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와 아이스크림,

그리고 그 여름

by 이랑

유난히 매미가 시끄럽게 울던, 열여섯의 여름이었다. 찜통처럼 달아오른 날씨에 집 에어컨은 고장 난 지 오래였고, 우리는 더위를 피해 재하네 시골 할머니 댁으로 내려와 있었다.


재하와 나는 마을 어귀 작은 슈퍼에서 아이스크림 열 개를 까만 비닐봉지에 담았다. 양손으로 봉지를 들고 터벅터벅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흐려졌다. 회색빛 구름이 몰려들더니, 이내 쏟아질 듯한 빗줄기가 우리 머리 위로 쏟아졌다. 우리는 비를 피할 곳을 찾다가, 할머니께서 가꾸시는 수박 밭 옆 정자로 뛰어들었다. 나무 기둥 사이로 비가 들이치고 있었지만, 다행히 처마 아래는 아직 빗물에 젖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우리는 그 아래, 나란히 앉았다. 비닐봉지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자, 막 꺼낸 그것엔 얇은 성에가 하얗게 내려앉아 있었다. 조심스레 포장을 벗긴 뒤 쪽쪽 빨아먹었다.


빗소리가 지붕을 두드렸다. 젖은 셔츠는 등에 들러붙었고, 발끝에 닿는 나무 바닥은 약간 차가웠다. 정자 아래, 비는 쉬지 않고 내리고 있었다.


“비, 진짜 갑자기 온다.” 내가 말했다.

”소나기지 뭐, 금방 그칠 거야.“


재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세상이 잠깐 흐려진 것 같았다. 비가 땅을 때리는 소리와, 멀리서 여전히 울고 있는 매미 소리가 이어지고, 그리고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 우리는 말없이, 그냥 거기 앉아 있었다. 지붕 아래서,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올 여름은 정말 사람을 죽일 더위야.”

“그러게나 말이야.”


나무 바닥에 등을 붙이고 누워 있던 재하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깐 나를 바라보더니, 팔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바람 한 점 없는 공기 속에서, 그가 입을 열었다.


“너, 그 소문 들었어?”

“무슨 소문?”

“너랑 나랑 사귄다는 소문. 우리 학교에 퍼졌던데. 못 들었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소문 때문에, 좋아하던 오빠와 끝이 났었다. 친구들 몰래 편지를 주고받고, 집 앞까지 데려다주던 가까운 관계였다. 하지만 그 한마디 소문으로, 아무 예고도 없이 끝나버렸다. 연락은 끊겼고, 얼굴도 다시 보지 못했다. 사흘 동안 울었다. 베개가 축축히 젖을 때까지 방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몰랐을 리가 없다. 소문은 대개, 당사자에게 가장 먼저 닿는 법이니까. 다만 지금은, 매일 내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웃던 재하가 가시처럼 마음에 박혀 있던 그 시기를 조금은 지나 있었다.


나도 천천히 일어나 그를 마주 봤다. 팔짱을 끼고 앉으며, 일부러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들었어. 그런데 나는,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재하는 검은 비닐봉지를 뒤적이다가 아이스크림 하나를 꺼냈다. 껍질을 벗기던 손이 잠깐 멈췄고, 그대로 내게 건넸다. 나는 그걸 받아 들고 입에 물었다. 막 꺼낸 아이스크림은 살짝 녹아 있었고, 흰 얼음물이 손끝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손바닥으로 그 물을 받아냈다.


“맞아.”


나는 그 말을 듣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떨어뜨렸다.


“조심히 먹어.”

“…지금 그 말, 진심이야? 너, 나 좋아한다고?”


그는 바닥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을 집어 들더니, 정자에서 천천히 내려갔다.


“이건 버린다?”


