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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차 Jan 10. 2022

나 역사이야기 듣는 거 좋아하네?

feat. 조선왕조실록

역사가 밥 먹여줘?

이해가 안 가는 거 투성이지만 이건 진짜 이해가 안 간다.

차라리 남들처럼 게임을 하던가, 이건 뭐지?

나는 거실에서 역사 인강(입시를 위한 인터넷 강의) 듣는 희한한 남편이랑 산다.

한국사를 좋아하는 건 알겠는데

잠깐 여긴 미국이고 당신은 미국 사람 아닙니까? 왜 그러고 사는 거야 도대체!

인강을 보고 있는 남편을 보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했다.


난 사극에 1도 흥미가 없다.

과거의 이야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런데 최근에 블록체인에 대한 설명을 듣다가

“한마디로 이건 조선왕조실록 같은 거예요,

여기저기 보관했는데 다 불타고 하나 살아남았잖아요,

그러니까 여기저기 보관되니까 안전한 거라고요,“

이걸 들으니까 한방에 이해가 됐다.

아~ 역사라는 게 이래서 매력 있구나 싶었다.


조선은 너무 기록하는 걸 좋아하는 나라였다는데

기록이 너무 많아서 연구할게 많다고 했다.

다른 나라들은 뻥을 치거나 부풀려서 기록을 하는데

조선은 아니라고 한다.

왕의 일기와 신하가 쓴 기록을 비교해서 사실만 다시 기록해 둔 것이 따로 있다고 했다.

"그래서 역사가 밥 먹여줘?"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백두산이 폭발하는 주기가 500년인데

그 주기가 곧 다가오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역사 덕후가 내 남편이다.

그러면 북한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올 거고 엄청난 변화를 겪을 거라고 한다.


1부 1 처제라 다행인 줄 알아

그는 항상 역사이야기를 해주고 싶어 대부분 하루 종일 안달이 나있는데

저녁을 먹는 시간엔 특히 심하다.

그런 이야기를 할 때 눈이 반짝이면서 조그만 콧 평수가 커지곤 하는데

보통사람인 나의 인내심으로 그걸 다 들어주기엔 역부족이다.

“오빠는 한국에서 설민석처럼 역사 강사로 살았어야 행복했는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왜 이런 사람을 미국으로 보내서 쯧쯧. “

오늘도 저녁을 먹다가

자기가 알아낸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나에게 전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시대의 룰을 거부한 모던 걸 나혜석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나는 뒷목을 잡았다.

그 시대에는 남자가 여러 명의 첩을 두는 게 합법 적이었다고 하는데

나혜석은 그걸 거부하고 자기만 사랑해줄 남자를 찾았다.

듣기만 해도 끔찍하다.

여러 명의 첩이 가능했던 야만의 시대,

그게 지금까지 계속되었으면 어땠을까?

남편은 그랬으면 자기는 결혼을 못했을 거라고 한다.

왜? 내가 그 대답이 신선해서 이유를 물었다.

현빈 같은 남자가 5천 명이랑 결혼했을 거라서

보통 남자들은 기회가 평생 안 올 거라 했다.

오히려 남자들에게는 지금 1부 1 처제인 게 다행인 거라며

최재천 교수가 유튜브에서 말했다고 했다.

이런 관점이 너무 신선했다.


다시 나혜석으로 돌아가서

내가 우리 여자들은 이제 모두 나혜석이 될 거라 했다.

“앞으로 여자의 목소리가 더 쌔질 거야.”

“아니지, 더 쌔지는 게 아니라 원래로 돌아가고 있는 거지.”


이 말에 조금 감동받았다.

그래 맞아 원래 남녀가 동등한 게 맞는 거라고!

그런데 내 남편이 저 말을 할 수 있었던 건 역사 덕후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와서 여자의 존재가 억압당했지만

고려시대에는 동등했다는 거다.

물론 역사시간에 저걸 배웠겠지만 난 기억조차 없다.

재산도 아들딸 상관없이 엔 분의 일이었고

결혼하면 여자가 시집을 가는 게 아니라

남자가 처가살이를 했다고 한다.

