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시 위엔 껍질 벗긴 감 한 조각과 반쯤 먹다 만 배가 남아 있었고, 차가운 물 잔 옆엔 물방울이 맺혀 천천히 흘러내렸다. 그 자리에서 딱 기분 좋은 정도까지만 이야기를 나눈 뒤, 두 분의 붙잡는 목소리를 끝내 등 뒤에 두고,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현관으로 향했다. 문턱을 밟지 않으려 발끝을 조심했고, 주차장까지는 말없이 걸었다.
"오랜만에 다들 만나니까, 좋았다. 그렇지?"
그가 운전석에 앉으며 안전벨트를 당겼다.
나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고, 식탁 위에서 가져온 냅킨을 주머니에 넣었다.
"응, 나도 그래."
짧은 말이 흘러나왔고, 그 뒤로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는 시동을 걸었다. 엔진이 낮게 떨리며 살아났다. 차 안은 빠르게 따뜻해지기 시작했고, 우리는 한동안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유리에 머리를 기댄 채, 나는 바깥의 불빛들을 따라 눈을 옮겼다.
재하의 입가에는 말없이 스친 미소가 오래 머물렀다. 움직임 없이, 입술 한쪽이 가볍게 올라가 있을 뿐이었다.
"재하야." 내가 불렀다. 그는 고개를 조금 돌렸다. 정면을 보던 시선이 아주 느리게, 옆으로 움직였다.
"우리 정말, 결혼해 버릴까?" 나는 앞을 보며 말했다.
그가 잠시 나를 바라봤다.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핸들 위에 놓인 손가락이 한 번, 움직였다.
"그냥 할머니 말처럼 결혼해 버릴까? 까짓것 연애는 건너뛰고."
그는 창밖을 보며 말했다.
"할머니께서 괜히 하신 말씀이야. 신경 쓰지 마."
"아니, 난 좋은데."
그는 작게 웃었다. 입꼬리 옆으로 얕은 보조개가 생겼고, 그 자리에 그림자가 엷게 지었다. 그림자는 금세 사라졌지만, 그 자리의 온도는 조금 남았다. 장난스럽게 웃던 얼굴이 이상하게도 조용하고 부드러웠다. 차 안은 여전히 조용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그저 같은 공간 안에 잠시 멈춰 앉아 있었다.
이대로 그와 시간을 보내고, 하루를 쌓아가듯 나란히 걷고, 언젠가 결혼식 사진도 남기게 된다면- 딱히 근사하진 않아도, 함께 밥을 먹고, 씻고, 불 끄고 누워 자는, 그런 일들이 당연해지는 사이로 오래 머물 수 있다면, 나는 그 시간을 보고 싶었다. 누구도 울지 않고, 누구도 멀어지지 않는 조용한 저녁. 그와 함께 있는, 텔레비전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거실에서의 같은 밤. 그 시간이 내가 원하는 전부였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붉은 가로등 불빛이 차창 밖을 따라 느리게, 겹겹이 스쳐갔다. 나는 창문을 살짝 내렸다. 약간 무른 바람이 이마와 볼을 가볍게 스쳤다. 불 꺼진 논두렁 사이로 흙냄새가 따라 들어왔고, 그 바람 끝엔 여전히 여름의 끝자락이 걸려 있었다.
"어? 여기 차 좀 세워봐."
그가 말없이 갓길에 차를 붙였다. 멈춘 곳은 할머니의 수박밭 앞이었다. 예전엔 이름처럼 ‘밭’이라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작고 울퉁불퉁한 곳이었는데, 언제부턴가 이 마을에서는 그냥 그 앞을 ‘수박밭’이라 불렀다. 우리는 나란히 차에서 내렸다. 흙길 위로 발소리가 가볍게 울렸다.
익숙한 냄새였다. 풋수박이 잘 익기 직전, 터질 듯 퍼져 있는 향과 오래 마른 흙이 바람에 날리는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정자 옆에 나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고, 기둥엔 우리가 어릴 적 이름을 새겨두고 손바닥으로 문지르던, 그 자국이 그대로였다.
재하가 먼저 정자에 올라가 앉았다. 나는 잠시 서성이다, 한 박자 늦게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대자, 옷감 너머로 묵은 차가움이 스며들었다.
"진짜, 그대로다. 그렇지?"
내가 말을 꺼내자, 재하가 옆을 보며 짧게 웃었다.
