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오래된 습관을 떼어내는 일

by 이랑

눈을 떴을 땐, 해가 이미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는 시간이었다. 도대체 몇 시간을 잔 건지 모르겠다. 머리가 띵하고 또 무거워서, 이마를 짚고 일어났다. 침대 옆 테이블 위엔 샌드위치와 주스가 가만히 놓여 있었다. 언제 만들어 놓고 갔는지 모를, 그런 다정한 흔적. 화장실로 가는 길에는 어젯밤 벗어둔 옷이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거울 앞에 서서 이를 닦다, 자꾸 어젯밤이 떠올랐다. 내 얼굴을 닦아주던 손길. 머리칼을 쓸어내리던 움직임. 눈을 맞추던 조용한 얼굴. 고개를 저었다. 벗어나고 싶었는데, 쉽지가 않았다. 입안을 헹구고 옷을 벗은 뒤, 찬물을 틀었다.


물줄기 아래에서 터졌다. 참았던 울음이.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샌드위치 한 접시, 접힌 티슈, 치워진 옷, 그런 사소한 것들이 그가 여전히 여기 있었으면 하는 마음을 건드렸다. 한참을 울고 나서야 샤워를 마쳤고, 젖은 수건을 어깨에 걸친 채 식탁에 앉았다. 샌드위치를 다 먹고, 비워진 접시를 싱크대에 넣었다. 다시 침대로 돌아와 휴대폰을 들었다.


부재중 전화, 네 통. 엄마, 엄마, 재하, 민주.

읽지 않은 메시지가 다섯 개였다.


일어나서 전화보면 엄마한테 전화해줘. – 엄마

아직도 자? – 재하

왜 연락이 안돼? - 민주

봉우야! 연락해줘 – 민주

봉우씨, 제작사 미팅 금요일로 잡혔어요. – 편집장님



확인만 하고,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툭 내려놓았다. 머리를 말린 뒤 옷을 챙겨 입었다. 시계는 저녁 여섯 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고, 창밖엔 주황빛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여름이 끝나간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낮의 열기가 식고 나면, 바람부터 달라졌다.


현관문을 열고 나서자, 골목은 은근한 습기를 품고 있었다. 집 앞 편의점까지는 몇 걸음이면 닿았다. 맥주 두 캔을 사서 봉투에 담았다. 계산대 옆 선풍기가 느리게 돌아가고 있었다.


늘 내가 앉던 편의점 테이블엔 이미 누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혼자 앉은 여자였다. 머리를 묶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아, 저 자리가 제일 마음 편한 곳인데.


한 박자쯤 머뭇거리다, 반대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비닐봉지를 바닥에 내려놓고, 그중 하나를 꺼냈다. 따개를 열자 가볍게 탄산이 터졌고, 뚜껑을 비닐 위에 올려두었다. 첫 모금을 삼키면서, 잠깐 눈을 감았다. 방금 전까지 있었던 방 안의 정적, 샌드위치의 잔향, 그리고 그의 손. 그런 것들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재하가 만들어 놓고 간 샌드위치 덕에, 내가 오늘 처음 먹는 음식이 맥주가 아닌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민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연결되자 그녀의 익숙하고도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봉우야?”

“응. 무슨 일있어?”

“아니, 연락이 너무 없어서 나 차단한 줄 알았잖아.”

목소리 끝이 웃음으로 말려 있었다. 언제나처럼.

“설마.” 나도 따라 웃었다.


“보고 싶다, 남봉우.”


그 말도 언제나처럼.

농담인지 진심인지 모르겠는 말투로.


“나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웃음부터 새어나왔다.