비닐을 꼭 쥔 손이 잠시 허공에 머물렀고, 이내 풀숲을 헤치듯 걸어 나갔다. 그 순간, 나는 무심코 정자의 난간에 몸을 기댄 채,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비는 아직도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굵지도, 약하지도 않게. 추적추적, 옷깃을 적시는 빗줄기 사이로, 재하의 어깨가 젖어갔다. 회색 티셔츠에 얼룩이 번지듯 퍼졌고, 그의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 껍질에서는 물이 줄줄 흘렀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걸어갔다. 비는 쉬지 않고 내렸고, 발끝은 질척한 흙에 자꾸만 미끄러졌다. 몇 걸음쯤 가던, 그의 모습이 점차 흐릿해졌다. 흰 빗줄기 사이로 녹아드는 그림자처럼, 천천히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정자 난간에 팔꿈치를 괴고 앉아, 멀어진 뒷모습을 오래 바라봤다. 젖은 셔츠가 등에 들러붙었고, 나무 바닥은 축축해졌다. 까만 비닐봉지 안의 아이스크림은 모두 녹아 있었고, 봉지 아래로 흘러내린 누런 물이 바닥을 따라 천천히 번져갔다.


그날, 나는 처음이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심장이 그렇게 세게 뛴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맞아.” 그 짧은 대답 하나로, 이상하게 모든 소리가 멈춘 것 같았다. 비 소리도, 매미 울음도, 입 안에 녹아 있던 아이스크림의 단맛도 전부.


나는 그 자리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비가 그치고, 풀잎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질 때까지. 그러다 조용히 일어나 혼자 집으로 걸어갔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 말도 듣지 못했던 것처럼.


그 여름은 그 후로도 오래, 내 안에 남았다. 그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한 순간도, 그 말을 듣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나도.


열여섯의 여름, 나는 그 말을 잠깐 믿었다. 믿는 게 더 쉬웠고, 믿고 싶은 마음이 더 컸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이 마음이 나만의 착각이었다면- 그건 아마,


그 여름이 너무도 선명했기 때문이었을 거다.





선배는 냉동고에서 맥주 캔을 꺼냈다.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천천히 손끝을 타고 흘렀고, 그는 별말 없이 그것을 내게 내밀었다. 내가 받기 전에, 먼저 한 모금 마셨다.


나도 그를 따라 입을 댔다. 차가운 탄산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기억이든 감정이든, 그 잠깐은 잠잠해졌다. 말도, 마음도, 조금 덜 복잡해진 느낌이었다. 이재하에게 다섯 번째로 차인 날에, 그를 기념이라도 하듯, 선배와 마주 앉아 있는 이 순간이 어쩐지 싫지만은 않았다.


“그래서,” 선배가 물었다.

“일 년만 더 좋아할 거야?”


나는 캔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잔에 맺힌 기포가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말없이 식어가는 탄산처럼, 지금의 결심도 금세 미지근해질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요. 좋아하지도 않을 거예요. 그 일 년은… 정리하는 시간이에요.”


숨을 고르듯 말을 이었다. “사실 숫자 자체엔 아무 의미도 없어요. 그냥… 마음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말은 단순했고, 다소 기운이 빠져 있었다. 스스로 믿을 수 있을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꺼내야 했다. 입 밖으로 내야만 겨우 마음 어딘가가 가라앉을 것 같았다. 잊겠다. 아니, 잊는다는 말을 믿겠다.


그를 향해 쏟아온 마음이, 사랑이었는지, 집착이었는지는 이제 확신할 수조차 없었다. 다만 십 년 동안 나는 오직 한 문장을 붙들고 살아왔다. “네가 알게 될 때까지, 기다릴게.” 그 말은 약속이기보다 닻에 가까웠다. 떠나지 못하게 만든 감정의 무게. 나는 그 닻에 묶여, 계절을 늦게 건너야 했다.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감정들이 말 대신 나를 붙잡았고, 그 사소한 문장이 늘 그림자처럼 곁에 머물렀다.


언제까지일까. 봄과 여름이 몇 번이고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됐다. 혼자서는 그 문장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걸. 그래서 ‘일 년’이라고 말했다. 특별한 의미는 없었다. 그저, 그를 천천히 놓아주겠다는 아주 사적인 연습.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기 위한 은밀한 암호처럼.



월, 수,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