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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유선생 Aug 13. 2022

꿈, 그 채울 수 없는 갈망 (2)

5월의 푸르름을 만끽하며 다시 사회로 돌아왔다. 3년의 군생활은 내 의식에 전환을 가져왔으며 또한 가정 형편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형님과 동생들이 거의 다 학교를 마치고 안정된 직장을 갖고 있어 대학에 진학하려는 나의 결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처음에는 공무원 생활을 청산하고 공부만 할까 생각도 했지만 주위의 비난이 두려워서 직장 생활과 입시 준비를 병행했다.


진정으로 내가 바라던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기쁨 때문에 직장에서 퇴근하면 잡념 하나 없이 오직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6개월 정도의 짧은 준비 기간밖에 없었지만 정말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합격했다. 오래 전부터 공부하고 싶었던 국문학과였다.


조금은 부끄러운 27살의 늙은 대학생이 되었지만 내 가슴은 열일곱 소년처럼 희망으로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그런 기쁨도 잠시였다. 멀리 떨어져 직장에 다니고 있던 형들로부터 여러 비난을 받아야 했다.


다들 공부는 잘했지만 단 한 명도 대학 진학에 대해 얘기도 꺼내지 못한 형들은 나를 자기 생각만 하는 놈이라고 나무랐다. 더구나 지금 나이로 대학을 졸업하면 연령 제한에 걸려 취업을 할 수 있겠냐고 설득했다. 그리고 지금처럼 공무원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책을 볼수 있고 글도 쓸 수 있지 않냐고 하였다. 옳은 얘기였다.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등록을 하느냐 포기하고 그냥 직장에 눌러 앉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매일 매일 얼마나 번민했는지 모른다. 그건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갈등이라기보다는 더 절박한 생존의 문제에 가까웠다.



오랜 고민 끝에 나는 등록하기로 결심했다. 군 생활 내내 마음 속으로 다지고 다졌던 좁은 세계에서 벗어나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겠다는 결의를 실행할 수 있는 기회는 지금밖에 없다는 강박관념이 나를 약해지지 않도록 채찍질했다. 이미 내게 있어서 문학을 한다는 것은 삶의 의미를 결정짓는 절대적인 가치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나는 문학을 향유하고 창작할 수 없는 그 어떤 생활도 흥미가 없었다.


등록 마감 하루 전, 나는 아버지와 마주 앉았다.


'제 마지막 부탁입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어떻게든 제 힘으로 학비를 해결할 겁니다.'


그렇게 겨우 등록을 마쳤다.


82년 3월 2일 입학식 날이었다. 바라지도 않았지만 축하해주러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잔설이 잔디밭을 하얗게 뒤덮고 있는 캠퍼스, 수많은 대학생 새내기들과 하객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얼어붙은 호수 주변을 홀로 걸었다. 그건 어쩌면 고통스러운 대학 생활 4년을 예고하는 서곡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흐린 하늘 저 편을 바라보는 내 눈망울엔 쓸쓸함을 뛰어넘는 벅찬 희망의 물결이 일렁이고 있었다.


한 학기 동안은 서울에 사는 형님 집에 얹혀 살았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학교 근처에 전세방을 얻어 줘서 동생들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1학년 때는 거의 모든 과목이 교양 강좌라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가슴 뿌듯한 희열은 없었지만 한국 문학계에서 내로라하는 하는 교수님들과의 만남, 문학 써클에서 같은 꿈을 품고 있던 학우들과의 잦은 교류로 오랫동안 목말랐던 문학에 대한 갈증을 풀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궁무진하게 쌓여있는 학교 도서관의 장서들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잊게 해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매일 매일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도서관 서가에 파묻혀서, 또 캠퍼스 잔디밭에서 뒹굴면서 보낸 첫 1년은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게 한 해를 보내고 나자 다시 나는 현실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너무 많이 먹어 버린 내 나이가 환상의 실체를 깨닫고 세상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을 감지하도록 강요했다.


언제까지나 부모님의 도움을 받고 살 수는 없었다. 그리고 평생 동안 문학을 업으로 삼아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도 없었다.


