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 못한 말은 오래 남는다

by 이랑

밤새 책상에 엎드려 있었던 탓에, 목덜미가 뻐근했다. 거울을 보니 눈 밑에 얇은 그림자가 내려앉아 있었다. 커피를 내리자 컵에서 피어오른 김이, 서늘한 공기를 천천히 덮었다. 손바닥에 닿은 온기를 한참 붙들고 있다가, 노트북을 열어 준비해둔 자료들을 다시 훑었다.


“슬픔은 우리를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강하게 만들기도 하잖아.”


내 소설 속 주인공이 했던 말이다. 그 문장을 다시 읽는 순간, 숨이 잠깐 멈췄다. 이야기가 결국 내 삶의 잔상에서 비롯된 거라는 걸, 다시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집을 나섰다. 지하철 안, 창밖으로 아침 햇살이 스며들었다. 기둥에 기대 숨을 가볍게 고르며,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마지막으로 스크롤했다. 머릿속에선 문장이 하나씩 정리되고 있었다.


제작사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땐, 생각보다 훨씬 높고 반듯한 유리 외벽이 눈앞을 가득 채웠다. 로비에 들어서자, 광택이 도는 대리석 바닥이 발소리를 부풀렸다. 안내 데스크에 이름을 적고, 방문증을 목에 걸었다. 작은 카드 한 장이 이상하게 무겁게 느껴졌다. 직원의 안내를 따라 복도를 걸었다. 회의실 문 앞에 섰을 때, 안쪽에서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손잡이를 잡는 순간, 숨이 얕게 들이마셔졌다.


문을 열었을 때, 회의실 안은 이미 조용했다.

긴 테이블을 중심으로 여섯 명쯤이 앉아 있었다. 제작사 소속 기획PD, 플랫폼 담당자, 각색 작가, 조감독, 촬영감독, 그리고 연출. 전부 노트북 앞에 앉아 뭔가를 정리하거나,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손으로 돌리고 있었다.


“남봉우 작가님, 이쪽으로 앉으세요.”


기획PD가 일어서며 자리를 가리켰다. 인사를 건넸지만, 눈인사는 받는 둥 마는 둥, 다들 각자의 메모를 보거나 화면을 넘기고 있었다. 생각보다 환영받는 자리는 아니었다.


“USB 있으시죠? 화면 띄워드릴게요.”

프레젠테이션을 열며, 손이 조금 떨렸다. 그 소리가 정적을 깨듯 USB 포트에 ‘딸깍’ 꽂혔다.


PD가 분위기를 정리하듯 말했다.

“오늘은 작가님이 생각하시는 이 소설의 중심 톤과, 인물들에 대한 접근을 먼저 듣고 싶어요. 그 뒤에 우리 쪽에서의 방향성도 조금 말씀드릴게요.”


화면이 켜지고 회의실 조명이 조금 어두워졌다.

첫 장면으로 바닷가 배경의 씬이 뜨자, 조감독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조명이 눈부셨는지 이마 위로 손을 올렸다가, 다시 팔짱을 꼈다. 플랫폼 쪽 담당자는 아무 말 없이 계속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렸다. 녹음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이 소설은 감정의 결이 중요합니다. 특히 인물들의 ‘침묵하는 순간’이 핵심이고요. 그게 편집 과정에서 리듬이 흐트러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장면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감독이 물었다. 목소리는 낮고 느릿했다. 몇 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천천히 내 쪽을 바라봤다.


“첫 번째 시퀀스, 바닷가 장면에서 인물들이 거의 대사를 하지 않는데, 그 침묵이 불안이나 갈등으로 느껴지게 연출되었으면 합니다. 해설로 처리되면 그 감정이 죽을 것 같아서요.”

“그건 배우의 얼굴로 끌어내야겠네요. 대사 없이도요.”

“맞아요. 얼굴, 손짓, 시선, 그리고 소리 없이 지나가는 시간 자체로.”


회의는 계속 이어졌고, 몇몇 의견은 부딪혔다.

특히 각색 작가가 시나리오 구조상 몇몇 장면은 변경이 불가피하다고 말하면서 약간 공기가 싸해졌다.


“소설과 영상은 다른 매체이니까요. 그렇다고 감정선을 너무 단순화하진 말았으면 해요.”


“그럼 감정을 시각적으로 어떻게 풀지에 대해 더 논의가 필요할 것 같네요.”

감독이 마무리를 지었다.

그 말투엔 약간의 선 긋기가 느껴졌지만, 노골적이지는 않았다.


회의가 끝나갈 무렵, 사람들이 노트북을 덮고 물병을 챙겼다.

