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트레인지타임 Oct 24. 2021

친구. 나이를 초월한

'What are friends for?'


라는 말이 있다. 한국어로 의역한다면 '친구 좋다는 게 뭐야?' 정도로 해석 가능하다. 어떠한 도움을 받은 친구가 고마움을 표시할 때, '친구 아이가'로 답하듯이 이 말로 대답 가능하다. 이 문장의 의미를 조금 더 파헤쳐 본다면, 친구란 '마땅히 도움을 주고받는 게 당연한 존재'가 아닐까 라고 자의 해석을 해본다. 


사람이 상호작용을 통해 깊은 인간관계를 맺는 집단은 크게 두 개로 나뉘어 있다. 전통적 의미에서, 하나는 혈연이라는 필연성으로 엮인 가족이고, 다른 하나는 우정이라는 우연성의 결합으로 엮인 친구가 있다. 우연히 같은 학교를 다니고, 우연히 같은 동아리 소속이고, 우연히 같은 취미를 공유하고, 우연히 성격이 잘 맞는 그런 우연성이 시간을 통해 발전해 친구가 된다. 


친구는 분명 가족과 다르다. 요즘 시대에는 친구 같은 가족을 지향하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세대 차이, 역할 차이, 성격 차이 등, 넘어야 할 산이 한 두 개가 아니다. 비판적인 입장에서, 애초에 친구 같은 가족은 어불성설이다. 자신의 삶 일부를 포기한 채 친구 뒷바라지를 하는 사람은 없다. 친구를 위해서 매일 밥해주는 사람도 없고, 실종된 친구를 찾기 위해 자신의 삶을 다 바치는 사람도 없다. 


친구라는 관계는 우연의 연속으로 만들어지기에, 언제든 우연히 깨질 수 있다. 친구가 되기 싫으면 우린 굳이 친구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 이게 바로 친구의 가장 큰 매력이다. 필터링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신이 원하는 사람만을 친구로 맞이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우리가 친구를 사랑하는 이유다. 때로는 가족에게 못 하는 말들을 할 수 있고, 때로는 가족보다 더 많이 의지할 수 있는 지인을 친구라고 부른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친구의 조건이 조금 많이 다르다. 자신과 잘 맞는 사람이라고 다 친구가 될 수 없다. 다른 조건 하나가 일단 전제되어야만 우린 누군가와 친구가 될 수 있다. 비록 그와 아무리 잘 맞는다 할지라도 말이다.


대학교 방학은 길었고 빈번했다. 시월부터 시작한 학기는 곧 십이월을 맞이했다. 그 달에는 가장 큰 명절이 기다리고 있었다. 듣기만 해도 설레는 크리스마스였다. 런던의 길거리와 상점들은 뭐가 그리도 급한지 십일월 초부터 트리와 레드로 물들어갔다. 학교에서는 약 2주가량의 크리스마스 방학을 선물로 주었고 들뜬 학생들은 홈스윗홈으로 향했다. 그때면 난 내 귀성길에 오르지 못하고 대신 여자친구의 귀성길에 함께 했다. 


그녀의 집은 비행기로 한 시간 조금 넘게 걸리는 곳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였다. 자연경관이 아름답고 U2와 코너 맥그리거의 고향으로 유명한 그곳. 초록색의 아일랜드로 떠났다. 


그녀와 사귄 후 처음 그곳으로 가는 길. 그녀는 나에게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을 소개해줄 생각에 한껏 들떠보였다. 그녀가 말해주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이 어떤 사람일까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마침내 그곳에 도착했고 집 같은 집이 발산하는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다음 날 같은 동네에 사는, 그녀의 오래된 친구를 만나러 집을 나섰다. 잉글랜드와는 다른 듯 비슷한 풍경을 보다 보니 어느새 그 친구의 집 앞이었다. 


그녀는 문을 노크했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문이 열리고 사십 언저리에 있는 듯한 한 남자가 우릴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녀와 그는 잠시 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동안 나는 그녀의 친구가 안 내려오는 걸 보니 아마 집에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나에게 그를 소개했다. 


"내가 얘기했던 바로 내 오래된 동네 친구, 000이야~"


순간 당황했다. 내가 사전에 문득문득 이미지화했던 그 친구의 모습은 이게 아니었다. 이름과 성별은 알고 있었지만, 나이는 묻지도 않았고 물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난 당연히 그녀와 동갑 혹은 또래라고 무의식적으로 전제하고 있었다. 근데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그녀의 친구는 내 막내 삼촌 뻘되는 아저씨였다. 


런던의 길거리를 걷다 보면 눈에 띄는 장면들이 많았다. 그중에 하나가 나이를 초월한 투 샷이었다.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투 샷들. 젊은이와 중년이 나란히 걷는 투 샷. 할머니와 어린아이가 공원에 앉아있는 투 샷. 그들은 항상, 자식과 부모 관계, 할머니와 손자 관계가 아니었다. 그들은 대개 친구 사이이기도 했다. 


우리에게 친구란 동갑이란 단어와 거의 일치한다. 나이가 같아야 친구가 될 수 있다. 아무리 좋아하고 맘에 드는 사람이라도 나이가 같지 않으면 우린 친구가 될 수 없다. 형, 오빠, 언니, 누나, 동생, 아줌마, 아저씨, 선배, 후배... 끝도 없는 호칭들의 하나로 불린다. 그리고 그 호칭에 담긴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서열이 나뉜다.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그들은 나의 친구가 될 수 없다. 동등한 위치에 있는, 그래서 온전히 나다워질 수 있는, 즉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친구는 동갑뿐이다. 동갑이란 범위 안에서 우린 친구를 골라야 한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친구들의 나이가 정확히 기억이 안 난다. 들어본 적 있지만 기억할 필요도 없고 인지할 필요도 없었다. 나보다 훨씬 나이 많은 사람도 있었고 훨씬 적은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과 나 사이에는 못할 질문도 없었고 못할 대답도 없었다. 우린 다 친구니깐. 


지구 상 모든 나라에는 범죄가 있듯 세대 갈등도 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한국의 세대 갈등은 유독 심각하고 그 골이 깊다. 그 연유는 세대 간 소통 부족에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어울리는 친구는 전부다 동갑 내지 또래고 우린 같은 세대 안에서만 경험과 기억을 공유한다. 나이라는 벽은 세대 간의 통로를 굳건히 가로막고 있고 대화는 막혔다. 퍼져나가지 못하고 갇힌 한 세대의 이야기는 흐르지 못한 채 썩어, 그 세대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그리고 우린 그 이데올로기를 통해 다른 세대를 공격하거나 그들로부터 우리를 방어한다. 왜냐면 그들은 우리의 친구가 아니라 높거나 낮은, 서열다툼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린 다 친구가 아니니깐.


이전 06화 Dirty talk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