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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차 Feb 08. 2022

미국 마트에서 망원시장의 냄새가 난다.

아침에 크로와상 사러가는 인생


얼마 전에 <크로와상 사러 가는 아침>을 읽고

아침에 크로와상을 사러 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럴 수 있다는 거 자체가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아침시간에 여유가 있어야 하고

집 근처에 맛있는 빵집이 있어야 하고

걸어서 갈 튼튼한 두 다리가 있어야 하고

그 일상을 만끽할 마음의 상태가 건강해야 한다.

나는 미국에 살지만 걸어서 뚜레쥬르와 파리바게트에 갈 수 있다.

그건 정말 행운이다. 문제는 아침에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거다.

아침을 럭셔리 하게 보내고 싶다.

빵을 사서 돌아오는 산책길에 그걸 베어 물어보기가 내 최근 로망이다.

그런데 너무 춥다. 따뜻한 봄이 오면 해봐야지 하고 미뤄두고 있다.


에코백 들고 장 보러 가는 인생

아침에 크로와상 사러는 아직 못 가지만 걸어서 장 보러 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여기에서 방점은 '걸어서'다.  에코백 들고 걸을만큼 조금씩 사고 싶다는 뜻이다.

차를 가지고 장을 보러 가면 어느새 냉장고에 처박아두고

날짜가 지나서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니까 내 돈 주고 샀는데 버리는 게 30프로는 되는 것 같다.

미국은 음식쓰레기 분리를 따로 안 하는데 처음엔 몸이 편하다고 착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몸이 편한 것 100배 보다 더 마음이 불편하다.

'아우 이 많은 쓰레기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야?'

마음이 불편하니까 몸도 따라 불편하다.

그래서 내가 추구하는 인생은 에코백 메고 장 보러 가는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내겐 자기만의 마트가 생겼고 어느 순간 깨닫게 됐다.

난 '트레이더 조 없인 못살아'가 됐다.


이방인에겐 자기만의 마트가 필요해

자주 좌절과 허무감에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음 마음이 치솟는데

그런 망가진 기분을 돌보는 가장 최고의 방법이 바로 트레이더 조에 가기가 됐다.

모든 게 내 취향인 그 마트는 나의 정신과이자 미술관이자 놀이공원이자 사우나라는 걸 알게 됐다.

어쩌면 이방인인 내가 이곳에서 살아남는 손쉬운의 생존전략이 됐다.

이걸 몰랐을 땐 남편에게 괜한 살풀이를 하거나

한밤중에 푸드파이터처럼 미친 듯이 뭔가를 입으로 때려 넣는 등

헛짓거리를 하곤 했다.

그게 누군가에게는 파친코나 혹은 맥주집 볼링장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여기서 장 보면서 버릴 건 버리고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다.

고작 마트일 뿐인데, 트레이더 조는 왜 그렇게 특별할까?

첫째, 만지러 간다.

“나 놀러 갔다 올게.” 하고 마트 가는 사람이 바로 나다.

마트 직원들은 나를 싫어하겠지만 과일이나 야채 만지는 걸 좋아한다.

내가 먹을 레몬은 내손으로 고른다.

물론 아기 다루듯 애지중지다.

토마토의 탱탱한 얼굴을 훑고 아보카도는 쿡쿡 찔러본다.

생글거리는 것들과 스킨십하면 응어리진 기분이 사르르 풀린다.

요즘은 블랙베리 알갱이 만지는 것에 꽂혔다.

바나나를 진열하는 직원 뒷모습을 보면서

눈치 보지 않고 공식적으로 실컷 만질 수 그 사람이 부러웠다.

둘째, 꽃구경하는 사람을 구경한다.

미국은 대부분 마트에서 꽃을 파는데

그래서인지 특별한 날이 아니라 밥먹듯이 일상적으로 꽃을 즐긴다.

꽃구경하는 사람들 중에 바쁜 사람은 없다.

모두가 느긋하게 꽃향기를 맡는다.

