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이불속에 몸을 눕히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피곤함은 무거운 코트처럼 내 몸을 덮었지만, 이상하게도 늦잠은 자지 않았다. 재하와의 약속 때문이었을까. 눈을 뜨자마자 몸이 먼저 기억한 듯,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는 한동안 그 빛을 바라보다 서두르지 않고 준비를 마쳤다. 전화벨이 울렸다. 화면에 뜬 '재하'라는 이름을 잠시 바라보다 받지 않았다. 대신 가방을 들고 현관문을 열었다. 바깥공기가 어깨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차 안에서 재하가 창문 너머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렇게 같이 가는 건 오랜만이네. 그렇지?"
차에 올라탄 내게 건네는 그의 말에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차가 출발하자 창밖의 풍경이 천천히 뒤로 밀려났다. 여름의 막바지라 그런지 햇살은 여전히 따가웠지만, 바람의 끝에는 벌써 다음 계절이 묻어 있었다. 유리창에 부딪히던 빛이 희미해지자 재하가 한 손으로 핸들을 돌리며 말했다.
"근처에 새로 생긴 카페 있어. 커피 마시고 갈래?"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 웃었다.
차 안에는 라디오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멜로디는 대화보다 조금 크게 울렸다.
신호등 앞에서 차가 멈췄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고, 재하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오늘 날씨, 좀 이상하지 않아? 덥긴 덥고… 또 금방 비라도 올 것 같고."
나는 창문 너머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으면서도, 먼 곳에 얇은 먹구름이 길게 걸려 있었다.
"그러네. 여름이 끝나려는 날씨 같아."
"맞아. 근데 난 이 계절이 제일 좋아."
재하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끝날 것 같은데, 아직 끝나진 않은. 그런 느낌 있잖아."
나는 순간 그 말에 시선을 돌렸다. 그의 옆얼굴은 햇빛에 눅눅하게 젖어 있었고, 그럼에도 편안해 보였다. 마치 지금 이 시간이 마음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인 것처럼.
"너다운 말이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재하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좋다는 건 그냥 좋은 거니까. 딱히 이유는 없고."
그의 차는 천천히 드라이브스루 입구로 들어섰다.
창문을 내리자, 스피커 너머로 익숙한 인사말이 흘러나왔다.
“어서 오세요, 주문 도와드릴게요.”
그는 잠깐 메뉴판을 훑더니, 고개를 살짝 돌려 나를 한번 보고는 뜨거운 아메리카노 두 잔을 주문했다. 몇 미터 앞으로 차를 옮기자, 결제 창구가 열려 있었다. 카드를 내밀고, 계산을 마친 뒤 다시 천천히 다음 창으로 차를 몰았다. 유리창 너머로 직원이 커피 두 잔을 건넸다. 종이컵 뚜껑 사이로 김이 얇게 피어올랐고, 그 뜨거운 향이 차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내 쪽으로 컵 하나를 내밀었다.
"조심해. 뚜껑이 잘 안 닫힌 것 같아."
나는 컵을 받아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하가 짧게 웃으며 운전대를 돌렸다.
그 말 이후, 차 안에는 잠시 바람 소리만 머물렀다. 그는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손으로 블루투스에 연결해 익숙한 노래를 틀었다.
"참, 어제 미팅은 잘했어?"
재하가 물었다.
"응. 좀 긴장했는데, 생각보다 괜찮았어. 분위기도 좋았고."
대답하고선, 손에 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아직 뜨거웠다. 그는 도로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근데 생각해 보면 좀 그래. 하필 첫 소설이라는 게-"
"왜?"
그의 물음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리 다시 읽어봐도, 그 책은 그냥 그 시절의 남봉우야. 사실 너한테 책 나왔다는 말도 한참 못 했잖아. 네가 그걸 읽는다고 생각하니까, 다 들켜버린 기분이었거든."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어제 감독이 했던 말이 불쑥 떠올랐다.
소설 속 인물들, 하나같이… 살아 있는 사람 같더라고요.
