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소설/엽편] 보리 라테와 맥주 한 잔의 밤

by 빵곰

미진은 퇴근 후 백화점으로 향한다. 가장 비싼 강아지 사료와 간식을 집어 든다. 사료는 100% 천연 성분을 사용했다고 한다. 간식은 동결건조 방식으로 영양소를 온전히 보존했다. 이런저런 어려운 말들이 많아 다 읽지는 않는다. 비싼 것이니 몸에 좋겠지, 하며 바로 계산대로 향한다. 그녀의 끼니는 집 근처 편의점에서 해결한다. 여러 삼각김밥 중 그나마 나트륨과 당이 적은 것으로 고른다. 나트륨을 꼼꼼히 살핀 게 무색하게도, 집에 있는 라면이 눈에 띈다. 뇌까지 파고드는 조미료의 향기를 거부하지 못하고 냄비를 올린다. 몇 젓가락만에 면을 끝내버리고 국물은 버린다. 산책을 할 겸 백화점에서 사 온 사료와 간식을 들고 집을 나선다.

오피스텔 입구를 지나 상가 주차장 쪽을 샅샅이 살핀다. 차 안쪽 구석에 누런 털이 보이는 듯 하다. 일주일 전인가 편의점에 가다 이 강아지를 처음 보았다. 빗질한지 오래된 듯 뭉쳐있는 털로 잔뜩 움츠려있었다. 털은 하얀 것 같았지만, 워낙 때가 타 군데군데 누런 기가 있었다. 특히 코와 입 주변이 누래 ‘라테’ 라고 애칭을 붙여주었다. 마치 라테에 코를 담근 것 같은 모양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매일 저녁 끼니를 챙겨준 지 일주일째다.

“라테야.”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도 녀석은 들은 체도 안 한다. 자세히 보니 무언가를 먹고 있다. 순간 팔에 힘이 빠져 통조림 캔을 놓칠 뻔했다. 축 내려앉은 몸 안쪽에서 짜증이 끓어오른다. 이틀 전부터 나보다 먼저 라테에게 밥을 주는 사람이 생겼다. 밥을 주러 다가가 보니 이미 정신없이 뭔가를 먹고 있었다. 심지어 통조림 브랜드를 검색해 보니 꽤나 고급이었다. 그때까지는 라테의 밥도 내 것과 같이 편의점에서 해결하곤 했었는데, 이틀 전부터는 백화점에 들르게 되었다. 사실 내가 키우는 강아지도 아니니 짜증 날 이유가 없다. 그래도 내가 사온 새 통조림에 눈길을 주는 걸 보니 묘한 승리감이 든다.

라테를 데려와 키우는 것도 생각해 봤다. 그러나 월세에, 교통비에, 식비에, 이것저것 빼면 도저히 식구를 늘릴 수가 없다. 어디 돈 뿐인가, 매일 출근할 때마다 옷이 쌓인 통에 공간도 남아나질 않는다. 시간은 또 어떻고. 이렇게 산책 겸 나와서 밥이나 주지 한 시간씩 산책할 엄두는 안 난다.

다음 날 아침, 라테가 있던 주차장을 슬쩍 보니 이번엔 개껌까지 하나 놓여있다. 바삐 움직이는 건 발이지만 마음이 계속 쌕쌕댄다. 어떤 사람인지는 몰라도 내게 대결을 거는 게 틀림없다. 데려다 키우기엔 무서운 비겁한 사람이 분명하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피차 똑같다는 생각에 통쾌하면서도 분한 마음은 여전하다.

오늘은 퇴근 후 바로 집으로 향한다. 어쩌면 그 사람과 마주칠지도 모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끊임없이 생각한다.

‘제가 먼저 밥을 주기 시작했어요.’

‘제가 주는 걸로도 충분하니 이제 그만하시죠?’

