옷이 젖는 것도, 신발이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품들이 빛을 보지 못하고 망가져 버려 속상했다. 김 대리가 제작한 리플렛도 푹 젖었다. 김 대리는 리플렛들을 끌어안고 속상해했다.
문득, ‘우린 참. 배알도 없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이렇게 회사 일을 자기 일처럼 생각하고 안타까워하는 직원이 또 어딨을까?’
‘아씨 퇴근해야 하는데 일거리만 늘었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일 텐데,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지도 못하고 몸부터 움직였다.
침수된 제품들을 보고 있자니, K에게 당하고 당해서 녹초가 된 우리 모습 같았다. 그래서 그렇게 안타까웠던 걸까?
우리는 11시가 넘어서야 집에 귀가할 수 있었다.
어느 날 K가 나를 따로 불러냈다. 따로 불러내는 일이 거의 없었기에 두려움을 한껏 끌어안고 K와 대면했다.
“어...... 방 대리에게 부탁할 게 있는데...”
“네. 대표님.”
“그게.... 내 명의로 된 집이 있는데, 거기 전세 명의 좀 빌려줄 수 있어?”
“네!? 전세요!?”
“이번에 세입자 전세금 돌려줘야 하는데, 돌려줄 돈이 없어서 대출받으려니까 한도가 좀 부족해. 너가 전세로 들어오면서 대출받아서주면 다음 세입자에게 전세금 받아서 줄게! 수고비도 충분히 주고!”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건지.....
가족도 친구도 도와줄 수 없는 상황이라 마지막으로 생각난 게 나라고 했다. 아무 문제 없을 거라며 고민해 보고 결정해달라고 했다. 아니- 대표님 그건 사기 대출이잖아요...?
“고민 좀 해줘~!”
바로 거절하지 못한 채 고민해 보겠다고 하고(나도 참 바보다.)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 뒤가 얼얼했다.
퇴근 후 K에게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도저히 눈을 마주하고는 거절하지 못할 것 같아서 카톡을 보냈다.
- 내가 너무 무리한 부탁을 했다. 나도 정신이 없어서... 신경쓰지 마! 해결할 다른 방법 찾았으니까!
그리고 찾아온 주말, K에게 전화가 왔다.
“방 대리~ 생각해 보니까 너무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한 것 같아서 미안해서 연락했어. 나도 급하긴 급했나 보다. 잊어줘~ 진짜 말도 안 되는 부탁이었어~ 민망하네~ 미안 미안~”
“아...괜찮습니다.”
“엉~ 고마워 즐거운 주말!”
“네. 주말 잘 보내세요!”
진정되었던 뒤통수가 다시 얼얼해지는 순간이었다.
코로나가 사그라지면서 박람회 관람 인원이 늘어나자, 셋이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K는 박람회만 함께할 알바생을 구했고, 알바 덕분에 조금은 편안하게 박람회 일을 마칠 수 있었다.
“대표님이 직원을 엄청 아끼시나 봐요! 배려 잘해주시는 것 같은데.”
박람회가 끝나고 알바와 둘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알바생은 K가 좋은 사람 같다며 칭찬했다. 낯선 사람에게만 보여주는 K의 과한 친절 모드라는걸 3일 일한 알바가 알 리 없었다.
“과연...그럴까요?”
괜히 욕을 하기는 뭐해서 씁쓸하게 웃으며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인사를 건넸다.
그다음 주, 알바는 우리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경영지원 신 대리였다.
신 대리는 유쾌한 사람이었다. 리액션이 크고 재밌어서 삭막한 사무실에 웃음을 불러오는 사람이었다. K는 그동안 밀려있던 업무를 신 대리에게 맡겼다. 신 대리는 빠르게 일 처리를 했고, K는 너무나 만족해했다.
김 대리와 나는 언제 K가 돌변할지, 언제 신 대리가 나가게 될지 조마조마하게 상황을 지켜봤다.
역시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부산에서 열리는 박람회에 K와 나 그리고 신 대리가 가게 되었다. 세 명이 같은 방을 쓰는 건 정말 너무 힘든 일이었다. 요란한 TV 소리, 자야 하는데 계속 일 얘기를 하는 K였다.
우여곡절 첫날 밤을 보내고, 박람회 첫날이었다. 아침 운동을 끝내고 방에 들어오니 K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요?”
“신 대리가 츄리닝 밖에 안 가져왔데.”
“...오 편하겠다!”
“넌 지금 그 말이 나오니!!?!?!? 쟤 옷입은 거 봐봐!”
신 대리는 레깅스를 입고 있었다. 평소에도 레깅스만 입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눈살을 찌푸리고 뭐라 뭐라 한소리를 하던 K였다. 신 대리의 유니폼이 조금 짧아 엉덩이를 반만 가리고 있었고, 그게 보기 싫었던 K였다.
“저 알바할 때도 레깅스 입었는데...”
“알바랑 직원이랑 같니!?!?!?!?”