민주는 변함없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쭉 그래왔다. 무슨 일이든 말로 꺼내놓고, 사소한 얘기도 빠뜨리지 않고, 밝은 목소리로 툭툭. 오늘은 회사 사람 얘기였고, 점심에 먹은 쌀국수가 형편없었다는 얘기였고, 다음 주 미팅 날짜가 이상하게 겹쳤다는 얘기였다. 말은 빠르고, 리듬은 가볍고, 중간중간 본인이 먼저 웃었다. 나는 한 손에 맥주를 들고, 한 손으로 전화를 붙잡은 채 테이블에 기대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듣고만 있어도, 마음 어딘가가 조금 덜 복잡해지는 기분이었다.


민주는 늘 그런 식이었다. 혼잣말 같지만 꼭 들어줬으면 하는 얘기를 하고, 농담처럼 던지면서도 진심이 뒷맛에 남는 얘기를 했다. 나는 보통 듣는 쪽이었다. 맞장구를 치거나, 간혹 짧게 웃거나, 별말 없이 듣기만 하기도 했다.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부장이 하루에 자기 이름을 백 번은 넘게 부른다고, 그래서 어느 날은 진짜로 세어봤다고, 그리고 그게 진짜로 무려 일흔네 번이었다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얘기였지만, 그녀는 진지했다.


그걸 그렇게까지 세어본다는 사실이,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어딘가 민주다운 일처럼 느껴졌다. 나는 웃었고, 그녀는 그런 내 반응에 다시 말을 이어갔다. 말은 끝없이 이어질 것처럼 느껴졌지만, 결국은 다 말해버리고 나면 조용해지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말이 길어질수록,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워졌다.

나는 늘 듣는 쪽이고, 그녀는 말하는 쪽이라는 서로의 위치는 거의 변하지 않았지만-


“봉우야, 다음 주에 시간 돼?”

“응, 왜?”

“근데 이제 좀 한가해졌어. 다시 남봉우 괴롭히러 갈 거야.”

“그래, 나 좀 괴롭혀줘라. 요즘 또 재하랑만 붙어 있었더니, 좀 이상해졌거든.”

“엥? 안 돼. 이재하, 그 나쁜 놈.”


그 말에 둘 다 동시에 웃었다.

통화는 길지 않았다. 쌓인 말을 후루룩 털어내고, 안부 몇 마디로 마무리. 늘 그런 식이었다.


“지금은 뭐 해?”

“편의점. 너는?”

“방금 퇴근했어. 집 앞이야.”

“피곤하겠다. 얼른 들어가서 쉬어.”

“응. 주말에 시간 맞추자.”

“좋아. 알겠어.”


전화를 끊고 나서도, 나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웃긴 얘기였고, 나름 기분도 나쁘지 않았는데도, 뭔가가 선명하게 가라앉았다. 가벼워졌다가, 다시 천천히 내려앉는 것. 뭔지 모를 잔여감 같은 거.


맥주 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차가운 액체가 목을 타고 내려가는 느낌이, 묘하게 위로 같았다. 머리를 뒤로 젖히며 한숨을 길게 내뱉았다. 노을은 더 짙어져 있었다. 붉은색이 거의 보랏빛으로 바뀌는 순간. 그 아래에서, 마음도 잠깐은 멈춰 있었다.


"또 술이냐, 너는.”

익숙한 목소리가 고요한 밤공기를 갈랐다. 고개를 돌리자, 재하가 서 있었다.

“또 왜 왔어, 너는.”


그는 별다른 말 없이 앞으로 걸어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나는 맥주 캔을 다시 들어 한 모금 마셨고, 재하도 내 앞에 놓인 캔 하나를 들어 땄다. 맥주가 넘어가는 소리가 그의 목을 타고 조용히 들려왔다.


“술도 안 마시는 이재하가 웬일이야, 먼저 맥주를 마시고.”

“맥주가 술이야?”

“나는 맥주에도 취하던데.”

“맞아. 넌 특히 맥주에 약하긴 하지.”

그가 웃었다.


“이제 일어났지, 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샌드위치 잘 먹었어.”

“진짜 먹었어? 버린 건 아니고?”

