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고속도로 타는 일이 생기면 꼭 휴게소에 간다. 화장실에 가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휴게소 간식을 먹어야 하는 것은 아이들이 세운 원칙이다.
"엄마는 뭐 먹을 거야?"
키오스크를 이리저리 넘기는 나를 보고 소떡소떡을 선택한 딸이 옆에서 재촉했다.
"음~"
지금은 시골 학교라고 하기 어려운 지역으로 바뀌었지만 내가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작은 시골 중학교였다. 언덕 위에 위치한 학교는 교문을 들어가 운동장을 가로질러야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보통의 학교와는 달랐다. 교훈이 쓰여 있는 커다란 조경석 주변으로 아기자기한 정원을 지나서 건물을 통과해야 계단 아래 운동장이 보였다. 그 계단에 앉아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을 보며 소라과자와 쭈쭈바를 먹으면 온 세상을 얻은 것처럼 행복했다. 교문 앞에 포장도로를 빼고 산과 들이 전부였던 농촌학교가 내가 다녔던 중학교다.
"며칠 뒤에 우리 학교랑 자매결연 맺은 서울 중학교에서 손님들이 온다. "
담임 선생님의 말씀에 우리는 어리둥절했다.
"그러니까 청소를 깨끗하게 해야겠지?"
자매결연을 제안한 서울학교 선생님은 우리 학교 선배였다. 우리 학교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서울에서 손님들이 오게 된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도시와 농촌을 연결하는 교육이라고 이름을 붙여야 할 것 같다.
"장학사가 오는 것도 아니고 쓸데없이 왜 그런 걸 한다고 해서 청소를 하게 만든다냐."
볼멘소리가 나왔지만, 손님이 온다고 하면 집 안 청소하는 것이 예의라는 담임선생님 말씀에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너희들은 손님들이 오면 학교 소개를 해줘야겠다."
교감 선생님이 회장과 나를 불러 우리들의 역할을 이야기했다. 그걸 왜~ 우리가 하죠?라는 표정으로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선생님들만 오시는 게 아니라 학생 대표들도 같이 온단다."
그제야 무슨 뜻인지를 알아챘다.
"네가 해라. 나는 안 한다. 우리가 시골 쥐야."
교무실을 나오는 회장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네가 회장이니까 네가 해라. "
서울에서 선생님들과 서울 쥐들이 도착했다. 서로의 직책과 이름을 소개하는 시간이 끝나고 선생님들은 교장실에서 협약식에 대한 회의를 시작했다.
"여기 있는 부회장이 학교를 소개할 거예요."
선생님의 지목에 나는 서울 친구들에게 학교 안내를 시작했다. 회장이 도망가고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짜 쥐새끼 같은 놈이네. 도망을 가? 잡히기만 해 봐라. 두리번거리면서 회장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만나서 반가워. 무엇을 소개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너희들 학교는 서울에 새로 생긴 학교라고 들었는데 시설은 우리보다 훨씬 좋을 것 같고... 학교시설보다 주변의 풍경이 서울하고 다를 거야."
나는 시골 풍경이나 실컷 보라는말을 하고 소개라고 할 것도 없는 학교를 왔다 갔다 하며 안내했다. 그러는 사이에 내 옆을 따라 걸으면서 내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기분 좋은 친구와 눈이 마주쳤다. 선생님들과 학생회 대표들만 참석한 과학실에서 간단한 협약식과 다과 시간을 갖는 것으로 우리들의 만남은 끝이 났다.
얼마 뒤, 서울중학교에서 우리를 초대했다. 학교에서 준비한 버스를 타고 교장선생님을 포함한 선생님들과 학생회 대표들이 서울로 향했다.
"또 만나서 반가워. 나는 부회장 이진영이라고 해. 오늘은 내가 우리 학교를 소개해 줄게."
내 안내를 경청하던 그 친구였다. 사물함이 있는 교실을 시작으로 과학실, 음악실, 체육관... 서울 친구들이 다니는 학교는 없는 것 빼고 다 있었다. 우리는 시골 쥐가 맞았다.
"운동장이 우리보다 작네."
어디선가 소심하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나는 피식 웃었다.