머쓱하게 웃어 보이는 신 대리와 노발대발 화가 나 있는 K였다. 어차피 부스에는 테이블이 있어서 하반신은 고객에게 보이지도 않는데 왜 저렇게 난리인가 싶었다. 그리고 김 대리도 레깅스만 잘 입고 다녔는데 왜 신 대리한테만 저러는 건지...
“야! 너 지금 당장 나가서 옷 사 와! 이 옷은 절대 안돼!!!”
신 대리의 등을 툭툭 치며 옷을 사 오라는 K였다. 순간 여분으로 가져온 유니폼이 생각났다.
“대표님! 저 유니폼 여분으로 가져왔는데 그거 엄청 커서, 입으면 아래는 레깅스처럼 안 보일 거예요”
“그래? 그럼, 신대리 너 그거라도 입어”
다행히 신 대리가 옷을 사러 가는 일은 없었다. K는 씩씩 화가 난 상태로 한마디를 더 얹었다.
“너는 고객들 만나는데 화장도 안하니!!!!???”
“저 알바할 때도 화장 안 했는데...”
“직원이랑 알바랑 같냐고!! 예의가 없어 예의가!”
“어차피 마스크 쓸 껀데...”
“마스크 쓰면 화장 안하니!? 지금 늦었으니까 어쩔 수 없고, 내일부턴 화장해!”
정신이 아찔해지는 순간이었다. 내가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 건가 헷갈릴 정도였다. 복장과 메이크업 지적이라니! 어르신을 매일 보고 가정방문 다니던 사회복지사 시절 때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준비를 다 마치고, 숙소를 빠져나왔다. K는 다시 한번 소리를 질렀다.
“아아아아아악!!!!”
“......!?”
“쪽팔려!! 그거 안 빼!? 창피하니까 내 옆으로 오지 마!!”
K의 손가락이 향한 건, 신 대리 앞머리에 있던 구루뽕(?)이었다. 평소에도 길거리에서 구루프를 하는 사람을 극혐하던 K였다.
“행사장 가서 뺄 거예요!”
앞머리는 놓칠 수 없는 신 대리였다.
정말 기가 막혀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 회사에서는 매일 매일 기가 막힐 일만 있었다.
내가 입사하고 1달 반 정도 지났을 때였다. 나도 코로나를 피하지 못했다. 자가격리가 시작되었다. 밤에만 찾아오는 심한 기침과 미열 빼고는 컨디션이 너무 좋았다. 컨디션이 좋으니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이 심심했다. 드라마를 정주행하는 성격도 아니고, 딱히 뭘 하는 것도 없어서 끄적끄적 그림이나 그리고 놀았다. 그러다 문득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일이 밀려버리면, 모든 직원이 총동원되어서 해결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지루함을 이기고자 일을 했다.
“아 대리님 쉬지~ 왜 일해요!?
“진짜 심심해서 그래요. 아프지도 않고, 대표님한테는 저 일하는 건 비밀이에요!”
K에게 말하지 말라 직원들에게 신신당부했다. 정말 아프지 않았고, 심심했고, 직원들이 내 일을 대신할까 걱정되어 일을 하는 것뿐이었다. 만약 K가 이 사실을 안다면, 나중에 코로나 걸릴 직원들한테도 일을 시킬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K는 빠르게 사실을 전달받았고 나는 아픈데도 일하는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었다. 아니 정말 심심해서 한 건데...
K는 자가격리 기간을 유급휴가로 본인이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했다. 그 후 7개월이 지났고, K는 막 입사한 신 대리에게 내 유급휴가 처리를 하라는 지시를 했다. 그러나 3개월이 지났기에 대표는 아무런 보상을 받을 수 없었다.
그리고 몇 개월 후, 갑자기 줄어든 연차 수에 K에게 영문을 물었다.
“어~ 그거? 방 대리 코로나 걸렸었잖아~ 그거 유급휴가 처리 안 돼서 연차에서 깠어!”
“네...?!”
“근데 방 대리는 집에서 일도 했으니까 5일 중에 딱 3일만 연차에서 깠다!”
인심 쓰듯이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하는 K였다. 아니 본인 실수로 처리가 안 된 걸 왜 나한테...? 그리고 무급휴가로 처리했으면 나라도 지원금을 받았을 텐데 이제야 연차를 까버리는 건 무슨 심보인 거지. 또 기가 막혀버렸다.
신 대리가 일을 잘한다고 좋아하던 K였지만, 신 대리에게 직무 외의 일을 주면서부터 K의 태도는 변해갔다.
신 대리가 똑 부러지게 일을 하지 못한다며 혼내는 일이 점점 잦아졌다. 계속된 박람회로 에디팅 업무가 밀리자, 대리들(김, 방, 신)과 사무보조 알바가 전부 에디팅 업무에 뛰어들었다.
모든 업무가 그렇듯, 처음 하는 일은 익숙하지 않다. 하면서 익숙해지고. 하면서 요령이 생긴다. 요령을 알려줄 수는 있지만 그게 본인의 것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신 대리에게 관련 업무를 알려준 지 24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K는 신 대리를 불렀다.