"그러게. 하나도 변한 게 없네."
익숙한 것들 속에 다시 앉아 있으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좋았다. 지금처럼,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남아 있다는 게 위로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말없이 웃던 우리들의 시절이 떠올랐다.
내가 나를 덜 숨기던 시간들, 그도 조금은 더 솔직했던 순간들.
우리가 상처받기 전의, 어떤 여름.
나는 그를 보지도 않고, 조용히 말했다.
"기억나? 여기서 네가 나 좋다고 했었는데."
"내가? 설마-"
"맞아. 넌 지금까지 십 년 넘게 아니라고 우기지만, 진짜로 그랬어. 나 좋아한다고."
"그래? 내가 열여섯 살 때 널 좋아했었나?"
"봐봐. 내가 언제라고 말 안 했는데 열여섯 살 때인 줄은 알고 있잖아. 너, 나 좋아했던 거 맞다니까."
우리는 동시에 웃었다. 그 웃음은 정자 위로 가볍게 떠올랐다가, 풀잎 사이를 따라 천천히 밤 속으로 흘러갔다.
"생각해 보면, 내 어린 시절부터 십 대, 이십 대까지 모든 시간이 전부 너였어. 싸우고, 밀고 당기고, 그러면서도 우리는 늘 붙어 있었잖아."
그가 웃으며 눈을 가늘게 찡그렸다. 익숙한 표정이었다. 웃을 때마다 보였던, 나를 향해 웃는 그 눈빛.
"너는 나의 기억이야. 그래서 아마 내 곁에 네가 없다면 내 인생의 어딘가는 텅 비어버리고 말 거야."
말끝이 맺히는 순간, 짧은 바람이 한 번 스쳐 지나갔다. 재하는 고개를 약간 돌렸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감정을 느끼는지, 지금 이 말을 어떻게 듣고 있는 건지- 전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표정 하나 없이, 그저 바람이 스쳐간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용했고, 너무도 조용해서 그 침묵은 마치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 모습이, 말보다 선명하게 다가왔다. 괜찮은 척 애써 보이려는 그 사람 앞에서 자꾸만 내 마음을 꺼내는 내가- 어쩌면 더 짐이 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도무지 떨칠 수가 없었다. 나는 네 앞에 서는 내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지고 있다는 걸,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근데, 앞으로 시작하는 내 삼십 대는, 너로 시작하지 않으려고."
그 말에, 재하의 눈썹이 아주 조금, 거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게 찌푸려졌다. 하지만 시선은 여전히 멀리, 아무것도 없는 어둠의 쪽에 머물러 있었다.
“그렇게 돼버리면, 나중에 네가 없는 나는 진짜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 같아서.”
말끝이 닿자, 여름의 끝자락을 알리는 바람이 짧게 스쳐갔다. 등 뒤의 나무 기둥이 얇게 떨리고, 나뭇잎 몇 장이 바스락거렸다. 그 작은 소리조차 크게 들릴 만큼 주변은 고요했다.
“재하야.”
그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 낮고 또렷한 소리. 그 이름 안에 감정이 젖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눌러 담은 한 음절. 내 목소리는 단단했다. 속으로 열 번쯤 더 다듬고 겨우 꺼낸 말들이었다. 넘기지 못한 페이지처럼, 늘 머리맡에 놓여 있던 말.
“네가 싫어하는 얘기, 딱 한 번만 더 할게.”
그가 고개를 살짝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만약 그날 때문이라면, 정말로 아직도 그날에 머물러 있는 거라면… 네가 굳이 나까지 안고 가지 않아도 돼. 너 혼자서 다른 사람들의 슬픔까지 대신 살아갈 이유는 없잖아.”
말이 끝났지만, 여운은 길었다. 정자 바닥에 스친 내 발목 아래로, 밤바람이 조용히 스며들었다. 나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언니에게는 미안하지만, 난 네가 살아 있어 줘서 고마워. 지난 이십 년 동안, 줄곧.”
그제야, 재하가 눈을 깜빡였다. 잠시 감았던 눈을 다시 떴을 때, 그의 시선은 바닥 어딘가에 조용히 닿아 있었다. 입술이 아주 조금, 무의식적으로 움직였다. 말을 하려다 삼킨 듯한, 짧고 느린 동작. 그게 그의 대답 같았다. 나는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마 위로 내려온 머리카락 한 가닥이 그의 눈가를 스치고 있었지만, 그는 그것조차 치우지 않았다. 마치 지금 이 감정에서 단 한 동작도 흘려보내고 싶지 않다는 듯. 그의 침묵은, 오래 버티던 어떤 마음의 끝자락을 조용히 스치고 있었다.