사실 어느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움직이는 발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저 닥치면 되는대로 내뱉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주차장 앞에 다가갔을 때 역시나 사람이 서 있었다. 옳다구나 하고 부르려던 찰나, 마음이 확 가라앉아버렸다. 정장에 구두 차림인 남자가 손엔 비닐봉지를 들고 망연하게 서 있었다. 그가 너무 우왕좌왕하는 바람에 나도 그 이유를 골몰하게 되었다. 자세히 보니 라테가 없었다. 아침에 두고 간 개껌도 그대로였다. 이빨 자국 하나 없이. 그는 나를 보더니 나를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보리가 사라졌어요.”

보리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지만 단박에 라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서로가 통조림의 주인이라는 것도 자연스레 알았다. 이 시간에 차도 없는 두 사람이 주차장에 있는 이유도.

“라테가 없어졌다고요?”

나는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분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이 남자와 라테를 공유라도 했던 것처럼 동질감이 들었다. 우리 둘은 정장과 구두 차림으로 라테와 보리를 찾아 나섰다. 각자 ‘라테’와 ‘보리’를 외치며 공원을 돌던 무렵, 라테와 비슷한 강아지를 마주쳤다. 비슷한 생김새였지만 털은 하얗고 윤기가 났다. 코와 입 주변의 누런 색도 없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한눈에 그 강아지가 라테이자 보리임을 알았다. 강아지는 목줄이 걸린 채로 한 아주머니와 산책을 하고 있었다. 아주머니도 걸음을 멈추고는 우리 두 사람을 쳐다봤다. 아주머니는 한동안 생각해 보더니 이 상황을 얼추 이해하시는 것 같았다. 세 사람과 강아지 한 마리 사이의 짧은 정적 후 아주머니가 말했다.

“우리 코코에게 밥을 주던 분들인가요? 코코를 찾은 곳에서 사료와 통조림 같은 걸 봤어요. 코코에게 목걸이가 있었는데 그건 못 보셨는지……. 일주일간 밥도 못 먹고 찾아다녔어요. 무사히 찾기는 했지만요.”

자세히 보니 털 사이로 반짝이는 목걸이가 있었다. 넓적한 팬던트에는 코코라는 이름과 함께 전화번호도 적혀있었다. 일주일간 밥을 챙겨주면서도 그 목걸이는 보지 못했던 것이다. 길어진 털에 가려져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부끄러움에 고개가 숙여졌다. 아주머니는 그런 우리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우리 코코에게 밥을 챙겨줘서 고마워요.”

그 말을 끝으로 코코와 아주머니는 떠났다. 남자와 나는 각자의 발만 쳐다본 채 한동안 서 있었다. 얘기를 하진 않았지만 같은 마음일 것이다. 우리는 멋쩍은 걸음으로 공원을 벗어나 주차장 쪽으로 향했다. 주차장을 지나 오피스텔 골목으로 들어가면 이 어색한 동행이 계속될 것 같아, 나는 다른 일정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잠시 멈춰서 짧게 호응했다. 그가 돌아서기 전에 불쑥 입이 움직인다. 그의 뒷모습이 보이면 도무지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미안합니다….”

그는 돌아서려던 발을 잠시 멈추더니 다시 내 쪽으로 돌아선다. 그리고 고개 숙여 인사한다. 그 인사에 함축된 말을 들은 듯하다.

나는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새로 생겼다는 이자카야로 향한다. 가보고 싶다고는 생각했지만 가본 적은 없었다. 집으로 가는 길목에서 횡단보도를 건너야 했기에 매번 귀찮아진 탓이었다. 최근엔 백화점에서 돈까지 썼으니 미묘한 죄책감 때문에 편의점만 갔었다. 썰렁한 집 안과는 달리 가게는 활기차게 손님을 반겼다. 네 캔이 아닌 한 잔의 맥주뿐이지만, 거품은 춤을 추고 잔에 닿은 손이 짜릿하다. 크게 한 모금을 들이켜니 식도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나의 식도도, 일상도 깨워버린다. 식당은 창문도 없이 발이 쳐진 문 뿐이라, 밖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주방장의 존재도 잊어버린 채 나만의 세상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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