“신 대리, 이 작업 왜 이렇게 느려?”
“네?”
“왜 느리냐고, 지금 해봐! 내가 어떻게 하는지 볼 테니까.”
K는 신 대리 뒤에서 신 대리의 작업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러니까 느리지~ 이렇게 못해? 이렇게 해야 할 거 아니야!”
“대표님~ 그 작업이요. 제가 어제 오후에 알려줬어요~ 그 작업이 좀 적응이 필요해서 그럴 거예요.”
보다 못한 내가 K를 말렸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내가 편을 들어준 게 더 열이 받았는지 버럭버럭 화를 냈다.
“야! 한 번에 복사해서 하면 될 걸 얘는 하나하나 보면서 입력하고 있다고~~ 신 대리 너 시급으로 따지면 얼마니? 2만 원 정도 아니야? 시급 만 원 짜리 알바 쓰는 게 낫겠어!!”
눈앞이 아찔했다. 신 대리 표정은 잔뜩 구겨졌고, 김 대리와 나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화가 난 K는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계속되는 K의 압박에 신 대리는 결국 퇴사를 결정했다.
“알바 했을 때는 대표님 사람 좋아 보였는데, 저는 사람 보는 눈이 없나 봐요.”
그렇게 소소한 웃음을 주던 신 대리도 떠나갔다.
퇴사자가 계속 생기니 아무것도 없던 잡플래닛에 회사 리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5개의 리뷰가 올라왔는데 모두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일관성 있는 내용의 리뷰. 누가 봐도 신뢰도가 높았다. 우리는 대충 누가 썼는지도 알 수 있었다. 속 시원하게 쓰여진 리뷰에 웃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됐다.
“대표님이 잡플래닛 리뷰를 알면, 분명 우리 부르겠죠?”
“당연하죠. 너네도 이렇게 생각하냐?면서 쥐잡듯이 잡겠지.”
“다 맞는 말인데, 리뷰 때문에 입사하는 사람은 없겠네요.”
“그렇죠...우리 팔자지 뭐.”
어느 날 면접자를 만나고 온 K는 우리를 불렀다.
“너네 잡플래닛에 우리 회사 리뷰있는 거 봤어!?”
“...아...뇨?”
“면접자가 그러더라~ 직원은 다 좋은데 대표가 별로라는 욕만 잔뜩 써 있데!”
“하... 하하.. 면접자가요?”
며칠 뒤 잡플래닛 리뷰는 모두 사라졌다.
K는 자기 잘못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 아무 말 없이 리뷰를 처리해버렸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12월. 부산 박람회가 또 열렸다. 이번에는 나와 김 대리 둘이서만 가기로 했다. K 없이 부산이라니!! 너무 설렜다. 하지만 부산으로 출발하기 전날, 공교롭게도 김 대리는 코로나에 걸렸고 결국 나는 K와 단둘이 부산으로 향해야만 했다. 단둘이라니 K와 단~~둘이라니!!!!
한 번 부산 출장을 같이 간 터라 나름 만반의 준비를 했다. 밤에 말 걸지 않도록 안대를 준비했고, 헤드폰도 챙겼다.
부산으로 향하는 길. 크리스마스로 한껏 들뜬 그녀였다. 부스를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꾸밀 거라며 벽에 걸 트리도 샀고, 바닥에 둘 트리는 다이소에서 살 거라고 했다.
부산 도착. 가볍게 요기를 하고 다이소로 향했다. 가까운 줄 알았던 다이소는 생각보다 멀었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다이소에는 녹색 트리가 품절이었다.
“대표님 트리는 다른 곳에서 사더라도, 소품은 미리 사죠? 여기 종류가 많은데!”
“아~ 무거운데 그럴 필요 있어? 그냥 한 번에 사자.”
“다른 데서 없으면 어떻게 해요?”
“그럴 일은 없겠지~~”
그렇게 수소문해서 찾아간 다른 다이소. 녹색 트리는 있었으나 트리를 꾸며줄 다른 소품들은 얼마 남지 않았다.
“이거 사면 되잖아요~”
“안돼! 내가 생각한 트리는 빨간색이 꼭 있어야 해!”
본인이 생각해 놓은 구성대로 꾸며야만 하는 트리였다. 짐도 무겁고, 부스를 설치할 시간도 얼마 없었는데 K는 뭐에 씌인 듯 다른 다이소로 향했다. 아니 그깟 트리가 뭐라고...
세 번째 다이소 방문. 역시나 K가 원하는 소품은 품절이었다.
“방 대리 말대로 거기서 살 걸...”
“그냥 다른 색으로 사죠~”
“안돼 그럴 순 없어! 어! 저기요!! 저거 살 수 있어요?”
K가 가르킨 건 다이소에서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꾸며놓은 장식이었다.
“저건 파는 게 아닌데요.”
“아~ 이번 주면 크리스마스도 끝인데~ 그냥 파세요!!”
“저건 바코드도 없는 거예요!”