그 말이 지금의 재하와 겹쳐졌다. 운전대를 잡은 그의 손, 빛에 잠긴 옆얼굴, 무심히 흘리는 웃음. 모두 내 글 속에 오래 머물던 장면 같았다. 감독이 말한 '숨결'이라는 게 있다면, 아마 이런 순간일지도 몰랐다.
그가 옆으로 시선을 흘렸다가 짧게 웃었다. 조수석 쪽으로 흘러든 햇빛이 잠깐 그의 얼굴을 가만히 덮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글인데, 몇 년이 지나고서 이제야 연락 온 것도 신기하다."
"왜?"
"나왔을 때부터 이미 좋은 글인 건 변함없는 건데, 이제 와서야 눈에 들어온다는 거잖아."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름 막바지의 공기가 도로 위에 아른거렸다. 말은 가볍게 흘렀지만, 내 속은 묘하게 흔들렸다. 그의 말이 오래전부터 내 안에 숨어 있던 문장을 다시 펼쳐놓는 것 같았다.
"넌 참, 아무렇지도 않게 낯부끄러운 말을 잘한다니까."
내 말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은 그는 고개가 여전히 앞을 향한 채로 기분 좋은 웃음을 짓고는, 왼손으로 볼륨을 살짝 높였다. 라디오에서 재즈 피아노가 흘러나왔다. 나는 그를 흘끔 쳐다보며 물었다.
"근데 너도, 원래는 글 쓰려고 우리 과 온 거 아니었어?"
재하는 옆을 보지 않고, 창밖으로 시선을 둔 채 대답했다.
"아니. 난 그냥 너 따라간 거였는데. 네가 나랑 학교 같이 다니고 싶다고 했잖아."
"내가?"
"응."
그는 기억을 더듬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때 나는, 딱히 하고 싶은 게 없었거든. 근데 네가 같이 학교 다니고 싶다고 해서, 그냥 그 말 듣고 지원했어."
재하는 계속 도로만 바라보고 있었지만, 햇빛이 스쳐 지나가는 그의 얼굴이 잠깐 보였다.
"기억 안 나?"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오래 묵혀둔 무언가를 꺼내는 것 같았다. 그의 말에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문득 떠올랐다.
어린 시절의 여름, 그가 할머니 집에 내려가 있을 때 내가 찾아가 함께 학교에 다니고 떠들고 했던 때가 그립다고 했던 그날의 장면이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재하는 여전히 나를 위한 말을 저런 식으로 아무렇지 않게 건넸다. 익숙한 다정함 속에, 늘 손톱만큼의 간격이 있었다. 내가 가까워질수록 그는 무의식처럼 물러섰고, 그 거리는 항상 똑같았다. 나는 괜히 창밖을 보았다. 나무 사이로 햇살이 흘렀고, 도로 위엔 흔들리는 그림자가 길게 깔렸다. 우리가 주고받던 말들이 풍경의 결에 스며들며, 조금 낯설게 들렸다. 다정함과 거리감의 경계는 말끝이 아니라, 그 사이의 정적에 숨어 있었다.
"근데… 이제야 말하는 건데."
그가 말끝을 흐리며, 도로에 시선을 고정했다. 한 손은 운전대를 쥐고, 다른 손은 무릎 위에서 멈춰 있었다.
"학교 다닐 때, 사실 진짜 힘들었었어. 특히 2학년 올라가고 과제 때문에 글 써야 했던 거 기억나지?" 짧은 숨을 들이쉬었다.
"처음으로 누군가한테 보여줄 글을 써야 하는데… 내장을 다 꺼내 보이는 기분이더라. 결국 제출도 못 했잖아."
말은 담담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게 결코 가벼운 기억이 아니라는 걸.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말투 속에서, 더 선명하게 들리는 고백이 있었다. 늘 그랬다. 그는 그렇게 가장 힘든 것을 아무 일 아닌 듯 덮어버렸다.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도로 위로 길게 그림자가 깔려 있었고, 나무 사이로 햇빛이 흘렀다.