꽃구경도 좋지만 꽃을 즐기는 사람구경은 더 좋다.

트레이더 조에 입장권이 없어서 다행이다.

있었다 해도 나는 돈 주고도 매일 가서 이 풍경을 만끽할 인간이다.


셋째, 손편지가 있다.

망원시장에 가면 박스를 북 찢어 뒤에 쓰여있는 가격 손글씨가 있다.

그 글씨의 크기나 글자체를 보면 왠지 주인의 성격이 짐작된다.

그런데 여긴 분명 미국 전역에 있는 체인점 마트인데

가격이나 설명이 손 글씨로 되어 있다.

모든 게 대량으로 이뤄지는 곳에서 이런 갬성이라니!

이 많은걸 어떻게 유지하는지 궁금해진다.

이걸 지켜나가는 트레이더조만의 정신이 좋다.

고작 마트에 갔을 뿐인데 손 편지를 받은 느낌이랄까?

넷째, 망해도 괜찮다.

코스트코 같은 경우 대용량이라 한번 잘못 사면 진짜 망하는 건데

여긴 대부분이 작은 단위로 포장되어 있어서 좋다.

그래서 얼마든지 망할 준비가 되어있다.

딥이나 소스 같은 것은 특히나 망설여지는데

소량포장 시스템이 잘되어 있어 호기심이 드는 건 무조건 도전이다.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이번엔 칩에 찍어 먹는 살사와 콜리 플라워 후므스를 산다.

다섯, 미술관에선 볼 수 없는 현대미술이 있다.

어디서 본 듯한 패키징이 없다. 여기서만 살 수 있는 시그니쳐다.

각자 자기주장이 강한 귀여움을 가졌는데 정말 예뻐서 사게 된다.

대부분의 톤 앤 매너가 명랑만화의 속에서 튀어나온 느낌이다.

집에 커피콩이 넘쳐흘러도

새로 나온 커피콩 포장의 디자인에 홀려 사게 된다.

먹는 것만 사는 게 아니라 그 포장이 주는 색감 촉감 패턴 등

그 모든 것을 경험하게 된다.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갖고 싶어서 산다.

내겐 그냥 두고 보고 싶은 예술작품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초콜릿이나 사탕, 핸드크림 같은 건 정말 선물하기도 좋다.

이 자체가 미술관에 가지 않아도 즐길 수 있는 현대미술이다.

여섯, 카트의 만남이 설렌다.

내 카트와 누군가의 카트가 스칠 때 또 다른 무언가가 만들어진다.

마트에서 물건을 사는 것보다 사람들의 카트 구경을 좋아한다.

각자의 라이프스타일이 담긴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다.

인터넷에 별표로 매겨진 평점 대신 사람들의 카트를 보며 따라 산다.

오늘따라 포도가 많이 눈에 띄면 그게 신선하다는 거다.

다채로운 카트를 보면서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에 눈길이 가기도 한다.

'앗 저거 한번 마셔보고 싶은데?' 하고

누군가의 카트를 보고 진저에일을 따라 샀는데

가끔은 또 누군가가 내 카트를 보고

"그 푸실리 파스타 어디 있어요?" 하고 물어보기도 한다.

장바구니 따라 하기를 하면서 괜히 모르는 사람들과도 깊은 연결감이 든다.

그러고 나면 인스타에서 받는 하트의 개수,

내 하루가 고작 그걸로 점수 매겨지는 씁쓸한 기분

내 마음이 그걸로 수치화되는 듯한 공허한 느낌이 싹 사라진다.

바로 내 눈앞의 세계가 즐겁게 공유되고 공감받고 있다.


일곱, 직원들이 행복하다는 티가 난다.

내 생각엔 가장 계산대 처리 속도가 느린 마트가 여기일 거다.

캐셔들이 모두 수다쟁이인데 요구르트 하나를 사도 그 제품에 대한 찬양이 길다.