“돈 드린다니까요?”
정말 너무너무 창피해서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었다. 결국 부스 설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전시장으로 후다닥 달려와야 했고, 부랴부랴 부스를 설치해야 했다.
부스 설치 후 너덜너덜해진 상태가 되었다. 이제 숙소 좀 가나 싶었는데 K는 트리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방 대리~ 우리 홈플러스 가보자, 거기엔 있을 것 같아.”
그렇게 저녁도 먹지 못하고 홈플러스까지 가서 트리 소품을 구매했고, 식당도 거의 다 문을 닫을 시간이 되어 어렵게 어렵게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숙소로 들어와 짐을 풀고, 씻고 나왔더니 K는 트리를 만지고 있었다. 트리의 악몽은 끝나지 않았다. 트리에 조명부터 소품까지 다 얹고 나서야 잠을 잘 수 있었다. 시간은 새벽 2시였다.
다음 날 부스에 왔더니 벽에 거는 트리도 빨리 달아보라고 닦달하는 K였다. 손님이 와도 응대는 커녕 트리에 집착하고 있었다.
친하게 지내던 다른 회사 대표님이 부스를 구경하곤 한마디 했다.
“어머 자기!! 이게 뭐야 이런 거 정말 아~~ 무 쓸데없어!!! 이거 있다고 물건이 더 팔리지도 않아~ 쓸데없는데는 힘쓰지마. 힘들게!”
내 말이 그 말이다.
K는 직원의 자존감을 바닥으로 내쳐버리는 말을 자주 했다.
“너 이러고 어떻게 디자이너를 했니?”
“이게 마케터야? 대학생을 데려다 놓는 게 더 잘하겠다.”
“너 진짜 멍청하구나~”
나한테 자주 하던 말은 과장 드립이었다.
“너 경력이면 과장을 달았어야 해.”
입사 때부터 들어서 퇴사할 때까지 들은 말이었다. 김 대리에게도 과장 이야기를 자주 했다.
“너네 조금만 더 배우고 하면 과장 달 수 있을 것 같아. 너넨 과장 달고 싶지 않니?”
아니 대리들만 있는데 뭔 과장입니까?
본인은(라떼는) 정말 승진하기 힘든 회사에서 3년 만에 과장을 달았었다고, 사업이 하고 싶어서 사업을 하고 대표를 하니 주변에서 시기 질투가 너무 많았다며... 자기 자랑을 하는 건 필수였다.
“너희 지금 경력이면 과장이 되고도 남았어야 하는데... 봐봐! 너네 입사할 때 뭐하나 할 줄 아는 게 없었잖아? 내가 그나마 이만큼 가르쳐서 좀 할 줄 아는 거지.”
과장이고 뭐고 다~ 부질없다.
계속된 직원들 퇴사에 K에게 또 불려 갔다. 장 대리를 자른 이유도, 신 대리에게 그렇게 한 이유도, K에겐 다 이유가 있었다. 내가 듣기엔 다 변명이었지만.
“대표님은 너무 공유하지 않아요. 직원이 일하고 싶은 회사를 만드는 건 회사의 비전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이야기는 항상 없고 이것저것 소일거리만 시키시잖아요.”
“그렇게 큰 걸 바라면 다 도망가던데?”
“바라는 게 아니라 보여줘야죠. 직원이 한 일이 어떻게 회사에 보탬이 되는지. 어떻게 회사의 비전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는지를요.”
“아니 요즘 애들은 말 많은 거 싫어한대서 말 최대한 안 하려고 하는데 왜~? 그리고 일단 직원이니까 일을 할 수 있게 만들고 키워야지! 이 직원한테 어떤 일이 맞는지도 봐야 하니까 이것저것 시키는 거야~”
“요즘은 한 직무의 전문성을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니까요.”
“그건 시야가 좁은 애들이나 하는 말이야!”
말이 통하지 않는 K였다.
“그리고 대표님, 대표님은 기분 나쁜 거 너~무 티 나요. 누굴 싫어하는 것도 너무 티가 나구요. 오죽하면 알바생들이 대표님이 누굴 싫어하는지도 다 알 정도예요.”
“아니 그건!! 걔가 일을 너무 못하니까! 그리고 내가 누구를 싫어하던 방 대리한테 영향이 가는 게 있어? 널 싫어하는 것도 아닌데.”
“저는 거리에 경찰차만 보여도 그냥 심장이 둥둥거리는 사람인데.... 매일 사무실이 그런 분위기면 어떻겠어요?”
“에이씨! 그냥 내가 입을 다무는 게 좋겠다. 너네가 애들 다 가르치고, 너네가 다 해~ 난 말 안 할래. 그리고 사무실 이사 가면 내 방 따로 만들어서 거기에 틀어박혀 있을 게 그럼 티는 안 나겠지!”
어째서 그런 결론이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그래.. 그게 낫겠다 싶었다.
“그래도 방 대리는 요즘 애들 같지 않아서 좋아!”
“하... 하하 그런가요?”