잠깐만요, 교포 아니세요?

미국 사람이 한국 역사를 어쩜 이렇게 잘 아는지...

시험 때문에 역사를 외우며 살았던 내겐 남편이 저러는 게 너무 신기했다.

주입식 암기식 교육의 희생자였던 우리는 임진왜란이 몇년도에 일어났는지 숫자 외우는게 중요했다. 그런데 지금 그 공부가 내인생에 어떤 연결이 되었을까?

역사를 외워야 했기에 싫었다. 또 싫었던 건

대부분의 역사 속에선 여성은 억압되고

무시되고 불리한 인생을 살았기 때문인데, 동등했던 시절이 있었다니...

오해해서 미안하네.


저스트 라이크 유대인

내가 중간에 적절히 말을 끊지 않으면 밤새고 이야기할 사람이다.

그런데 그날은 내가 진정으로 빠져 들었다.

나 역사 이야기 듣는 거 좋아하네?

갓 지은 밥을 앞에 두고

이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들을 하느라

그게 천천히 식어 무용지물이 되는 순간이,

거창한 여행을 계획하고 떠나는 것보다

어쩌면 내 인생에서 훨씬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오늘도 이방인이라서 외로운 순간 억울한 순간 구질구질한 순간이 종류별로 다 겪었지만

남편이 들려주는 저 역사 이야기 때문에 조금은 견딜만하고 위로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하와이 여행을 갔을 때

관광지니 맛집이니 유명한 곳을 돌아다니는 것보다

밤마다 호텔에서 진주만 습격 영화를 보면서 곁들인

남편표 역사 강의가 훨씬 더 재밌었다.

죽은 전우의 시체를 방패로 삼는 순간이랄지

적을 죽이고 뒤진 가방에서 귀여운 딸의 사진이 나온 순간이랄지

진짜 인간이란 뭔지? 인생이란 뭔지? 같은 게 어렴풋이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남편이 나를 종종

“도덕 선생님 같다.”라고 나를 놀릴 때가 있는데

진짜 그 말 뜻을 알 것 같다.

말 그대로 도덕책처럼 노잼이다.

나 같은 경우“오빠 손 씻어.” 이렇게 잔소리를 반복한다면

남편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 때 역사 레퍼런스를 이용한다.


시작은 늘 퀴즈다.

“현진아 스페인 독감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잖아.

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 유대인은 거의 살아남았어

왜 그런 줄 알아? “

“유대인만 뒤에서 숨어서 비타민 먹은 거 아냐?”

“유대인들은 밥 먹기 전에 손 씻는 습관이 있어서야.”

이런 대화를 주고받고 나서는

 씻자!  아닌 내가 하는 말은 “저스트 라이크 유대인이다. 좋은 스토리 텔러가 우리집에 산다.



<조선왕조실록>처럼 기록해 둬야지

역사는 쓸모없는 거야

저딴 게 뭐가 재밌어하던 내가 역사에 빠져 들었다.

남편이 해주는 역사 이야기는 늘 내 뒤통수를 친다.

조선시대 궁녀들이 동성애가 많았던 이유라든지

예전에 중국이 전 세계에서 잘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든 지.

정말 언빌리버블! 하다.

그런 걸 몰랐으니 중국을 무시하는 무식한 사람이라는 소릴 들었던 걸까?

역사가 쓸모 있는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조선왕조실록>이 내게 주는 메시지는 확실하다.

인생은 유한하고 끝이 난다.

나는 무엇을 남길것인가?

내 인생, 작은 것 하나까지 디테일하게 기록하자.


왕이 말에서 떨어졌을 때 쪽팔리니까 이건 쓰지 말라고 했다는데

그 멘트까지 신하들은 <조선왕조실록>에 세세히 기록해 두었다고 한다.

이런 걸 기록해 줄 사람은 남편뿐인데

이 인간은 일기 쓰는 걸 죽도록 싫어하는 인간이다.

역시 , 내겐 비서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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