“이젠 더 이상, 네 인생을 죄책감으로 채우지 말고, 너 자신을 위해 살아줘.”
바람이 다시 한번 스쳐갔고, 정자 기둥 틈으로 스며든 별빛이 재하의 옆얼굴을 아주 옅게 비추었다. 나는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나는… 어떻게 해도 너를 떠나지는 못하겠지만, 널 놓을 거야. 도저히 마음이 줄지 않아서, 이제 너를 사랑하지 않는 방식으로 너를 사랑해 보려고.”
말끝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목이 마른 사람처럼, 입 안에 남은 마지막 물을 쥐어짜듯 말하는 느낌이었다.
“이제는 정말로 이재하의 친구가 돼 보려고. 힘들 때 술 마시자고 불러낼 수 있는 친구. 내 감정들을 네게 모두 뒤집어씌우고, 널 탓하는 그런 남봉우 말고.”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려 했지만, 눈앞이 흐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냥 고개를 돌렸다. 차가운 여름밤의 공기. 긴 말끝에 남겨진, 짧고 오래된 침묵. 숨이 낮게 울렸고, 마음은 더 낮게 가라앉았다. 그 순간, 재하가 입을 열었다.
“봉우야.”
늘 ‘우리’라고 부르던 입에서, 정직하게 내 이름이 나왔다. 어색하지도, 망설이지도 않은 목소리. 물속에서 오래 참고 올라온 호흡처럼, 그 말은 조용히 터져 나왔다. 그 말이 조용한 정자 위의 공기 속을 건너 내게 닿는 사이, 나는 어딘가 가볍게 눌리던 마음 한쪽이 풀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 울지는 않았지만, 눈을 감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을, 조금 더 오래 품고 싶었다. 이름 하나가 이토록 또렷하게 가슴에 남는 건, 그 속에 담긴 마음을 단번에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러자.”
그리고 조용히 웃었다. 어쩌면 아주 짧은 순간, 아주 잠시, 나는 그가 ‘그러지 말자 ‘고 해주길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그게 미련인지, 마지막 기대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근데, 재하야.”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나의 지난 모든 계절이었어. 그래서 나는 너를 사랑했어. 그래서 지금 이 혼란스러운 감정들 다 빼더라도, 넌 여전히 나한테 제일 소중한 사람일 거야. “
그 말은 오래 준비한 문장처럼 들렸다. 나조차도 내 마음을 정리해 가며 골라 담았던 말. 욕심은 모두 지우고, 그에게 꼭 남기고 싶었던 것. 오랜 시간을 함께 걸은 사람에게, 마음 깊숙한 곳의 중심을 처음으로 건네는 순간이었다.
재하는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달빛이 그의 눈동자에 얇게 걸려 있었고, 그 안엔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이 물결처럼 잔잔히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멀어지는 것도, 가까워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어쩐지, 서로의 거리를 아주 조금 더 좁혀주는 것 같았다.
“오늘은, 진짜 한 잔 해도 될까?”
나는 매번 거절당하던 질문을 그에게 했다.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내민 말. 같은 감정을 확인받고 싶은 순간.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짧고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좋아. 그러자.”
우리는 앉은자리를 가볍게 털고 일어섰다. 기둥에 기대던 등이 떨어지고, 나무 바닥이 짧게 삐걱거렸다. 그 소리는 오래된 침묵 하나가 접히는 소리 같았다. 밤공기 속으로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말없이 걷는 그 몇 걸음 사이, 우리는 이 여름날을 그 자리에 천천히 접어두었다.
다시 차에 올라탔다. 문을 닫자 공기가 한 번 낮게 떨렸다. 창밖 풍경이 뒷걸음치듯 지나갔다. 누군가는 이 밤을 다 잊고 떠나겠지만, 나는 오늘을 오래 기억하게 될 거라는 걸 벌써 알고 있었다. 그 밤을 완전히 밀어냈다고 믿었지만, 마음 어딘가에는 여전히 젖어 있었다. 사랑이란 건 빠지는 게 아니라, 잠기는 거니까. 완전히 마르지 않는 감정처럼, 그 밤은 내 안에서 오래도록 스며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