예...저도 좀... 요즘 애들 같아지고 싶네요.
APP 리뉴얼 기획과 운영업무가 나한테 오면서 도대체 콘텐츠 에디터로 입사했는데 난 무엇을 하는 건가. 내 직무는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물론 새로운 일을 배우는 건 재밌었다. 하지만 에디터가 이런 일 저런 일 다 할 줄 알면 잘하는 거지! 라고 생각하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이런 태도는 용납할 수 없었다. 에디터 말고 다른 직무로 변경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K를 찾아갔다.
“대표님 제 직무가 에디터는 아닌 것 같아요.”
“왜? 에디터가 하고 싶어!? 에디터 일만 할 거야!? 지금이라도 에디터 일만 시켜줄까?”
비아냥거리는 K였다.
“하...아니요. 지금 하는 일 재밌어요. 재밌고, 잘하고 싶은데, 에디터라는 직무는 아닌 것 같아서요. 직무가 제 태도를 결정하는 것 같아요. 맞는 직무로 바꿔주세요”
이건 간곡한 요청이었다. 다음 회사로 이직을 위해서라도 필요한 작업이었다. 에디터지만 에디터 결과물은 없고, 온갖 잡일만 했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 맞는 직무가 필요했다.
“그래 그럼 직무를 바꿔야겠네~ 뭐가 좋을까~ 기획 운영으로 바꾸면 되겠니? 하긴 뭐 방 대리는 기획을 더 잘하니까”
“네 제가 하는 일이 명확하고, 그 직무가 일을 충분히 설명해 줄 수 있는 거면 돼요.”
“맞아. 너 에디터로 들어왔지만, 글은 못쓰잖아~!? 별로 잘 쓴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넌 너가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하니?”
“...아뇨 부족하죠.”
“맞아 감이 좀 떨어지긴 하지. 대신 기획 잘하잖아~ 기획 잘하는 게 승진에는 훨씬 도움이 돼! 기획 운영이 딱 맞겠다!”
참, 자존감을 갉아먹는 데에 타고난 사람이었다.
연초, 정부지원사업 계획서를 쓰느라 예민해진 K였다. 노래도 틀으면 안 됐고, 대화도 할 수 없었다.
문득, K가 쓰고 있는 사업 내용이 궁금했다. 어차피 사업이 선정되면 그 사업도 어차피 다 내가 하게 될 텐데 무슨 사업인지는 물어봐도 되지 않을까?
“대표님~정부지원사업으로 무슨 사업 쓰세요?”
K의 눈이 반짝였다.
“방 대리~ 정부지원사업이 궁금해!?”
“아니, 무슨 내용 쓰시는지 궁금해서....”
K는 신나게 정부지원사업에 대한 내용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상세하게 알려줘서 재밌게 들었다.
“자! 그럼~ 방 대리는 이 지원사업 써봐!”
“네? 제가요?”
“써보고 싶어서 궁금하단 거 아니었어?”
“아...닌데요?”
“너 잘 쓸 것 같으니까 그냥 너가 쓰자!”
나는 입을 다물었어야 했다.
역시나 K는 아무것도 공유해 주지 않았다. 그놈의 ‘알아서’
“내가 다 보여주면, 거기에 네 생각에 갇히게 될 거야. 그러니까 알아서 방 대리 생각대로 써^^”
그렇게 정부 지원사업 존재를 알게 된 날 나는 계획서를 쓰게 되었고, 마감 날까지 야근의 연속이었다.
“자! 한번 써보니까 쓸만하지? 다음 건 이거 써봐!!”
빵아...입을 다물고 살자. 제발.
새해가 되면서 K는 사업을 더 확장하겠다는 결의를 다졌고 김 대리와 나는 꼭 이직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K는 빡빡한 일정으로 사업을 진행해 나갔다. 어플 서비스는 수익구조가 없었고, 한참 리뉴얼 중이었기에 제품에서 수익을 올리겠다며 김 대리를 쪼기 시작했다. 김 대리 혼자서 하기 벅찬 일뿐이었고, 디자이너인 김 대리는 디자인은커녕 MD 일을 하기 바빴다. 점차 업무가 지연되기 시작했고, K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저는 디자이너인데 왜 MD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넌 처음부터 디자이너 겸 MD로 뽑은거 였어.”
“...네?! 디자이너 겸 MD요?”
자기 입맛대로 직무를 바꿔버리는 K였다. K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또다시 김 대리의 자존감을 깎아내렸고, 김 대리는 지쳐갔다. 김 대리는 이직을 결심하며 포트폴리오를 완성해 냈고, 이직에 성공했다. 그곳은 신 사원이 이직한 회사였다.
