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조금 틀려도, 괜찮았다.

by 이랑

말은 없었지만, 차는 조용한 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도착한 곳은 집에서 멀지 않은 작은 호프집. 익숙한 간판 아래, 희미한 불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가게 문을 여는 순간, 오래된 맥주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약간 눅눅한 바닥, 낮게 흐르는 음악, 테이블 사이를 떠다니는 대화의 잔해들. 한쪽 구석, 벽에 등을 기대고 앉을 수 있는 자리를 골랐다. 우리는 말없이 마주 앉았다.


곧 맥주가 나왔다. 잔을 타고 넘은 거품이 천천히 가라앉고, 그 옆으로 안주 접시가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 우리는 동시에 잔을 들었다. 서로의 잔이 닿는 짧은소리, ‘딱.’ 그 뒤로 아주 잠깐, 아무 말도 없었다. 그리고 첫 모금이 천천히 목을 타고 흘렀다.


“봉우라고 부르기, 어색하지 않아?”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는 잠시 잔을 내려놓고, 투명한 유리 너머로 나를 바라봤다.


“글쎄. 그냥 처음부터 이렇게 불렀어야 했던 게 아닐까 싶어.”

말끝이 낮게 흘렀다. 나는 웃었다.

“아니, 난 좋았어. 네가 그렇게 불러주는 거.”


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다시 잔을 들어 기울이며, 불빛 아래 그의 옆모습이 오랜만에 편안해 보였다.

“다행이네.”


그의 입가에 미세한 미소가 번졌다. 우리는 다시 잔을 맞대었다. 가게 바깥으론 여름밤의 바람이 느리게 지나갔다. 말이 많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저 이 조용한 밤, 함께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오래된 기억처럼 따뜻했다. 마치 어린 시절, 말없이 곁에 앉아 있던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유난히 화창한 날이었다. 하늘은 맑았고, 바람도 적당했다. 그런 날이면 기분도 따라 맑아야 할 텐데, 나는 속이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고작 아홉 살이었다. 하지만 그날 처음으로, ‘외로움’이라는 감정에 이름을 붙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함께 등교하고, 점심을 먹고, 방과 후엔 나란히 집으로 가던 아이들이, 어느새 자기들끼리만 다니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유도, 설명도 없었다. 그저 어느 날부터, 말이 줄었고, 눈길이 멀어졌고, 내 쪽으로 향하던 발걸음들이 조용히 방향을 틀었다. 어깨를 스쳐도 아무 말 없이 지나쳤고, 웃음소리는 가까이 있었지만, 나를 향하진 않았다. 하루, 이틀.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운동장 가장자리의 그림자처럼, 내 자리는 늘 그늘 아래에 있었다. 그리고 한 달이 넘도록, 나는 그 익숙한 외로움 속에 천천히 잠겨 있었다. 어디가 아픈 건 아니었지만, 속이 자꾸만 비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옆 반의 재하가 내 앞자리에 식판을 내려놓고 앉았다. 옆집에 살아서 얼굴만 몇 번 마주친 적은 있었지만, 말을 섞은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그 이상은 없던 사이였다. 아무 말 없이 마주 앉은 그는 숟가락을 들며 식판을 덜덜거리게 했고, 다리를 가만두지 않았다.


“다리 좀 가만히 있을 순 없겠니.”

말이 툭 튀어나왔다. 그는 다리를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밥 먹어.”

나는 고개를 숙이고 숟가락을 들었다. 조금 창피했지만, 이상하게 그 말이 고마웠다.


“내일 너희 집에 갈 거야.”

“네가 우리 집에 왜 와?”

“너 보러 가는 거 아냐. 봉선 누나 보러 가는 거지.”


나는 다시 말없이 밥을 먹었다. 그는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식판을 싹 비웠고, 나 역시 오랜만에 밥을 거의 다 먹었다.


“나 옆 반인 거 알지? 앞으로 밥은 여기서 먹을게.”

“왜?”

“그냥 그러고 싶어서. 매점 갈래? 나는 아직 배가 부르지 않은데.”


그의 텅 빈 식판을 내려다보며 웃음이 났다.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삼켰다. 그때만 해도 그는 나보다 봉선 언니와 더 가까운 사이였다. 집에 몇 번 온 걸 본 적도 있었고, 그래서 이 만남도 언니의 부탁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의 다정함이 어색하면서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참, 이름이 봉우리랬나?”

