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연탄불에 볶은 김치맛을 싣고

"친구야, 잘 지내니? 내일 오후에 시간 있어? 나 지금 고향에 내려가고 있거든."

20년 만에 연락이 닿은 친구에게 바로 어제까지 연락한 것처럼 톡을 주고받았다.

"통학하니까 야간자습을 못 한다고 선생님이 자취나 하숙을 하라고 하는데..."

엄마께 선생님의 말씀을 전달했다. 집에 오는 막차를 타려면 야간 자습을 할 수가 없었다. 등교도 새벽 첫차를 타고 학교에 가야 했다. 교실에 도착해서 가방을 풀기도 전에  교장선생님은 우리 교실로 오셔서 나와 같은 버스를 타고 간 친구를 맞이해 주셨다. 추운 날에는  교무실로 데려가셨다. 불이 붙기 시작한 난로 앞에서 우리의 신상을 털기 시작하셨다. 괜찮다고 해도 오라고 하시는 교장선생님을 뿌리치지 못하고 어느새 교무실  난로 앞에서 호구조사 겸 개별 훈화를 들어야 했다.

학교에 늦게 오고 싶어도 버스가 없으니 교장선생님과 나의 만남은 숙명 같았다.

"여러분, 우리 학교에서 제일 부지런한 학생이 누군지 아세요?"

전체 조회시간에  수천 명을 상대로 질문을 던졌다.

"그 학생은 새벽 첫차를 타고 학교에 옵니다. 내가 쪽문을 열어주고 추운 날은... 1학년 8반..."

교장선생님의 훈화를 들으면서 땅바닥을 도화지 삼아 발로 그림을 그리던 나는 잠시 발짓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설마 내 이름까지?'

"호리야, 네 얘기하신다."

친구가 땅바닥에 '헐'이라고 쓰면서 웃었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교장선생님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나의 첫 번째 자취방은 좁은 골목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야 했다. 언덕의 정상쯤에 위치한 초록대문집이었다. 읍내 전체가 내려다 보일 정도로 전망은 좋았지만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내 종아리는 점점 근육질의 닭다리 모양이 되는 것 같았다. 혼자서 자취를 하고 있던  친구방에 내가 추가로 들어가게 되었다. 우리 방은 사랑채 같은 느낌으로 주인집과 분리되어 있었다. 방문을 열고 나오면 나무로 만들어진 표면이 매끄럽지 않은 마루가 있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그곳에 앉아서 책도 보고 음악도 들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작은 방보다 편안함과 해방감을 느끼게 해주는  공간이 되었다.

그런데 평소에는 멀쩡해 보였던 집이 비가 오면 부엌 아궁이에 물이차고  천정에서는 물이 떨어졌다. 장마가 길었던 고1 여름,  여름 내내 부엌에 고인 물을 퍼내고 나서 자취방을 옮겼다.

내가 두 번째로 옮겨 간 자취방은 학교와 더 가까운 곳에 위치한 집이었다. 전세를 살던 상철이네를 빼고  우리 학교 학생들로 총 일곱 가구가 함께 자취를 했다. 주인집은 크고 넓은 마당이 있는 2층집이었다. 마당 오른쪽에 일자로 방이 네 개가 있었다.  주인집 뒤로 돌아가서 2층으로 올라가면 2개의 자취방이 더 있었다. 동네에서 좀 사는 집으로 다른  집에 비해서 크고 깨끗했다. 화장실은 공동이었지만 수도는 각자의 부엌마다 쓸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실내화를 한 손에  들고 저녁밥을 먹기 위해서 작은 개울을 깡충깡충 건너는 여학생들로 가득했다.  야간 자습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서 저녁을 서둘러서 먹고 하교 때와 같은 모습으로  다시 학교로 돌아가던 모습이 지금 생각해도 참 재미있는 장면이다. 다리가 있는 길로 돌아가는 것이 싫어서 모두들 돌다리를 건넜다. 한 손에는 실내화를 들고 건너는 모습이 모두 짜기라도 한 것처럼 똑같았다. 

"얘들아, 밥 먹자."

옥이의 말에 우리는 젓가락을 들고 우르르 모여들었다. 연탄불이 아니라 전기쿠커가 있는 옥이의 방이 주된 조리실이 되었다.

"와, 진짜 맛있다. 다시다 많이 넣었냐?"

어묵과 묵은 김치를 잔뜩 넣고 끓인 김치찌개를 상에 놓고 우리는 흥분했다. 지금 생각해도 침이 고인다. 각자 방은 있었지만 밥도 같이 먹고 수다로 밤을 새우기도 했다. 시험기간에도  눈치 없이 떠들다가 공부 잘하는 친구의 싫은 소리도 들었지만 우리는 친구를 넘어 식구였다.

"내일은 김장 실습인데 집에 갈 거니?"