서울 쥐들이 방문 기념으로 우리 학교에 들고 온 것은 과학실에서 사용하는 비싼 기자재였다. 그런데 막상 우리가 서울에 초대를 받고 가져간 선물은 빗자루였다. 학교에서 선생님들과 시설관리를 하시는 아저씨가 산에서 직접 싸리나무를 베다가 대 빗자루를 만들었다.
"회장은 꼭 가야 한다고 해서 가기는 했는데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그날 그 학교에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며 내가 게네들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니까. 웃기지?"
회장이었던 친구는 40년 전에 싸리 빗자루를 전달하던 썩은 표정의 중학생으로 돌아가 그날을 회상했다.
나는 친구보다 머리가 나빠서인지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아서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 너는 될 놈이었다. 나는 학교 좋다고 생각한 게 끝이었는데. 그때 만난 부회장이랑 나는 절친이야."
친구는 그날의 다짐 대로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고 심리학과 교수가 되었다. 가끔 우리 유치원에 부모 교육을 강사로 초대한다. 그 친구를 볼 때마다서울 쥐를 친구로 사귈 것이 아니라 싸리 빗자루에 각오를 새롭게 야 했는데...하는 생각을 잠깐 한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그때 만난 서울 쥐, 진영이는 여전히 만나면 기분 좋은 친구다. 결혼부터 아이들 학교, 집안 문제까지 돕고 의논하는 현재 진행형 친구다.
서울 쥐들이 다니는 학교를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망향 휴게소에 버스가 멈췄다.화장실에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교장선생님이 마이크를 잡았다.
"여기 휴게소에 유명한 국수가 있는데 한 그릇씩 먹고 출발할 거예요."
갈 때와 다르게 말없이 돌아오는 우리들의 모습이 기가 죽어 보였는지 원래 예정했는지 모르지만, 힘없는 시골 쥐들에게 교장선생님이 가락국수를 쏜다는 안내였다. 집에서 만들어주는 국수만 먹다가 가락국수는 어떤 맛일지 궁금했다. 소면으로 만든 국수보다는 면이 굵었고 칼국수보다는 면이 통통했다. 면발 위에 올려놓은 고명은 지금처럼 어묵이나 튀김을 올리지 않았고 대파와 고춧가루, 김 가루가 약간 뿌려져 있었다. 멸치 육수와 다른 새로운 맛을 선물 받았다. 함께 먹었던 노란 단무지도 우리 엄마가 집에서 만들었던 단무지보다 아삭하고 달콤한 것이 내 입맛에 더 잘 맞았다. 서울 학교만큼이나 새로운 국수 맛을 경험한 나는 싸리 빗자루 때문에 입맛을 잃은 회장 녀석과는 다르게 행복한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만남 이후에 우리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계속 연락했다. 방학이 되면 우리 집에 놀러 오고 나도 진영이네 집에 갔다. 그때마다 내가 가지고 간 것은 우리 밭에서 재배한 채소였다. 호박, 호박잎, 오이, 깻잎, 고추를 골고루 상자에 담았다. 나는 그 상자를 들고 버스와 기차, 지하철을 타고 친구 집에 갔던 기억이 난다. 그동안 한 번도 그 상자가 창피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너무 맛있겠다. 힘들게 여기까지 들고 오르라 고생했네."
소중하게 받아주던 진영이 어머님 때문에 눈치를 채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면 그렇게 가지고 왔는데 에구~시장 가면 이거보다 싱싱한 걸로 천 원이면 다 사는데 힘들게 뭘 가져왔냐고 말하냐?'라고 말하는 동생의 말이 진실일지 모른다.
회장 친구와 나는 같은 경험을 했지만, 다른 감정으로 저장이 되어있다. 각자의 가치대로 우리는 부끄럽지 않게 성장했다. 지나고 나니 싸리 빗자루와 채소 상자가 부끄러울 만한데 나는 터무니없이 당당했다. 지금도 텃밭에서 나오는 채소와 산이나 들에서 채취한 나물을 진짜 친환경이다. 돈 주고 못 사는 거야라고 큰소리치며 주변에 나눠주는 것을 좋아한다.
더 이상 나는 싸리 빗자루와 채소 상자를 받았던 사람들의 진짜 마음이 궁금하지 않다. 내 마음은 행복했다.
별거 아닌 것을 부끄럽기보다 당당하게 내 밀 수 있게 만들어준 것은 내 마음을 가격으로 계산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주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