“아니.” “아, 맞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갔다. 그리고 다음 날 와서는 ‘봉우리-’라고 부르기도 하고, ‘우리야-’라고 부르기도 했다. 나는 결국 이름을 바로잡는 걸 포기했다. 그날 이후로 그는 줄곧 나를 그렇게 불렀다. 그 덕에 학창 시절, 내 별명은 자연스럽게 ‘봉우리’가 되었지만, 그가 그렇게 부를 때마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름이 조금 틀려도, 괜찮았다.





오랜만에 꺼낸 이야기였다. 우리는 동시에 웃었다. 잔 안의 거품은 거의 사라져 있었고, 그는 식은 맥주를 천천히 들이켰다.


“네가 먼저 말을 걸어주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아마 지금까지도 안 친해졌을지도 몰라.”

“봉선이 누나가 시켰어.”

“알고 있었어.”

“처음엔 그랬지만, 나중엔 네가 좋았어.”


그는 미지근해진 잔을 다시 들어 올렸다. 테이블 위로 물방울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난 처음엔 좋았지만, 나중엔 네가 귀찮았지.”


내 말에 그는 맥주를 입에 대다 말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고개를 돌리며 잔이 작게 흔들렸다.

“역시 남봉우야.”


익숙한 말투였다. 오래 지켜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방식. 그래서 더 듣기 좋았다. 다시 잔을 들었다. 재하의 얼굴에도 붉은 기운이 번졌다.


“그래도, 결국 아직 이렇게 마주 앉아 있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러게. 결국 우리는, 이상하게 늘 이 자리에 있잖아.”


그 말에 잠시 웃음이 번졌다가, 잔 위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어릴 적부터 몇 번이고 앉았던 자리. 같은 농담과 같은 침묵을 나누던 자리. 계절이 바뀌고, 해마다 시간이 흘러도 우리 사이엔 늘 이런 밤이 남아 있었다. 나는 잔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는 눈을 좁히며 내 쪽을 바라봤다.

“굳이 정할 필요 있어? 좋은 건, 그냥 좋은 거잖아.”


말끝에 다시 웃음이 번졌다. 테이블 위에는 손도 대지 않은 안주가 남아 있었다. 나는 그를 바라봤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마음이, 어쩌면 있다고 믿고 있었다. 나를 보지 않아도 괜찮았다. 내 시선이 닿는 자리에 그가 있다는 것만으로. 사랑한다는 말은 끝내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도 나는 줄곧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친구로 돌아가는 이 순간에도, 내 마음은 여전히 그를 향해 있었다. 굳이 말로 삼키지 않아도, 충분히 닿을 만큼.





그 아이를 제대로 처음 마주했던 건, 아홉 살 무렵이었다.


“남봉우?”

“응, 내 동생이야. 너랑 같은 학년. 그런데 적응을 잘 못하는 것 같더라고.”

“아, 귀찮은데.”


딱 귀찮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울려야 한다는 말도, 먼저 말을 걸어야 한다는 것도. 그저, 내 하루에 불필요한 일이 하나 더 늘어난 느낌이었다.


“원래 낯은 좀 가려도, 저렇게 방에만 박혀 있는 애는 아니었는데… 좀 걱정돼서. 부탁해, 재하야.”

봉선 누나는 형의 친구였다. 몇 번 우리 집에 온 적이 있었고, 그때마다 나는 방문 앞에서 그녀를 마주쳤다. 긴 생머리, 맑게 하얀 피부. 말을 건넬 때마다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다.


“알겠어.”

내 대답에 그녀는 작게 웃었다. “고마워,” 하고 말하며, 가방끈을 움켜쥔 채 계단을 두 계단씩 올라갔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괜히 얼굴이 뜨거워져 고개를 툭 숙였다. 삼반이라고 했던가. 바로 옆 반인데, 어쩌다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을까. 누나네 집에 놀러 가도, 그 방의 문은 늘 닫혀 있었다. 딱히 의식한 적은 없지만, 그 문 앞을 지날 때면 걸음이 느려졌다. 발끝 아래로 낯선 기척이 스치면, 나는 괜히 숨을 고르곤 했다.