“접시까지 싹 비웠다. 그걸 왜 버려.”

“왜 문자 보고 연락은 안 했어?”

“일어나서 씻고, 샌드위치 먹고, 맥주 사서 앉으니까… 네가 눈앞에 있잖아. 답할 새도 없이.”


어느새 맥주가 다 비어 있었다. 재하에게 “잠깐만” 하고 말한 뒤,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 맥주를 더 사왔다. 두 번째 캔을 땄고, 그는 나를 따라 남아있던 캔에 든 맥주를 또 한 모금 마셨다. 밤공기가 느껴질 만큼 선선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소매에 바람이 스쳤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나는 캔을 손 안에서 굴렸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감촉이 유독 신경에 걸렸다. 괜히 반복해서 굴려봤지만,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옆에 앉은 재하의 시선이 느껴졌다. 말은 없었지만, 뭔가 살피는 눈빛이었다. 나는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냥 캔을 손에 쥔 채, 바닥의 그림자만 바라보고 있었다.


“너, 요즘 뭐 힘든 일 있어?”


툭 던진 말이 아니었다. 가볍게 묻는 말투도 아니었다. 평소처럼 웃거나 장난스럽지도 않았다. 오늘따라 어딘가 느슨한 내 모습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그 말에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셨고, 입을 열었다.


“글쎄… 딱히.”


진짜 힘든 건, 그에 대한 내 마음이었다. 말로 꺼내는 순간, 이 조용한 평형이 깨질 것만 같았다. 맥주를 마시는 척하며 시간을 조금 더 벌었다. 금속 캔의 차가운 감촉이 입술을 스쳤다.


재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섣불리 다가서지 않는 방식으로, 내 안을 조심스레 들여다보는 눈빛이었다. 나는 끝내, 가장 말하고 싶던 말을 삼켰다.


“그냥… 요즘 좀 지치는 것 같아. 일도 그렇고, 여러 가지.”


말 끝에 묻어난 숨이 한 번 휘청이고 지나갔다.


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면, 말해.”


목소리는 낮았고, 그 말은 오래 맴돌았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맥주 캔을 들어 올렸다. 그도 따라 들었다.

딱- 금속이 닿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의미 없는 동작 같았지만, 그 짧은 접촉 안에 쌓인 감정이 너무 많아 순간 숨이 엷어졌다. 우리는 다시 말이 없었다.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고, 무언가를 묻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정적 속엔 오래 눌러둔 것들이 서서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텅 빈 캔이 하나, 조심스레 테이블에 내려졌다. 작은 소리가 나무 결을 타고 퍼졌다. 그 진동이 방 안 어딘가에 미세하게 스며들었다. 두 번째 캔은 별다른 망설임 없이 열렸다. 처음보다 더 무심한 손길이었다. 말도 없이 마셨고, 눈빛도 흐릿하게 멀어졌다. 세 번째 캔이 놓일 즈음엔,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바뀌어 있었다. 온기보다는 무게가 먼저 차올랐고, 말보다 침묵이 더 편해지는 시간이었다. 서로를 바라보지 않아도, 어딘가 닿아 있는 감정이 있었다.


말은 없었고, 가벼운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시간이 깊어질수록, 마음도 그만큼 어두워졌다. 이제는 정말, 재하를 놓아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더 버티는 건 서로에게 예의가 아니었다. 아니, 예의라는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그저 오래된 습관을 떼어내는 일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사람이 먼저 일어나고, 다른 사람이 따라가는 순서는 없었다.

밤 공기가 볼을 스쳤다. 차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딱히 느껴지지 않는 온도였다. 감정이 너무 오래 눌린 끝에는, 이런 무감각이 찾아오는 법이다. 말 없이 걷는 길, 발걸음은 다르지만, 속도는 같았다. 어둡고 조용한 골목이 우리를 따라 흘렀다.


