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딸 파업 13편
직장에서 내 마음 챙기기
우울증을 심하게 앓고 나를 돌보며 살기로 결심했지만, 입사일까지만 해도 그게 마음대로 될지 의문이었다. 워낙 여러 직장을 전전하며 워라밸 없는 삶을 살았던 탓에, 막상 직장에 다니기 시작하면 지키기 어려운 결심이지 않을까 지레 겁부터 먹었다. 다행히 그건 내 기우였다.
정부 사업 관련 계약직으로 올해 봄에 입사해 약 한 달 동안 딱히 지나치게 일을 많이 한 적도, 부당한 처사를 당한 적도 없었다. 그리고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매일 칼퇴근을 고수할 수 있었다. 계약서상 시급을 받게 되어 있으니 그 부분은 누가 뭐래도 지키기 위해 노력 중이다. 또 초반부터 근태 기록과 관련해 내 입장을 명확히 밝힌 것이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한편 계약직이다 보니 주변에서 나를 조심스럽게 대해주었는데, 그게 참 신선했다. 내가 다녔던 직장들은 근로자를 너무 함부로 대했으니까. 심하게 말하면 지금 직장에서 비로소 인간 대접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확실히 내가 스스로에게 많이 관대해졌다는 사실이다. 업무 중 실수가 발생해도 바로 고쳐잡되 나를 몰아세우거나 다그치지 않았다. 다소 자책하게 되더라도 그 기분을 하루 이상 끌고 가지 않았다. 업무뿐만이 아니라 장을 보거나 요리하는 등 일상에서 사소한 실수가 발생해도 이를 통해 배운다는 마음가짐을 갖게 됐다. 그렇게 내 몫을 챙기고 마음을 챙기며 살아가니 여유가 느껴진다.
“꽃이 예뻐 보이는 이유는 내 안에 꽃이 있기 때문이지.”
법정 스님의 말씀 중 하나인데, 나는 김창옥 교수님의 강연을 듣다가 접했다. 종교는 다르지만, 참 와 닿는다. 어쩌면 나는 요즘 내 안의 꽃을 찾아가는 여정 한복판에 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전 직장들에서는 느끼지 못한 점심시간의 여유를 느끼고 있다. 점심시간이 특별히 길지는 않지만, 아침에 싸 간 도시락을 먹으면 약 30분 정도 시간이 남는다. 나는 그 시간에 혼자 공원에 있는 산책로와 공원과 이어진 등산로를 따라 가볍게 걸었다. 유난히 날이 좋았던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비를 머금은 땅에서 초록의 냄새가 올라온다. 초록은 산뜻하게 폐로 스며들어 흙처럼 묵묵한 잔향을 남기고 날숨으로 돌아간다. 숨을 쉴 때마다 걸음이 가벼워진다. 높은 나무들 아래, 흙길은 아직 젖어 있다. 이따금 따사로운 햇빛이 점점이 박혔다.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진 땅에 발자국을 남긴다. 멀리서 혹은 가까이, 잘게 웅성거리는 새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여유롭고 안온한 혼자만의 점심 산책이 달콤했다.
산책을 즐기며 지난날의 나를 떠올렸다. 이전에 워낙 심하게 건강을 해쳤던 탓에 나는 다음 직장은 꼭 낮에 햇빛을 볼 수 있거나 칼퇴근할 수 있는 곳을 바랐다. 너무 간절해서 원하는 직장의 조건을 메모해서 책상에 붙여놓기까지 했었다. 그러길 참 잘했다 싶다. 덕분에 이번 직장에서 직전 직장에서의 고생이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물론 아직 한 달 정도밖에 다니지 않았기에 편하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사람이 모인 곳은 크나 작으나 문제가 있는 법이니 원치 않는 불상사에 휘말릴 수도, 피치 못하게 칼퇴근을 고수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내 마음을 가장 우선시한다면 어느 정도 이 행복감을 오래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