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딸 파업 1편
한겨울의 퇴사
2023년 12월, 직장 상사였던 이와 함께 회사 건물을 나오니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까만 도시를 점점이 수놓은 눈발을 보며 후련하기도 착잡하기도 했다. 내키지 않는 마지막 손 인사를 나누고 지하철역으로 걸었다. 내가 수습 기간 3개월조차 다 채우지 못하고 퇴사한 날이었다.
밤잠을 설치다 벌인 실수
내가 다니던 회사는 광고대행사였고 내 직책은 마케터였다. 광고대행사가 악명 높은 줄 알고 있었지만, 정 안 되면 퇴사하자는 마음으로 입사했다. 나를 믿고 뽑아준 회사에는 미안했지만, 내 나름의 각오였다.
입사한 후 2달, 회사 시스템상 중대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관리하는 업체가 4곳으로 늘어났는데, 실시간 광고 모니터링 때문에 퇴근 후에도 매시간 광고를 확인하고 예산을 조정해야 했다. 다른 마케터에게 듣기로는 이 업무 때문에 자신은 새벽 2시나 3시에 잔다고 했다. 물론 이에 대한 보상은 따로 없었다.
실시간으로 광고비가 지출되니 불안감 때문에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 9시부터 12시까지 졸다가 깨기를 반복했다. 나중에는 새벽 2시부터 4시에 한 시간 간격으로 깨기도 했다. 심지어 휴대폰으로 광고비를 보며 조정해도 이게 맞는 건지 틀린 건지 확신이 부족해서 계속 스트레스를 받았다. 수면 부족으로 점점 판단력이 흐려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던 차 토요일 밤에 예산 조정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지옥이 시작됐다.
혼나기와 울기의 반복이었던 2년 같았던 2주의 지옥
토요일 밤에 벌인 실수를 상사가 발견했는지 다음 날 카톡을 보내왔다. 대표의 카톡 캡처본이 포함되어 있었다. 카톡을 보자마자 견딜 수 없는 압박감에 손이 벌벌 떨리고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이날 회사 상사에게서 일방적인 타박을 들었고 어떤 핑계를 대도 수렁으로 빠질 뿐이다. 도무지 빠져나갈 수 없는 그의 말에 나는 결국, 어떻게든 미루던 퇴사를 결심하게 되었다.
바로 다음 날인 월요일에 퇴사하겠다고 상사에게 말했지만, 그는 한 번 더 생각해보라고 했다. 그렇게 화를 냈으면서 나가라는 게 아니면 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당시에는 우울증 때문에 그의 모든 언행을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나는 다음 날에도 퇴사 의지가 변함없다는 뜻을 밝혔다. 솔직히 이미 회사에서도 직무에서도 마음이 떠나있었다. 매일 아침 교통사고라도 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출근하면서 이백만 원 월급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존중과 공감은 없었다. 물론 내가 너무 힘들었기에 모진 말만 기억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말들에 나는 우는 것 말고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범한 예산 조정 실수 때문에 거래처와의 계약이 파기되거나 하는 사고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언행이 도를 넘는다고 여겼고 화나고 억울했지만, 그때는 참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었다. 그 어떤 배려심도 없고 왜 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말까지 들으며 퇴사까지 2주를 버텨야 했다.
차마 여기 쓸 수 없는 가혹한 말들을 들으며 나의 자존감은 빠르게 무너졌고 화가 났고 눈물 흘리는 시간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직무를 감당할 능력이나 힘이 바닥났고 더는 핑계를 대고 싶지 않았다. 책임감은 증발한 지 오래였고 회사를 나가서 무조건 빨리 이직에 성공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여기보다 더한 곳은 없을 것이라고 믿으며 2주가 지났고, 나는 겨우 퇴사할 수 있었다.
퇴사 후 마주한 의외의 복병
위의 사유로 퇴사 결정에 후회는 없었다. 정말로 더 다녔다간 내가 출퇴근하던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가 몸을 던졌을지도 몰랐으니까. 그러나 퇴사해서 한고비를 넘기니 다른 복병이 우리 집에 있었다. 다름 아닌 우리 엄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