신 사원이 투명 인간 취급을 당하고, 악담을 듣는 걸 본 김 대리는 이직을 말하는 대신 몸이 너무 안 좋아졌다는 핑계를 댔다. 생각해 보니 내가 입사하기 전에 근무한 직원들은 몸이 안 좋거나 집에 사정이 생겼다는 이유로 퇴사했다. 그들의 퇴사사유는.....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K는 홀로 남을 나를 걱정했다. 김 대리도 나를 걱정했고, 나도 나를 걱정했다. 나도 빨리 그만두고 싶었지만, 이 일 저 일 다하는 바람에 포트폴리오는 엉망이었다. 그리고 고심해서 만들었던 노션 홈페이지, APP 리뉴얼 기획, 어플 리뉴얼로 인한 홈페이지 기획 등 모두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다. 세상에 내보내기만 하면 되는 것들을 K가 손에 쥐고 내보내지 않았기에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하나도 없었다. 애매해진 물경력이 되었다.
K는 계속해서 나를 소환했다. 내가 나갈까 걱정하면서도 괜한 오기에 차라리 나갈 거면 빨리 나가라고 얘기했다.
“너도 나갈 거면 빨리 나가~ 이렇게 급하게 그만두지 말고.”
K는 지쳐 보였다. 다 키워놨더니 다~ 그만둔다며. 속상해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그만둔 사람들을 뒷담화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 사람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내가 그렇게 잘못했어? 그렇게 심해? 내가 방 대리한테도 그렇게 막 했니?”
다른 직원보다는 나한테 성깔을 부리는 일은 별로 없었다.
"....아..뇨?"
“방 대리는 일 잘하잖아. 나는 일 잘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대하지 않아~ 다들 일을 못 했어! 그러고도 월급 받아 가고 싶냐고!!! 그래서 뭐라 한 것뿐이야.”
항상 자기 잘못은 없었다. 남 탓이었다.
나는 일을 잘 하는 것이 아니였다. 그냥 트러블을 만들기 싫으니 순종했을 뿐.
이직 전에 연봉을 올려놓으면 좋으니 연봉 협상까지는 버티는 것이 나의 계획이었다. 그 사이에 포트폴리오도 잘 만들어 이직하는 것까지!
그래도 김 대리 퇴사 후, 딱 한 명 남아 있는 나에게는 잘해줄것이라 생각했다. 단둘이 부산 출장을 갔을 때도 트리 사건 빼고는 정말 잘 챙겨줬으니까. 고분고분하고, 시키는 일 다 재밌어하고, 다 퇴사해도 유일하게 곁을 지키는 나인데!
하지만 그건 정말 크나큰 착각이었다.
벼르고 벼르던 사무실 이사가 급하게 결정되었다. 벌써 세 번째 이사였다. 매번 이삿짐센터를 불렀기에 마음을 놓고 있었다. 하지만 늘어난 제품으로 사무실 내에 짐이 많아진 상황. 포장이사의 견적이 예상보다 높게 나왔다. 약 9톤 정도의 짐이었고, 견적은 200만 원 이상이었다. K는 그렇게 비싼 이사는 할 수 없다며 당근에서 알바생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짐 나르는 인력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직원이 5명일 때도 이삿날에 출근하지 않았었는데, 달랑 혼자 남은 직원에게 이삿짐을 나르라고 했다. 이사 전날 9톤의 짐을 일일이 싸야 했고, 당근에서 구인한 아저씨들과 함께 하루 종일 짐을 날라야 했다.
사무실은 넓어졌지만 문제가 있었다. 이사가 급하게 결정되어 가벽과 전기공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K는 자신만의 공간인 대표실을 갖고 싶어 했다. 나도 그편이 훨씬 좋았다. 가벽을 어떻게 세울지 구상했지만, 급한 이사 일정으로 인해 가벽을 세우지 못했다. 가벽 없이 배치된 책상들. K의 자리에서 내 모니터가 너무나 훤하니 구석구석까지 잘 보였다. 젠장-! 카톡 하나 맘대로 못 하는 사무실이 되었다.
전기공사도 빨리 처리하지 않아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낮에는 괜찮았지만, 비가 오는 날이나 저녁이 되면 사무실이 깜깜했다.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K가 급하게 집에 있던 스탠드 조명을 가져다줬지만, 너무나 노란빛이라 틀기도 애매해서 깜깜한 어둠 속에서 일할 수밖에 없는 최악의 사무실이었다.
송도에서 진행되는 박람회가 가까워졌다 송도는 출퇴근이 까다로워 작년에도 숙소를 잡아줬었다. 근처 숙소를 알아보고 K에게 보고했다.
“너무 비싼데? 1박에 5만 원인 곳 알아봐!”
“1박에 5만 원이요!?”
“응. 박람회 나가는데 숙소에다가 비용을 그렇게 많이 쓸 수는 없어.”
작년에 김 대리와 나는 숙소를 따로 잡아 훨씬 많은 숙박비가 들었는데 갑자기 무슨 돈을 아낀다는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무슨 송도에서 무슨 1박에 5만 원이람? 1박에 7만 원까지 알아봤지만, 그래도 안 된다고 손사래를 치는 K였다.
결국 K가 중간에 나를 태우러 오는 방향으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매일은 아니었고 나는 두 시간 반이나 되는 거리를 출퇴근해야만 했다.
