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가끔,

미운 마음으로 도착했다

by 이랑

겨우 맥주 두 캔밖에 마시지 않았는데, 선배는 기어코 재하를 불렀다. 나는 벗어두었던 옷을 다시 입고, 가방을 챙겨 들고 소파에 앉았다. 선배의 집은 어둠에 잠긴 채 무거운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찌그러진 맥주 캔이 테이블 위에 흐릿한 그림자를 드리웠고, 그 그림자 속에 내 마음도 잠겨 있었다.


털어냈다고 생각했는데, 딱히 그러지도 못한 모양이다.


“선배.”

“응.”

“오늘 내가 했던 말, 선배는 기억하고 있어요. 혹시 내가 잊어버리면… 다시 나한테 가르쳐줘. 꼭-”

“알겠어.”


맥주 두 캔. 그뿐인데도 머릿속이 몽롱했다. 술 때문인지, 아니면 슬픔 때문인지, 확실히는 알 수 없었다. 몸이 무겁고, 생각은 둔해지고, 마음 어딘가는 물처럼 출렁거렸다.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재하가 도착했다. 벨 소리가 울렸고,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선배도 나를 따라 나왔다. 문이 열리고, 재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말없이 내 어깨에 손을 얹고, 조심스럽게 나를 안아 부축했다. 나는 그의 품에 천천히 기대듯 몸을 맡겼다. 재하와 석호 선배는 짧게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나눴고, 곧바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문이 닫히고, 조용한 기계음만이 좁은 공간을 채웠다.


“얼마나 마셨어?”

“적당히. 기분 좋을 만큼.”

“그래서 기분은?”

“나쁘지 않아.”


그가 낮게 웃었다.

“다행이네.”


매번 거절당하는 너에게, 매번 상처받고 있다는 걸 너는 알고 있을까. 매번 밀어내는 너의 말에, 매번 무너지고 있다는 걸, 그 마음이 결코 단단하지 않다는 걸- 너는, 알까. 매번 튕겨내도 결국 너에게로 돌아가는 내 마음을, 혹시, 가볍다고 여기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그 물음에 끝내 답하지 못했다.


조수석 문이 열리고, 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태웠다. 운전석에 올라, 조용히 안전벨트를 맸다.


“재하야.”

“응?”

“이번 주말에, 할머니 뵈러 갈까?”

“할머니?”

“응, 그냥. 갑자기 보고 싶어 졌어.”


그는 시선을 잠시 떨구었다. 입술을 다문 채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대화는 거기서 멈췄고, 차는 그 후로 아무 말 없이 쉰 숨결처럼 조용히 달렸다. 창밖의 풍경은 자꾸만 지나가는데, 차 안의 시간은 멈춰 있는 듯했다. 이십 분쯤 지났을까. 차가 우리 집 앞에 도착했다. 그는 여느 때처럼 차를 세우고, 내 쪽 문을 먼저 열어주었다. 나는 한 박자 느리게 내렸고, 그는 말없이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가볍지만 선명한 온기였다.


“아버지는?”


불쑥 튀어나온, 예상치 못한 그의 질문에,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있는 병실 문 앞에 서 있는 것조차 숨이 막히는 일이었다. 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마주하는 건- 더 큰 고통이었다. 괜찮아질 거라 믿었던 아빠가, 십 년 가까운 시간을 그렇게 살아온 걸 나는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사실 앞에서, 나는 여전히 멈춰 있었다.





우리에게 그날은, 재하만이 아니라 나 역시 아빠와 언니를 함께 잃은 날이었다. 봉선 언니와 재하네 가족의 장례는 아빠가 도맡아 치르셨다. 검은 정장을 단정히 입고, 식장 안을 묵묵히 오가며 절차를 챙기고, 엄마를 붙들고, 나를 이끌었다. 슬픔은 얼굴 어디에도 없었다. 눈물 한 줄기 없이도, 그 사람의 어깨는 평소보다 훨씬 더 내려와 있었다. 나는 아빠의 옆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봤다. 이마와 눈썹 사이, 짧게 접힌 주름들 속에 말려든 그림자 같은 것. 가장이라는 말이 얼마나 고독한 책임인지를 그 얼굴은 말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의 무게를 혼자 감당하는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두 믿었다. 시간이 지나면, 조금은 괜찮아질 거라고. 엄마는 무너지지 않으려 눈물을 삼켰고, 나는 애써 웃으며 일상을 흉내 냈다. 그리고 그렇게 믿었다. 아빠도, 그 안에서 천천히 나아지고 있을 거라고. 하지만 우리는 그게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 몰랐다.