그 와중에 감독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나보다 키가 훨씬 컸고, 운동을 했는지 어깨가 넓었다. 햇빛에 조금 탄 피부, 웃을 때마다 잠시 빛이 머무는 눈매, 깊은 보조개. 내게 불쑥 걸어 온 그가 악수를 청하는 그의 손끝을 쳐다 보았다.


“이런 자리에 작가님을 직접 모시고 싶었어요. 보통은 작품만 보고 얘기하니까요.”

맞잡은 그의 손끝이 뜻밖에 뜨거웠다.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이렇게 빨리 제작 미팅까지 할 줄은 몰랐어요.”


그가 내 손을 놓고, 바로 옆 의자에 앉았다.

숨을 고르듯 말이 이어졌다.

“작가님 글을 읽고 나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 인물들은 어딘가에 실제로 살아 있을지도 모르겠다고요. 글자 뒤에 숨결이 느껴진달까.”


나는 잠깐 시선을 피했다.

“그런 표현은 처음이라, 조금 낯설게 들리네요.”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문장이 그냥 활자처럼만 느껴질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가끔은, 읽는 순간 옆에서 누가 조용히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 말이 예상보다 가까운 곳까지 들어왔다. 그가 나를 바라봤고, 나는 물잔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입은 대지 않았다.

“작가님 글이, 그랬습니다.”

말에 꾸밈은 없었지만, 그래서 더 오래 남았다. 나는 괜히 노트북을 켜고 마우스를 움직였다. 아무것도 클릭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까, 조금 안심이 되네요.”


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충분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이야기예요. 다만-”

말이 잠시 끊겼다. 그가 시선을 낮췄다, 다시 들었다.

“이야기를 쓰는 동안, 작가님 자신도 그 안에서 숨을 쉬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작품이란 결국, 마음이 어디에 닿아 있느냐에 달린 거니까요.”


그 말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곧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 눅진하게 남았다. 그 말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누가 먼저 정리하자고 하지 않아도, 회의는 자연스럽게 끝나는 분위기였다. 의자들이 하나둘 밀리는 소리, 노트북을 덮는 소리, 물병 뚜껑을 여는 소리, 짧은 한숨 같은 숨소리가 겹쳐졌다. 테이블 위엔 반쯤 남은 커피잔과 구겨진 종이컵, 숫자를 써다 지운 메모지들이 흐트러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 오가던 웃음은 사라졌지만, 공기 어딘가에 그 여운이 조금 남아 있는 듯했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이 일어나 가방을 챙기고, 인사를 나누며 회의실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가만히 앉은 채로 지켜봤다. 괜히 서둘러 나가고 싶진 않았다. 마지막까지 자리에 남아 있다가, 조용히 가방을 메고 회의실을 나섰다.


가방을 메고 로비로 나서자, 엘리베이터 앞에 그가 서 있었다.

손엔 폴더 하나가 들려 있었고, 옆에는 종이컵이 반쯤 찌그러진 채 놓여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고개를 들었다. 가볍게 눈인사를 주고받았지만, 서로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딩’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우리는 나란히 안으로 들어섰다. 버튼을 누르며 그는 말했다.


“생각보다 긴 회의였죠.”

그가 힐끗 나를 보더니 옆으로 반 걸음 비켜섰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부드럽게 울렸다. 좁은 공간에 둘만 남았다. 그 순간부터, 공기 밀도가 아주 조금 달라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손끝으로 방문증을 천천히 돌렸다.그러고는 곧 아무렇지않는 척 방문증을 목에서 빼고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그는 옆을 보고 있었고, 시선은 내 목 아래 어딘가에서 잠시 멈춘 듯했다.


“오늘, 긴장 많이 하셨죠?”

그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네?”

입술이 조금 마른 느낌이었다. 말이 약간 늦게 나왔다.


“손끝이 계속 떨리시더라고요.”


웃어보이려 했지만, 입꼬리만 가볍게 움직였고 곧 멈췄다.

“회의가 긴장됐다기보단… 감독님이 너무 가까이 있어서요."


말이 끝나자마자, 엘리베이터 안 공기가 아주 잠깐 멈춘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소리도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고, 바닥에 깔린 조용한 진동이 발끝으로 느껴졌다. 괜한 말을 했나, 싶은 생각이 바로 들었다. 너무 솔직했나, 아니면 너무 애매했나. 농담처럼 말했지만, 농담이 되기엔 뭔가가 좀 덜 빠진 느낌이었다.