3개월을 못 버티고 퇴사하는 직원들이 많아지자, 사무보조 아르바이트생을 두어 단순 작업을 시켰었다. K는 알바생에게는 친절했다.
졸업을 앞둔 대학생 알바생 A는 손도 빠르고, 사진 보정도 정말 잘했다. 묵묵하게 자기의 일을 하던 학생이었다. K는 A를 좋아했고, 유일하게 식대를 챙겨준 알바생이었다. 개학을 한 이후에도 종종 근무해 달라고 부탁했다.
A가 졸업을 하자 K는 A를 불러냈다. 퍼블리셔 경력을 쌓게 해줄 테니 6개월 정도 같이 일하자는 제안이었다. 알고 보니 청년고용지원금을 받고 싶었던 K였다.
어차피 취업 준비도 해야 했고, 경력을 쌓을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던 A는 자취방 계약을 연장하고 K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4대 보험이 가입되지 않았고, 퍼블리셔는커녕 다른 잡일을 하기 바빴다.
“대리님.. 왜 4대 보험 가입이 아직도 안 되어 있는 걸까요? 집 계약 딱 6개월만 연장해서 6개월만 일할 수 있는데.”
“저도 모르죠...”
A가 직원으로 일한 지 한 달이 좀 넘었을 때였다. 퇴근한 A에게 카톡이 왔다.
- 대리님, 저 주휴수당이 안 들어왔나 봐요. 월급이 좀 적어요!
- 그럴 리가 없는데, 확인해 볼게요.
알바생들의 출퇴근 시간을 정리해서 제출하는 업무는 내가 했기에 K에게 물어봤다.
“대표님~ A 월급이 적다고... 확인 좀 부탁드릴게요.”
“잘 들어갔는데?”
문제없이 월급이 입금됐다는 말을 전하니 A는 본인이 직접 이야기를 하겠다고 했다.
몇 분이 지났을까. A에게 연락이 왔다.
- 저 이제 직원이라고, 식대를 뺐데요!
그동안 매번 주던 A의 식대를 빼버린 것이다. K는 입사 제의 때 분명 식대 관련해서 얘기했다고 우기고 있고, A는 들은 적도 없고, 들었으면 입사 안했을 거라고 했다. 근로계약서도 새로 쓰지도 않았기에 식대를 갑자기 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처사라고 주장했다.
K는 그동안 A가 학생이었기에 배려 차원에서 식대를 준거라고, 직원들도 식대를 안 주는데 알바생을 줘야 하냐며, 너 식대까지 챙겨주면 연봉으로 따지면 얼마인 줄 아냐며 분노의 카톡을 보냈다.
심지어 청년고용지원금을 받으려면 졸업 후 6개월이 지난 사람을 고용해야 하는데, K는 그걸 뒤늦게 알아서 입사 처리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K는 A에게 더 일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이미 감정이 상한 A는 곧바로 퇴사를 고했다.
- 대리님 전 그만둘 거예요.
- 그래요. 정말 충분히 이해해요.
알바생 B는 아이 엄마였다. 꽤 오랫동안 회사생활을 했고 육아 때문에 일을 쉬는 경력 단절 여성이었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는 3~4시간 동안만 일을 했다.
B는 회사 경험이 있었기에, 업무 파악이 빨랐고 효율적으로 하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면서 일했다. 단순 사무보조였지만 K는 B를 욕심냈다. 더 복잡하고 어려운 업무를 시키기 시작했다.
한 번도 투덜거린 적이 없고, 한 번도 짜증과 화를 낸 적이 없는 B였는데, 어느 날 씩씩거리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A가 K와 식대 문제로 싸우고 퇴사를 통보한 그다음 월요일이었다.
“대리님 저 그만두려고요.”
“무슨 일 있었어요?”
“대표님 사람 안 좋은 건 알았는데, 이건 진짜 아닌 것 같아요. 어떻게 자기 잘못은 하나도 없는 사람이지?”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B의 월급도 잘못 들어왔다. B는 곧바로 K에게 연락하여 월급이 잘못 들어왔다고 이야기했다.
출퇴근 일지는 엑셀로 정리하는데, 월별로 시트를 만들어구분한다. B는 매일 출퇴근 일지를 적었고, K는 4월 시트를 보고 월급을 줘야 하는데, 5월 시트를 보고 월급을 줘서 부족한 월급이 들어간 것이었다.
명백한 K의 실수였다. 매일 출퇴근 일지를 작성하라던 건 K의 지시였다. B는 그걸 잘 따랐을 뿐이었다.
- 왜 헷갈리게 미리 적어놓고 그래!? 내가 일을 한두 개 하는 사람이야? 가뜩이나 정신없는데 이딴 식으로 엑셀을 정리해서 왜 두 번 일하게 하니!?
역시나 본인의 실수는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화를 냈다.
“혹시... 그 연락 몇 시쯤 했어요?”
“음.. 금요일 3~4시쯤이었나?”