어느 날 밤, 현관문이 열린 뒤 묘하게 긴 정적이 이어졌다. 나는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거실 한가운데, 낯선 사람 하나가 서 있었다. 아빠였다. 그가 입고 온 셔츠는 한쪽이 바지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고, 넥타이 매듭은 느슨하게 흘러내렸다. 술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날, 문도 제대로 닫지 못한 채 비틀거리며 돌아왔다. 어디서 다쳤는지 이마에는 작은 상처가 있었고, 양손은 허공을 더듬는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그는 신발도 벗지 않은 채 거실 한가운데 멈춰 섰고, 잠시 우리를 본 뒤 그대로 무너졌다. 엎어지듯 주저앉은 그 자리에서 아빠는 울기 시작했다. 그것은 울음이라기보다, 몸 안 어딘가가 찢겨 나가는 소리였다. 숨을 들이쉴 틈도 없이 터져 나오는 흐느낌. 나는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감히 다가갈 수 없었다. 그 사람의 울음은 내 기억보다 더 컸고, 나는 그 소리에 짓눌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결국 방으로 도망쳤다. 문을 닫고, 이불속에 몸을 말았다. 귀를 막았지만, 울음은 벽을 타고 흘러들었다. 그날 밤, 나는 아빠와 함께 울었다. 하지만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그 울음에 나는 끝내 닿지 못했다.


그날 이후, 아빠는 매일 밤 술을 마셨다. 아침이면 평소처럼 양복을 입고 회사에 나갔고, 밤이면 조금 더 무거운 몸으로 돌아왔다. 가끔은 말이 없었고, 가끔은 텅 빈 언니의 방을 서성였다. 불 꺼진 방 안에서, 언니의 책장을 열어 책 한 권을 꺼내는 동작. 책장을 넘기지도 않은 채 무릎 위에 올려둔 채 한참을 앉아 있는 모습. 그렇게 며칠이 흘렀고, 며칠은 몇 달이 되었다. 언젠가부터 아빠는 회사를 그만두었고, 하루 종일 방 안에만 머물렀다. 언니의 침대에 앉아, 언니의 물건을 붙들고, 언니의 이름을 불렀다.


“봉선아.”

“봉선이…… 봉선이 데려와……봉선아……”


이름은 점점 더 작아졌고, 부르는 간격은 점점 더 짧아졌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방 앞에 멈춰 서곤 했다. 하지만 문을 열진 않았다. 그의 슬픔은 너무 거대해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느꼈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이, 그때의 나를 더 깊이 고립시켰다. 시간이 멈춘 듯한 방. 그 안에서 그는 하나의 사람이라기보다, 하나의 잔해에 가까웠다. 움직임도, 기척도, 감정도 마치 오래전에 멈춰버린 사람. 말을 잃은 얼굴은 점점 말의 구조 자체를 잊어갔고, 그가 남긴 흔적은 인간보다 풍경에 가까워졌다.


그 안에 갇힌 그는 누군가를 끊임없이 증오했다. 그게 세상인지, 자신인지도 모른 채. 감당하지 못한 슬픔은 분노가 되었고, 그 분노는 방향을 잃은 채 끝내 자신에게로 향했다. 몸속에서 터져나간 감정은 조용히, 아주 천천히 그를 잠식했다.


언젠가부터 그 방의 문은 늘 잠겨 있었다. 엄마도, 나도, 더는 그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대신, 익숙한 침묵을 통과해 하루를 흘려보냈다. 그저 조용히,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시간만 지나가길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술병 부딪히는 소리도 없었고, 언니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무언가 깨지는 소리도, 속삭임도 없었다. TV 뉴스 앵커의 목소리만이 일정한 리듬으로 거실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 외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처음엔 단지 조용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 침묵은 내가 알던 침묵이 아니었다. 어딘가 달랐다. 늘 들어야 할 소음이, 그 밤엔 없었다.