우리 학교는 재미있는 행사가 있었다. 11월 끝자락쯤에 김장실습이라는 제목으로 하루동안 재량휴업을 했다. 입시를 코앞에 둔 고등학생들에게 김장 실습이라니... 지금 생각하면 참 낭만적인 시절이었다. 그러고 보니 고2까지만 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엄마가 김장은 다음 주에 한다고 오지 말고 공부나 하래."

친구의 말에 나의 눈은 빛났다.

"가자. 거기."

친구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롤러스케이트 못 타는데...."

다른 친구들은 공부를 하러 학교에 가기도 하고 김장을 도와주러 집으로 떠났지만 우리는 롤러장으로 향했다. 롤러장에 가본 적이 없던 우리는 다소 긴장된 모습으로 입장을 했다.

"나는 타 본 적이 없는데?"

친구는 스케이트를 신으면서 걱정스럽게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바퀴가 4개인데 뭘 걱정해."

롤러장에 들어서자 빵빵하게 울려 퍼지는 음악소리는 우리들의 스트레스를 날려주는 것 같았다. 마음은 음악에 맞춰서 앞으로 뒤로 옆으로 타고 싶었지만 직진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손을 한두 번 앞뒤로 젖다가  얼마 못 가서 양팔이 허공을 향해 허우적거렸고 엉덩 방아로 마무리가 되었다. '누가 더 잘 넘어지나?' 시합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자 옥이는 나보다 훨씬 능숙하게 잘 타고 있었다.  직진이 자유로워질 때쯤 롤러장은 다른 학교 아이들도 입장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가자. 애들 많이 온다."

옥이가 나에게 말했다.

"한 바퀴만 더 타고 나가자. 나도 힘들어서 못 타겠다."

나는 여전히 건전지가 떨어지기 직전에 잠깐씩 앞과 뒤로 움직이면서 달리는 장난감 자동차처럼 롤러장을 조심스럽게 돌고 있었다.

"앗!"

앞서가던 옥이가 갑자기 넘어졌다. 옥이를 피해서 스쳐가던 남자아이가 제대로 피해 가지 못하고 옥이를 치고 만 것이다.

옥이는 병원에 가서 깁스를 했다. 한 달은 쓸 수 없는 팔이 되었다. 호기롭게 떠난 아침과는 다르게 우리는 코가 석자는 빠져서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엄마한테는 그냥 넘어졌다고 하면 되는데... 문제는 학교 가서 인데...."

다음날부터 나는 옥이의 보호자가 되었다. 세수는 한 손으로 하지만 밥을 해서 먹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깁스를 풀 때까지 내가 밥을 해서 먹이고  등교와 하교를 책임져야 했다.

"집에 김장하라고 보냈더니 롤라장에서 김장하다가 팔 부러진 사람이 있어."

담임선생님의 말에 모두가 나와 옥이를 쳐다보았다. 누군가 현장에 있던 첩자가  담임선생님께 고한 것이다. 그 뒤로 한 달 가까이 나는 가방 두 개를 들고 돌다리를 건넜다.

"엄마, 오늘 저녁에는 뭐 해줄 거예요?"

옥이가 돌다리를 건너면서 상황극을 시작했다.

"우리 딸 뭐 해줄까? 들기름 넣고 김치 볶아서 파래김에 싸줄까? "

나는 장단을 맞춰서 엄마놀이를 이어갔다.

"좋아 좋아. 엄마 최고."

갑자기 참을 수 없는 허기에 우리는 자취방을 향해 달렸다.

나는 묶은 김치를 쑹덩쑹덩 썰어서 양은 냄비에 담았다. 식용유를 조금 넣고 연탄불에 볶기 시작했다. 김치의 색깔이 변하기 시작할 때 김치 국물을 추가하고 다시다와 집에서 짜온 들기름을 듬뿍 넣어서 더 볶았다. 김치가 지글지글 볶아지면 상을 차렸다. 동그란 밥상 위에 집에서 가져온 멸치볶음과 갓 지은 쌀밥을 올려놓았다. 들기름과 연탄냄새가 섞인 볶은 김치가 상으로 옮겨졌다.

"아직 먹지 말고 잠깐 기다려."

연탄불에 구운 파래김을 세로와 가로로 '접었다. 폈다.'를 몇 번 반복, 여덟 등분으로 만들어서 상에 올려놓았다.

"먹어봐.'

파래 김 위에 흰쌀밥과 볶은 김치를 올려서 친구의 입에 넣어 줬다.

"먹여 주니까 더 맛있다."   

옥이가 깁스를 풀고도 우리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같은 집에 1층과 2층을 바꿔가면서 살 았다.  대학에 가서도 시내로 이사한 옥이네 집에 살면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각자의 학교와 생활에 맞춰서 멀리 떨어져 살면서 연락처를 공유하지 못했다.

그렇게 20년이 훌쩍 넘게 흘렀지만 친구는  항상 내 마음속에 있었다. 연락처를 수소문했고 몇 사람을 거쳐서 전화번호를 알게 되었다.  

"야, 하나도 안 변했다."

긴 시간의 공백이 민망할 만큼 친구가 하나도 어색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