“아.... A랑 식대 문제로 싸우고 있을 시간이었네요”
그냥 넘어갈 수 있었던 일을 A와의 신경전으로 B에게도 영향이 간 것으로 보였다.
“기분 나빠서 일 못하겠어요. 그만둘래요.”
“네... 충분히 이해합니다.”
뭐랄까. 정말, 부끄러웠다. 물론 오래 다닐 회사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창피한 사람을 대표라고 부르면서 다녀야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봉 협상까지 남은 기간은 딱 한 달이었다. 사무실 이사도, 2~3시간 출퇴근해야 하는 박람회를 겪고도 연봉 협상 때까지 버티고자 했던 내 의지는 알바생들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꺾여버렸다.
진짜. 쪽팔렸다.
완벽한 사람 없고, 완벽한 상사 없지만, 이렇게 쪽팔린 상사는 처음이었다. 홀로 내가 이 회사를 더 버틴다고 해서 고마워하지도 않을 거고, 더 좋은 대우를 받지도 못할 것이다. 매일 이렇게 창피하고 쪽팔림에 고개를 묻고 일할 수는 없었다.
이 쪽팔림에서 나를 구하기로 했다.
A가 퇴사를 통보하고 그다음 주 B가 퇴사를 통보했으며, 그다음 주에는 내가 퇴사를 통보했다.
조건이 좋은 회사에서 제안받았다며 퇴사하겠다고 했다. 정말 간절한 내 바람이었지만 이뤄지지 않았던 내 바람을 퇴사 핑계로 써먹었다.
K는 또 노발대발했다.
“내가 다른 회사 알아보기 전에 미리 얘기하라고 했지?!”
뭐....K가 이렇게 나올 줄 충분히 예상했다.
“저 다음 달 말까지는 근무할거예요. 이직할 회사에도 그렇게 합의 했구요. 저도 마무리는 하고 나가야죠”
“아... 그래?”
K는 꼭 퇴사 한 달 전에 통보하라고 했기에, 한 달 하고도 열흘의 기간을 두었다. 맘 같아선 바로 퇴사하고 싶었지만, K 같은 사람에게 괜히 욕먹고 싶지 않았다.
끽소리도 못 하게 되자, K는 슬슬 나를 돌려 까기 시작했다.
“방 대리가 일은 열심히 했는데 수익구조는 만들 의지가 없는 것 같아서~ 좀 그랬어.”
“수익구조요?”
“수익구조는 대표만 만드는 게 아니야~ 직원들도 만들 수 있는 건데 방 대리는 그런 적극성이 많이 떨어지더라고.”
도대체 수익구조를 직원이 만드는 회사가 어딨.... 아니 수익구조를 만들 수 있는 직원이면.... 직원 안 하지...대표를 하지....
“방 대리는 영업도 싫어하잖아.”
“제가 영업으로 입사한 건 아닌데?”
“누가 그렇게 직무 다 따져가면서 일하니!? 회사에서 돈을 써서 직원을 고용하면, 돈을 벌어와야 하는 거지”
슬슬 내 표정이 굳어지니, K는 말을 돌렸다.
“그래도 방 대리는 참 일 잘했어~ 내가 너한텐 그렇게 화낸 적이 별로 없잖아. 어딜 가도 일 잘할 거야. 나랑 일하던 사람들은 어디 가서 일 못한다는 소리는 안 듣더라고.”
그저 웃음만 나왔다.
“다 가르쳐 놓으니까~ 다 나가버리고~ 그냥 알바만 구해서 속 편하게 일할까 봐.”
‘네... 제발 그러시길 바래요.’
속으로만 대답을 삼키는 나였다.
그렇게 한 달,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봐도 보고 일할 수 있도록 매뉴얼과 업무 인수인계서를 만들었다. 누가 볼지는 모르겠지만 K의 횡포를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힘들 테니, 업무의 부담이라도 줄여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마지막 출근 날까지 야근했다.
퇴사 2주 전에 업무 인수인계서를 제출했지만, 계속 확인하지 않다가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서류를 보고 이것저것 물어보는 K탓이었다. 저녁도 먹지 않은 채 밤 10시까지 업무를 인수인계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방 대리! 꼭 놀러 와! 수고했어!”
“네~ 건강 챙기세요. 대표님.”
그렇게 1년 4개월만에
지옥 같던 곳을 빠져나왔다.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신 보지 말자
가장 길게 쓴 글이지만 사실 적지 못한 이야기들이 너무너무 많다. 더 쓰면 스트레스에 잠겨버릴 것 같아 여기서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K는 분명 사업 수완이 좋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딱 그뿐이다. 그녀는 사람을 포용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스스로 대표라고 칭하며 대표로 불리기를 원했지만, 나는 K는 대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직원이 일하고 싶도록,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동기부여를 하는 몫이 대표라는 호칭에 포함되어 있다고 믿기에 나는 K가 대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장담컨대 K는 아마 다시는 나와 김 대리 같은 직원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장담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삶 속에서 이렇게까지 장담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는 그만큼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아마 그녀는 끝까지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