나는 그 방 앞에서 한참을 멈춰 서 있었다. 손끝이 떨리는 것도 모르고, 숨소리를 들키지 않으려 입을 꾹 다물었다. 조심스레 문손잡이를 눌렀다.


딸깍.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방 안엔 불이 꺼져 있었다. TV 화면에서 흘러나온 푸른빛만 이 벽과 바닥을 일그러뜨리듯 어지럽게 비추고 있었다. 잔잔한 전자음과 뉴스 자막이 화면 위를 지나가고, 그 아래- 아빠가 조용히 누워 있었다. 눈은 감긴 채였고, 입술은 창백했다. 손에 쥔 술병은 거의 비어 있었고, 그 옆엔 뚜껑이 열린 약병 하나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바닥에 눕혀진 듯 놓인 그의 몸은, 너무 조용해서 무언가가 빠져나간 것 같았다.


숨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살아 있는 건지, 이미 지나가버린 건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 자리에 그대로 굳은 채,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다리 아래가 저려오는 것도, 손끝이 차갑게 굳어가는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멎었다. 그 순간만큼은, 생각도 감정도 정지해 있었다. 나는 그 방의 공기처럼, 푸른빛 아래에서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다음에, 이번에는 엄마랑 할머니만.”

“그래.”


그는 짧게 대답하고 나를 부축해 집 안으로 들어왔다. 걸음마다 무게가 있었고, 나는 체중을 거의 다 그의 어깨에 기대고 있었다. 다른 불은 켜지지 않았고, 복도를 지나는 동안 벽지 위로 희미한 불빛이 길게 늘어졌다.


집 안으로 들어가 침대 앞에 이르자 그는 이불을 조심스레 젖혔다. 나는 그가 깔아준 자리에 천천히 몸을 누였다. 그는 이불 끝을 살짝 잡아내려 내 어깨에 덮어주었다. 손끝이 이불과 내 옷깃 사이를 한 번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한숨을 작게 내쉬고, 돌아서려 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재하야, 잠깐만 있다가 가면 안 돼?”


잡힌 손목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당황한 기색은 없었지만, 그 짧은 침묵이 그의 대답 같았다. 망설임 끝에 그는 내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낡은 쿠션 하나만큼의 거리. 입술을 다문 채, 말없이 맞닿은 손끝에서만 체온이 조용히 스며들었다. 그 온기가 방 안의 공기 전체를 아주 천천히 데우고 있었다.


“나 잠들 때까지만, 기다려줘.”

말을 꺼내자 그가 눈길을 돌렸다.

“좀 씻고 자라.”

몸을 일으키려다 말고, 나를 바라봤다. 나는 베개에서 머리를 들어 그와 눈을 맞췄다.

“기다려.”


그는 말없이 화장대 앞으로 걸어가 서랍을 열었다. 얇은 클렌징 티슈 봉지가 손끝에 구겨지며, 바스락하는 소리가 났다. 포장이 열리자, 익숙한 물기 냄새가 방 안에 퍼졌다. 향도, 소리도, 손끝에 닿는 감촉도 모두 익숙했다. 손끝이 이마를 스쳤다. 마치 하루 동안의 모든 불안과 슬픔을 지우려는 것처럼. 광대뼈를 따라, 뺨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다. 티슈가 피부를 닦는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방 안은 고요했고, 창밖에선 겨울바람이 유리창을 한 번, 두드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의 손이 닿는 동안, 숨결은 조금 더 길고 깊어졌다.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렀다. 마치, 이대로 잠들어버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숨을 들이켰다. 말하면, 이 모든 게 깨질까 봐. 목 끝에 걸린 감정을 말로 떠올리는 것이 두려워 나는 침묵을 삼켰다. 그의 손길은 아직 내 얼굴 위에 머물러 있었다. 무언가를 지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쩌면 무언가를 남기기 위한 흔적처럼.


눈꺼풀 아래로 작게 떨리는 감정 하나가 지나갔다. 감긴 눈은, 그가 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숨을 고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순간이 깨질까 봐, 말 한 조각조차 내지 못했다. 그의 손이 마지막으로 입가를 스치고 나서야, 나는 아주 조심스레 눈을 떴다. 그는 조용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표정은 없었고, 눈빛은 잔잔했다. 그러나 그 침묵 너머로, 무언가 작고 분명한 것이 흘러가고 있었다. 말보다 선명한 무언가가.