입 안이 바짝 말라서 침을 삼켰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서 버튼에 박힌 숫자를 봤다. 숫자가 천천히 바뀌고 있었다. 5층. 4층. 3층. 숨이 조금씩 눌리는 기분이었다. 그가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또렷하게 다가왔다. 말은 내 입에서 나왔지만, 그 순간부터는 내가 아니라 그가 붙잡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농담도 아닌 말이 엘리베이터 안에 천천히 떠다녔고, 그 안에서 나는 괜한 말을 꺼낸 것 같아, 조금 불편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보지 못했다. 아니, 보지 않으려 했다. 그게 나한테 더 안전한 방식이었다.


“그런가요? 그럼, 그건 다음에 다시 확인하도록 하죠.”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잠깐 고개를 돌렸다. 짧은 인사 같은 미소였고, 그 말투엔 별다른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늘 이런 식으로 작별을 해왔다는 듯한, 익숙하고 담백한 말투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엘리베이터 안쪽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가 걸음을 옮기자, 형광등 불빛이 천천히 그의 뒷모습을 따라갔다. 그림자가 벽을 스치며 움직였고, 어느 순간 시야에서 사라졌다.


문이 다시 닫혔다. 엘리베이터는 멈추지 않고 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하 버튼은 내가 아까 누른 채였다. 안에는 나 혼자였다. 조용한 기류 속에서, 오늘 있었던 일들이 조용히 되감기듯 떠올랐다. 나는 가방 끈을 어깨 위로 조금 더 당겨 메고, 주머니에 넣었던 방문증을 다시 손에 쥐었다. 무의식적으로 천천히 돌렸다.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 차가운 공기가 들어왔다. 콘크리트 바닥 위로 형광등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고, 그 위를 조심스럽게 지나쳤다. 차 문을 열고 가방을 조수석에 내려놓았다. 운전석에 앉아 문을 닫자, 바깥 소리가 끊겼다.


라디오는 켜지지 않았고, 실내등도 꺼져 있었다.

계기판의 희미한 불빛만이 남아, 작게 깜빡이고 있었다.


나는 시동을 걸지 않은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핸들 위에 손을 얹고, 가만히 있었다. 무언가를 떠올리려고 하지도 않았고, 떠오르는 감정이 있더라도 굳이 붙잡지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 머무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공간에서, 아주 조금씩 오늘 하루가 가라앉았다.






현관문을 닫자, 바깥 공기가 조용히 밀려났다. 신발을 벗고, 가방을 내려놓고, 코트는 걸지 않았다. 잠깐, 집 안의 조도에 눈이 적응하는 사이, 낮게 드리운 정적이 몸 위로 미끄러졌다. 욕실 불을 켜고 들어가 거울 앞에 섰다. 생각보다 멀쩡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런 인상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표정이 지나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오늘 회의실 안에서 느꼈던 긴장감이 떠올랐다. 처음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동시에 쏟아지던 시선들. 형광등 아래, 조심스레 노트북을 켜던 손끝의 떨림. 말을 할 때마다 내 안에서 먼저 반응했던 불안한 호흡들. 어떤 말을 해야 할지보다, 어떻게 보일지가 더 먼저 떠오르던 순간들.


오늘 하루는 거의 내내 그런 식이었다. 단단하게 보이려 애쓰고, 사실은 아무것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끊임없이 조율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모든 긴장이 어디로 갔는지 잘 모르겠다. 회의 내용도, 누가 뭐라 했는지도 희미해졌고, 마지막에 들었던 그 말 하나만이 아주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손을 뻗어 수도를 틀었다. 따뜻한 물이 손등을 따라 흘렀다. 그 물살에 손끝을 잠깐 담가두었다가 천천히 뺐다. 마치 오늘 하루가 그렇게 손에서 흘러내리는 것처럼. 세안제를 짜내 거품을 내며 얼굴을 감쌌다. 눈을 감은 순간, 다시 마지막 그의 말이 되살아났다.


“그럼, 그건 다음에 다시 확인하도록 하죠.”


물소리는 점점 커졌지만, 그 문장은 그보다 더 안쪽에 있었다. 어딘가에서 뚜벅뚜벅 걸어오는 소리처럼, 가까워졌다 멀어지길 반복했다. 무슨 뜻이었을까, 하고 몇 번 생각해보다가 뜻을 묻지 못한 말이란 건 대체로 설명보다 오래 남는다는 걸 다시 떠올렸다. 남겨진 말은, 해석되지 않은 상태로 더 깊이 스며든다. 물을 잠그고, 수건을 들어 얼굴을 닦았다. 천 위로 배어나는 물기의 온도보다, 그 말이 남긴 잔온감이 더 선명했다.


다시 거울을 봤다. 방금 전보다도 더 멀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불을 끄고 욕실 문을 닫는 순간까지, 그 문장은 끝내 지워지지 않았다.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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