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근무하는 막내 교사가 내게 물었다. 마침 퇴근시간을 앞두고 교사실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교사들은 한 소리로 대답했다.
"벌써 1년이 지났어?"
"네."
짧게 대답한 막내교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그 얼굴을 못 본 척 내 얘기를 시작했다.
"나는 아빠 얼굴도 기억이 안 나. 한 5년 전까지만 해도 아빠를 생각하면 딱 한 장면만 떠오르는 거야."
아빠는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 한 지 3년 정도 지났을 때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에 아빠의 생신선물을 사가지고 고향집에 내려갔다. 처음으로 백화점이라는 곳에서 아빠의 재킷을 샀다. 화사한 봄과 어울리는 연회색톤에 파스텔톤 핑크 무늬가 중간중간 섞여있는 재킷으로 내 맘에 쏙 드는 옷이었다. 농사일에 검게 그을린 얼굴과 머리중앙이 비어 있고 넘어져서 앞니가 부러진 아빠에게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고른 재킷이 비록 하얀 얼굴과 머리카락이 풍성해서 단정하게 3대 7 가르마를 하고 하얀 이를 고르게 들어낸 도시 아빠에게 어울리는 재킷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아빠에게 처음으로 백화점에서 파는 재킷을 선물로 준비했다는 사실에 나는 행복하게 백화점을 나섰다.
고향에서 자취방으로 돌아오던 날 마을 둥구나무 아래 버스정거장까지 따라 나오신 아빠는 내가 선물한 재킷을 입고 계셨다.
"아빠 잘 어울리는데? 일할 때 말고 외출할 때만입어야 해."
"알았어. 담부터는 비싼 거 사 오지 마."
아빠의 그 말에 나는 지갑에서 3만 원을 꺼내서 아빠 주머니에 넣었다. 내가 처음으로 드린 용돈이었다.
"아빠 용돈인데 다음에는 많이 줄게. 술사면 안돼. 엄마한테 나 혼나."
아빠는 내 손을 뿌리치시면서 돈을 다시 주머니에서 꺼내서 내게 쥐어 주시면서 말씀하셨다.
"아직 내가 너한테 돈 받을 아빠는 아니다. 가져가서 너 필요한데 써. "
그러고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뒤돌아서서 집으로 향했다. 나는 다시 아빠에게 달려갔다.
"생활비도 아니고 용돈이라니까 쪼끔이라서 그러는 거지? 이러면 다음부터 안 줄 거야."
멀리 버스가 보이고 나는 급하게 아빠 주머니에 돈을 던지듯 넣고 버스에 올라탔다.
그러는 나를 향해 뒤돌아서서 다 채워지지 않은 앞니를 들어내고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드셨다.
짧게 그렇게 손을 흔들고 뒤돌아서서 걸어가셨다.
그것이 아빠와 나의 마지막 기억이다.
돌아가시고 나서 한 동안 아빠를 기억하면 마지막 그 모습이 떠올라서 눈물이 났다. 생각할수록 떠 올릴수록 그 웃음이 쓸쓸하고 고독했다는 것이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그 얼굴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내 얘기를 듣고 있던 내 또래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그 선생님의 엄마는 어릴 때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작년에 돌아가셨다.
"나는 엄마도 아빠도 다 없어. 아빠 보고 싶다."
순간 내일 아빠의 1주기를 맞이한 막내 교사도 50에 고아가 된 선생님도 그 얘기를 듣던 다른 선생님들도 눈물바다가 되었다. 서로 휴지를 건네면서 훌쩍대는 모습을 보다가 30년 전에 아빠를 보내고 얼굴도 잘 기억이 안나는 멀쩡한 내가 말했다.
"누가 분위기 이따위로 만든 거야. 책임져."
다들 나를 쳐다보고 울다가 웃다가 그렇게 우리는 눈물을 멈췄다.
"태어나면 죽는 건 바보도 다 알잖아. 지금처럼 우리 이렇게 잘 살아주는걸 아빠도 바랄 거야."
나는 옆에 막내 교사의 어깨를 한 번 쓰다듬는 것으로 위로를 대신했다.
"내일 크리스마스 행사준비는 다했지? 추워 빨리 집에 갑시다."
수많은 사연을 만나는 현장에서 나는 있는 그대로를 공감하려고 노력한다. 때로는 외면하거나 모른척하는 것이 배려가 될 때도 있다.
오늘도 나는 내 방식대로 막내교사와 공감을 했다.
우리 막내 교사는 우리 유치원을 졸업한 제자다. 돌아가신 아버님은 좋은 분 이셨고 누구보다 가족을 사랑하셨다. 1주기를 맞으며 그분의 명복을 빌어 본다.
그리고
살아 계셨다면 30만 원도 적다고 300만 원을 내놓으라고 하셨을 아빠의 얼굴을 다시 한번 떠올린다.그리고 나에게는 엄마가 있다는 사실을 저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