“석호 형은… 네가 지겹지도 않대?”

“그런가 봐. 아직도 재밌어하던데.”

“그래도 남자 혼자 사는 집에서 술 마시는 건, 좀 그렇지 않아?”

그가 고개를 작게 저었다.

“뭐, 한두 번이야.”


내 말은 가볍게 흘려보냈는데, 그의 눈빛은 그 지점에 멈췄다. 방 안의 공기가, 순간 아주 미세하게 느려졌다. 소매 자락이 내 뺨 근처에서 흔들렸고, 그의 시선이 내 얼굴 어딘가에 걸렸다.


“그거 질투야?”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별 의미 없다는 듯 웃으며, 입꼬리를 올렸지만 어쩐지 그 말끝이 또렷했다. 생각보다 진심에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내가 웃으며 묻자, 재하가 잠깐 눈을 흘겼다. 그러곤 고개를 돌리며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해줘?”


말끝을 살짝 끌며, 장난인 걸 아는 사람처럼. 입꼬리는 장난스럽게 올랐고, 눈동자는 반쯤 좁혀졌다. 딱 봐도 놀리는 얼굴인데, 능청스러운 표정이 어쩐지 진심처럼 보였다. 입술에 걸린 웃음을 꼭 삼키는 척하면서, 실은 다 보이라는 듯한 얼굴.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어이없어서, 또 조금은 웃겨서. 진짜로 웃음이 나왔다.

진짜 너 별로다.”


내가 웃으며 말했을 때,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내 얼굴을 바라봤다. 말은 장난인데, 눈빛이 조금 길게 머물렀다. 그 순간, 숨이 반 박자 늦게 쉬어졌다. 그 웃음도, 그 말투도 익숙한 얼굴에 걸린 낯선 표정 같았다. 숨을 들이쉬는데, 목 뒤가 간질거렸다. 닿을 것도, 멀어질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런 기류 속에서, 그는 조금 더 천천히 움직였을 뿐이다. 클렌징 티슈가 새로 꺼내졌다. 종이의 바스락 거림이 이번엔 더 선명하게 들렸다. 그의 손이 다시 뺨으로 다가왔다. 따뜻한 손바닥의 온도, 아주 미세한 떨림. 눈길이 미간을 스치고, 코끝을 지나, 턱 아래로 흘렀다.


재하의 얼굴엔 여전히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방금 던진 장난이 꽤 마음에 들었던 사람처럼. 입가엔 얄밉게 말려 올라간 곡선이 남아 있었고, 눈빛도 완전히 풀리진 않았다. 나는 그 얼굴을 슬쩍 바라보다가, 눈길을 피했다. 왜인지, 그 웃음이 오래 남아 있다는 게 신경 쓰였다. 웃고 있어서 다행인데, 이상하게 마음은 조용해졌다. 조용하다는 게 뭐였는지도, 그때는 잘 몰랐다. 어쩌면 그 조용함은, 그가 웃고 있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공백이었는지도 모른다. 방 안은 그대로였고, 손끝엔 약간의 물기가 남아 있었다.


“다 됐어.”

그의 손끝이 느릿하게 멀어졌다. 티슈는 조심스레 접혀 침대 옆 테이블에 놓였다. 방 안엔 알코올과 감귤 향이 엷게 섞여 떠 있었고, 그의 손이 지나간 자리엔 피부가 조금 따뜻했다. 그것 말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 마치 한 편의 영화가 끝난 뒤 스크린이 꺼진 것처럼.


“이는 안 닦아?”

“그것도 기다려줄 거야?”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나는 누워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 속에는 붉게 상기된 볼, 젖은 눈동자, 그리고 피로가 가라앉은 이마가 비쳤다. 치약을 짜고 칫솔을 문 순간, 방 안에서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익숙한 멜로디. 내가 좋아하는, 범진의 노래였다.