누구도 먼저 무언가를 꺼내지 않았다. 그 침묵은 배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끝까지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싶어 하는, 자기방어적인 고요함. 집 앞에 도착했을 때, 그는 잠시 멈췄다.


“들어가라.”


짧은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가볍게 손을 들었다. 익숙한 인사였고, 마지막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등 뒤로 돌아서는 그의 발소리가, 어쩐지 조금 느리게 멀어지는 듯했다.






집에 들어서자, 조명이 먼저 켜졌다. 누군가는 불도 켜지 않은 채 방 안에 앉아 있기도 하지만, 나는 늘 먼저 불을 켰다. 습관처럼, 별다른 망설임 없이. 어둠 속에 오래 있는 건 익숙하지 않았다. 불빛이 방 안을 채우고 나서야, 숨이 조금 더 편안해졌다.


책상 앞에 앉으니, 몸이 그제야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밤은 더 깊어졌고, 창밖으로 도시의 불빛이 멀게 퍼지고 있었다. 안락한 건 없었지만, 방 안은 조용했고, 그 조용함이 오늘은 조금 낯설었다. 달력을 펼쳤다. 여전히 손으로 일정을 적는 게 더 익숙했다. 가장 먼저 보인 건 목요일, '상담, 오후 네 시'라고 적혀 있는 작은 글씨였다. 며칠 전 적어둔 것이었지만, 다시 보는 순간 눈길이 잠시 그 위에 머물렀다.


그 옆에 칸, 금요일에는 '제작사 미팅'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사 년 전, 처음 출간했던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질지도 모른다는 제안을 받았을 때, 나는 별다른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회라는 건 그런 얼굴로 찾아오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로는 자주 망설이게 됐지만, 그때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책상 위에는 인물의 감정선과 장면 구성이 흩어진 노트들 사이에 놓여 있었다.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가끔 멈추게 되는 문장들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은 어딘가 가벼워지기보단, 불분명하게 흩어졌다.


이야기 속 인물들은 자꾸만 재하를 혹은 나를 닮아 있었다. 나는 그 감정들을 조심스럽게 밀어내면서도, 끝내 지우진 못했다. 이야기를 따라가고 있는 건지, 누군가를 피해가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은 무언가를 쫓는 듯했지만, 실은 그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때의 남봉우도, 지금의 나도 여전히, 누군가를 이야기 안에서 지우는 법을 모르고 있는건 마찬가지였다.


종이들을 한 장씩 정리하다 시계를 봤다. 새벽 네 시. 방 안의 조명은 여전히 켜져 있었고, 그 불빛 아래서 나는 아주 조금, 덜 외로웠다. 간단히 허기를 채울 생각에 냉장고를 열었다가, 손에 잡힌 맥주 캔을 잠시 들여다봤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끝에 닿자, 짧은 위로처럼 느껴졌다.


또 술이냐, 남봉우.

속으로 중얼거리며 캔을 손에 쥐었다가, 이내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손끝에 남은 차가움이 천천히 사라졌다.


달력에는 '상담, 오후 네 시'라고 적혀 있었다. 그 시간까지는 아직 몇 시간이 남아 있었다. 벌써 두 캔을 비웠다. 하지만 선생님은 내가 했던 약속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약속이란 원래 그런 거다. 지킬 수 없을 때마다 더 무겁게 남는 것. 하지만 지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지킬 수 있다면,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방 안은 조용했다. 냉장고 모터 소리가 잠시 이어지다 멈췄고, 그 공백 속에서 심장 박동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채 방으로 돌아왔다. 이불을 덮었지만, 몸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창밖에는 어느새 새벽빛이 희미하게 번지고 있었다. 묽은 빛이 커튼 사이로 스며들고, 서늘한 공기가 틈 사이로 들어와 방 안을 천천히 채워왔다.


공기와 침묵이 겹쳐지는 시간.

소리도, 움직임도 없이 흘러가던 그 순간 속에서- 나는 어딘가 모르게, 조금 외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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