가녀린 새싹들이 다투어 고개를 내밀고 있는 캠퍼스 잔디밭에 홀로 서서 나는 참담한 심정으로 앞으로 내가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점검하고 또 점검해 보았다. 아직까지 작품다운 작품 하나 쓰지 못한 내 능력에 대한 회의와 졸업하면 서른 살이 넘는 나이가 나를 더욱 소심한 상태로 몰아 갔다.


교직 과목을 신청하고 학교 신문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남달리 성적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물론 방학때나 시험 끝나면 문학 공부에 시간을 할애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건 이미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나 있었다. 창작에 전념하고 있던 학우가 문학은 자신의 온몸을 던지는 피어린 작업이어야 한다고 내 미지근한 태도를 공박할 때 잠시 흔들렸지만, 오랜 시간 길들여진 내 의식은 나를 항상 현실 세계로 되돌려 놓곤 했다.


일단 직장을 잡아 삶의 터전을 마련해 놓은 다음에 글을 써 보자고 자신과 타협했다. 글을 쓸 수 있는 여건이 가장 좋은 직장이 바로 교직이었다. 그런데 그 즈음부터 교사 적체 현상이 가중되고 있어 서울 부근에서 근무할 수 있는 학교를 찾는 것이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공부를 열심히 한 결과 3년 반만에 대학을 조기 졸업하고 여기저기 취업을 하기 위해 애를 써 봤지만, 일반 기업은 연령 제한에 걸리고 가을 학기에 교사를 뽑는 학교도 거의 없었다.


반년을 대학 도서관에서 책을 보면서 보냈다.



그리고 떠난 지 4년만에 그렇게도 떠나려고 발버둥쳤던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는 역설적인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곳 영월에 있는 여고의 국어교사로 채용이 된 것이다.


좋아하는 국어 과목을 가르치게 되었다는 만족감과 감수성이 풍부한 여고생들과 풋풋한 정을 나눌 수 있다는 가슴 설레임으로 한 해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냈다.


오랫동안 미뤄왔던 결혼도 하여 생활 기반이 잡혔고, 어설프긴 하지만 작품도 몇 편 썼다. 부모님을 비롯한 여러 형제들도 이제는 만족스러운 눈길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나 억눌려 왔던 떠남에 대한 갈증이 다시 가슴 저 밑바닥에서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건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자유에 대한 갈증과도 같은 것이었다.


수업이 없는 빈 시간이 생기면 학교 뒷편에 있는 작은 동산으로 올라가는 버릇이 생겼다. 거기서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긴 강줄기가 아스라이 사라지는 지점을 멍하니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접어들곤 했다.



생각해보면 내 인생 행로는 다가가기만 하면 또 그만큼 저 산 너머로 멀어져 가는 무지개를 쫓아 뛰어다니던 헛된 발걸음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어느 산봉우리에 올라가 그런 실망의 연속과도 같은 과거에 대해 넋두리를 늘어놓듯 반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생이란 결과보다 과정에 의미가 있다는 믿음 또한 확고하게 살아 있다.


다시 저 멀리 하늘과 맞닿아 있는 산등성이를 바라본다. 이상과 현실이 맞닿아 있는 그곳은 지평선이다.



인간은 현실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 영혼은 꿈꾸는 세계, 이상을 동경할 수밖에 없다. 그 모순된 두 세계를 합치시킬 수 있는 길을 나는 지평선의 논리로 찾고 있다. 땅과 하늘이 맞닿는 지점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그 누가 이상의 세계를 향해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가질 수 있을까? 다가가면 또 그만큼 뒤로 멀어져 갈 그곳이지만 그래도 거기에는 항상 이상과 현실이 맞닿아서 우리에게 빨리 오라고 손짓하고 있다.


나는 내 삶이 끝나는 그날까지 그곳을 향해서 계속해서 걸어갈 것이다. 비록 그곳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



(참고)


이 글의 초고는 1988년 여름에 완성된 것인데, 몇 달 전 오래 묵혀둔 노트를 뒤져보다가 발견했다.


다소 퇴고가 있었지만 내용은 거의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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