좋아하는 음악, 고요한 새벽, 그리고 이재하. 사랑하는 것들이 하나둘 내 안에 스며들고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저릿했다. 손끝 닿을 듯 가까운 것들이, 어쩐지 더 멀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방으로 돌아오자,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눈도 돌리지 않고, 묵묵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낮은 음악이 여전히 흐르고 있었지만, 분위기는 고요했다. 침대 옆 스탠드가 연한 빛을 내고 있었고, 창밖에서 스며든 희미한 불빛이 벽을 타고 흘러내렸다. 커튼은 절반쯤 젖혀져 있었고, 바람조차 움직이지 않는 밤이었다. 기척 없는 공기가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우리는 그 안에 나란히 있었다.


“너… 자고 갈래?”

“나 내일 출근. 너 자는 건 보고 갈게. 어서 누워.”

나는 이불 안으로 몸을 뉘었다.

“갈 때, 불 끄지 마. 알지?”

“응, 알아. 혼자 잘 때, 불 끄고 못 자는 거.”


그가 이불 끝을 가만히 덮어주었다. 나는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움직이던 손이 멈췄다.

“있잖아, 재하야.”


목소리는 작았고, 오래 묵은 감정들이 그 안에 얇게 스며 있었다.


“너랑은 같은 공간에 있는데도,

가끔은 네가 너무 멀게 느껴져.”


말이 방 안에 내려앉았다. 스탠드 불빛은 여전히 흐렸고, 그가 앉아 있는 자리의 그림자는 바닥을 따라 길게 늘어져 있었다.


숨을 한 번 고르고, 나는 말을 이었다.

“네 옆에 있어도, 넌 너를 내게 감추는 사람 같아. 네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고, 조용히 선을 그어놓은 사람처럼.”


단어는 조심스러웠고, 목소리는 낮았다. 말보다 마음이 먼저 움직인 밤이었다. 그리고 몇 번이나 삼켜야 했던 문장이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더 사랑하는 쪽일 때마다 자꾸만 더 이기적인 사람이 되는 것 같아. 그래서 내가 널 사랑하는 방식이, 혹시 틀린 건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해. 널 사랑하면서도, 자꾸만 내 방식대로만 사랑하려는 내가, 결국엔 너를 더 멀어지게 하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야.”


말은 다 끝났는데, 마음은 아직 거기 머물러 있었다. 방 안 공기는 조금 더 가라앉았고, 내 말이 잔상처럼 남아 흘렀다. 그는 여전히 거기 있었다.


“오늘처럼, 이렇게 내가 내 감정만 앞세워도, 넌 늘 아무 말 없이 받아주잖아.”


그가 앉아 있는 자리엔 스탠드 불빛이 비스듬히 닿아 있었고, 그 뒤로는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 침묵이, 나를 조용히 쓰다듬는 것도 같고, 가볍게 밀어내는 것도 같았다.


“그래서, 그게 오히려 더 미울 때가 있어.”


말을 하는 나도 웃고 있었다. 말도, 표정도, 웃음도. 전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웃었다.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고, 어딘가 잠긴 듯한 눈동자가 내 쪽을 향하고 있었다. 소리 없이 번지는 표정이었다. 잔잔한 어둠 위에 얇게 번진 물결처럼, 그런 식으로 나를 적셨다.


“그만 조잘대고, 자.”

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알겠어.” 짧게 대답했지만, 입술 끝이 가라앉았다.


“넌 오늘도, 내 이기심을 아무 말 없이 받아줘. 내일 출근이 코앞인데도, 이렇게 붙잡혀 있잖아, 마치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게 너야, 이재하.”


그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가, 다시 나를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


“알고 있어.”


그 말은, 웃음처럼 들렸다. 정말 웃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분명히, 웃고 있었다. 표정은 오래 머물렀고, 눈빛은 가슴 어딘가를 죄었다. 그에게 입을 맞추고 싶었다. 충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말끝에 스치듯 번진 웃음이 내 이성을 무너뜨릴 만큼 다정했으니까. 아니면, 정말로 술에 취했는지도 모르겠다. 그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이 순간만큼은, 모든 전제가 지워진 채,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사이였으면 좋겠다고, 차마 꺼내지 못한 마음을 나는 조용히 접어 두었다. 그를 곁에 둔 채, 긴 숨을 내쉬며 잠에 들었다.



월, 수,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