재하는 운전대를 잡은 채, 어딘가 묘한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
"참 여러모로 대단해, 넌. 가끔 보면 아직도 철없는 애 같기도 한데, 그런 글을 써내는 게 말이야."
"사실, 나는 쓰지 않았으면 못 버텼을 거야."
그가 힐끔 내 쪽을 보았다. 피식, 숨 섞인 웃음이 새어 나왔다. 눈가가 살짝 접히며, 그의 표정이 풀렸다. 한 손을 뻗어 식은 커피를 들어 올렸다. 짧게 한 모금 삼킨 뒤, 컵을 다시 운전대 위에 올려두었다. 그 순간, 차 안을 채운 건 말이 아니라, 흐르는 음악과 창밖의 바람뿐이었다. 우리가 주고받은 말들은 오래된 여름의 잔향처럼, 풍경 속에 스며들었다.
창밖으로 익숙한 골목이 나타났고, 도착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다 왔다."
재하가 차를 세우며 말했다.
브레이크가 멈추자, 아주 가벼운 흔들림이 몸을 따라왔다. 문을 열자 눅눅한 흙냄새가 어깨를 스쳤다. 우리는 동시에 차 문을 닫았다. 대문 앞에 쌓인 자갈이 발밑에서 느슨하게 굴러갔다. 낡은 대문은 손잡이를 당기는 순간 낮게 삐걱거렸다.
재하가 먼저 마당 안으로 들어서며 소리쳤다.
"엄마, 할머니! 저희 왔어요."
내겐 익숙한 부름이었지만, 그가 말할 때마다 조금씩 다른 울림이 있었다. 오랫동안 이 집을 드나들며, 엄마 옆에 나란히 앉아 밥을 먹던 그였으니까. 설명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았다.
부엌 쪽 문이 살짝 열리며 엄마가 고개를 내밀었다. 손에 쥔 행주로 앞치마를 닦던 손길이 멈췄다.
"재하 왔구나. 고생했다. 어서 들어와."
마당 끝에서는 할머니가 버선발로 걸어 나오셨다. 흙바닥에 발자국이 빠르게 찍혔다.
"아이고, 우리 봉우랑 재하 왔구나. 어서 들어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다가오는 얼굴에는, 오랜만에 보는 사람에게만 생기는 웃음이 번졌다.
집 안에 들어서자 된장국 냄새가 은은하게 맴돌았다. 나무 바닥이 발끝에서 작게 울렸다.
"먼 길 오느라 배고프지? 어서 앉아. 밥부터 먹자."
목소리는 여전히 따뜻했고, 손끝은 분주했다. 상 위에 그릇이 하나둘 내려앉았다. 엄마는 반찬을 덜어주며 물었다. 요즘 일은 어떤지, 밥은 제때 챙겨 먹는지, 감기는 안 걸렸는지. 재하는 "그럭저럭이요" 하고 짧게 대답했다. 엄마는 그 얼굴을 한 번 더 살펴보다가 말했다. 그래도 좀 피곤해 보인다, 고 했다.
할머니는 멸치볶음을 내 쪽으로 밀어주며 중얼거렸다.
"요즘 젊은 애들은 다 말라서 탈이야." 재하는 웃으며, "할머니, 봉우 많이 먹어요. 저보다 더 먹을걸요" 하고 장난을 쳤다.
나는 젓가락을 내려두며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할머니가 껄껄 웃었고, 엄마는 우리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오랜만에 집 안에 웃음소리가 나니까, 참 좋네."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지만, 공기가 이상하게 가벼웠다. 마치 긴 여름 끝에서 잠깐 숨 돌리는 저녁처럼. 재하는 고개를 숙인 채 밥을 천천히 씹고 있었다. 그의 어깨너머로 흘러내린 빛이 식탁 위에 길게 그림자를 늘어뜨렸다. 나는 물 잔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이 공기, 어릴 적 방 안 냄새와 닮았다. 특별한 말은 없는데, 마음이 조금 느슨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