다음 날, 나는 학교에서 삼반 문 앞을 서성였다. 쉬는 시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교실 안에서는 웅성이는 소리와 의자 끄는 소리가 섞여 있었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복도 끝 창문 쪽을 몇 번 오가며, 문 앞을 슬쩍슬쩍 엿봤다. 한참을 기웃거렸지만, 끝내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수업 종이 울리고 복도에 사람이 사라진 뒤에도, 나는 잠깐, 더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사실, 얼굴은 잘 몰랐다. 잠깐 스쳐 본 게 전부였고, 그것도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던 옆모습뿐이었다. 그런데도 쉬는 시간이면 괜히 삼반 근처를 맴돌았고, 지나가는 여자애들 가슴팍에 달린 이름표를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너무 대놓고 쳐다보는 것 같아, 몇 번은 괜히 눈을 피하기도 했다. 글씨가 흐릿하거나, 머리카락에 가려 잘 보이지 않을 땐 모르게 몸을 기울여 이름표를 들여다본 적도 있었다. 스스로도 조금 웃겼지만, 그런 식으로라도 찾고 싶었다.


점심 종이 울렸다.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나가는 소리에 맞춰, 나도 식판을 들고 천천히 줄을 섰다. 서둘러 움직이지 않았다. 어쩐지 마음이 급해지는 게 싫었고, 뭘 찾는지도 모르는 얼굴로 사람들 사이를 천천히 훑었다.


급식소 안은 금방 소란스러워졌다. 식판 부딪히는 소리, 플라스틱 의자가 끌리는 소리, 어딘가에선 웃고, 또 어딘가에선 싸우는 소리. 그 틈에서 나는 조용히 주변을 살폈다.


혹시, 그 애가 있을까. 혼자니까, 어쩌면 맨 구석 같은 데에. 식판을 든 채 몇 번 자리를 돌며 주변을 살폈다. 아는 애들이 손을 흔들며 같이 먹자고 했지만, 나는 어정쩡하게 손만 흔들었고, 눈길은 자꾸 다른 곳을 향했다. 그러다 급식소 안쪽 끝, 작은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는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숙인 채, 밥을 먹고 있었다.


확신은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식판을 들고 그 테이블로 걸어갔다. 식판이 식탁 위에 닿는 소리를, 일부러 조금 크게 냈다. 그 아이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나를 보지 않은 채, 그저 먹던 밥만 묵묵히 입에 넣고 있었다.


잠시 후, 그 애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다리 좀 가만히 있을 순 없겠니?”


무심한 목소리였다. 나는 그제야 떨고 있던 다리를 멈췄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힐끔 쳐다봤다. 그 순간- 봉선 누나와는 전혀 다른 얼굴에 잠시 당황했다. 짧은 머리, 살짝 탄 피부, 축 처진 눈매. 우울한 기색이 얼굴 전체를 덮고 있었다.


누나 동생이 맞는 건가, 싶은 생각이 스쳤다. 목소리는… 조금,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밥 먹어.”

나는 어색하게 말했다. 그 애는 다시 말없이 식판 쪽으로 고개를 떨궜다. 조금 어색한 시간이 흐르고,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일 너희 집에 갈 거야.”

“네가 우리 집엔 왜 와?”

“너 보러 가는 거 아냐. 봉선 누나 보러 가는 거지.”

“…아.”

짧은 대답. 그 아이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나는 국 하나 남기지 않고 식판을 깨끗이 비웠다. 이상하게, 그날따라 밥맛이 좋았다. 그 애는, 밥을 전부 먹지는 않았다. 왜 그게 그렇게 마음에 걸렸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나, 옆 반인 거 알지? 앞으로 밥은 여기서 먹을게.”

“네가 왜?”

“그냥 그러고 싶어서. 매점 갈래? 난 아직 배 안 찼어.”


그녀는 잠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식판을 한 번, 나를 한 번 바라봤다. 그러더니 살짝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웃는 얼굴이 어딘가 낯익었다. 그 모습은 봉선 누나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참, 이름이 봉우리랬나?”

“아니. 봉우.”

“아, 맞다.”


그 이름은 입에 잘 붙지 않았다. 짧은 두 음절이 자꾸만 혀끝에서 미끄러졌고, 무심결에 뱉은 말은 늘 어딘가 조금씩 비껴 있었다. 또 봉선 누나와 자꾸 헷갈렸다. 소리도, 얼굴도, 말투도- 실은 그렇게 닮지 않았는데도. 이름을 몇 번이나 틀리게 부르다가, 어느 순간부터 ‘봉우리’라고 불렀다. 길고, 둥글고, 어딘가 더 익숙한 이름. 나중에야 알게 된 건, 그 애의 이름이 아니라 내가 되뇌고 있었던 쪽이라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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