“나도 이것만 먹어, 처음엔 너무 셔서 놀랐다가 나중엔 이 맛에 중독되더라고. “

여기서 일하는 게 즐겁다는 게 온몸으로 느껴진다.

유니폼은 또 얼마나 이쁜지! 훔치고 싶을 정도다! 

이곳 사장을 만날 일은 없지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대충은 알 것 같다.

이제는 어플만 깔면 계산 없이 자동으로 결제가 되는 세상이다.

그런데 왜 비효율적이고 쓸데없이 사람이냐고?

다른 곳이 모두 인공지능이니 뭐니 다 바뀌더라도

이곳만은 끝까지 사람의 손으로 결제될 것 같다.

문제가 생기면 무전기로 상사를 부르는 대신 종을 치는 곳이다.

모두 트레이더 조 팬들이 우르르 몰려와 일하고 있는 것 같다.


여덟, 멋진 이웃과 살고 있는 기분이 든다.

미국에서 계산할 때 기부하겠냐고 물어볼 때가 있는데

마트에서도 가능하다.

크게 우리 동네 기부금이 작년 얼마였다고 쓰여 있다.

왠지 뭘 대단한 건 하지 않았지만

이런 멋진 사람들과 이 동네에 같이 살아가고 있다는 자부심이 든다.

다음엔 나도 이 도네이션에 끼고 싶다.

아홉, 언제나 신제품이 날 놀라게 한다.

매번 신제품이 속출한다. 그건 시도를 많이 한다는 거다.

‘뭘 생각하고 앉아있어? 그냥 해보는 거지’ 이런 느낌이다.

한국의 보리차나 호떡, 갈비도 있다.

그런데 치명적인 건 너무 맛있다는 거다.

근사한 레스토랑에 가지 않아도 집에서 외식을 하는 기분이다.

도대체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정말 완벽하다.

기회가 있다면 이걸 만든 사람한테 90도로 인사하고 싶을 정도다.


특히 보리차는 카페인과 설탕이 없는 건강음료로

콜라의 나라가 반해버릴 수 밖에 없었다.

트조의 보리차는 전북고창과 땅끝마을 해남산의 보리로 만들어 진다고 한다.

미국마트에서도 k문화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여실히 느껴진다.


장보는 게 좋지만 여백의 미는 더 좋아

요상하게 트레이더조에서 장을 보면

내가 나의 일상을 단단히 돌보는 느낌이 든다.

한국에선 지나치게 편리하게 마켓 컬리의 노예로 살았다.

핸드폰으로 주문하면 새벽에 집 앞으로 놔준다.

그 포장을 뜯고 버리는 것에 지쳤던 것도 몰랐다.

그래서 몰랐던 걸까? 나 장보는 거 좋아했구나?

그런데 이런 나의 기쁨을 뺏는 시엄마가 싫다.

올 때마다 냉장고며 팬트리가 미어터지게 채워놓고 가신다.

계란이 있는데 예비 계란을 사둬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난 조금 부족하게 두고 떨어질 때 아차 하고 달려가고 싶은 사람이다.

시엄마가 골라오는 사과는 특별히 맛있어 천국이다.

그런데 너무 많이 사와서 그 끝물엔 그런 지옥이 없다.

시엄마도 여백의 미를 사랑하게 되면 좋겠다.


오늘 하루만큼은 잘 살았다는 분명한 감촉

만약 누군가가 미국으로 여행을 온다면

나는 미국 마트 체인점 <트레이더 조>를 추천하고 싶다.

유명하고 대단한 미술관 박물관보다 멋진 생생한 일상예술을 즐길 수 있다.

그건 내가 서울에 놀러 오는 외국인에게 망원시장을 추천하는 것과 비슷한 이유다.

나 역시 여기서 여행하는 듯한 기분으로 장을 보고 있다.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

왠지 설명할 길 없는 생기를 입고 돌아오는 데

오늘 하루만큼은  살았네 그런 느낌이 든다.

단 하나 망원시장과 다른게 있다면 덤으로 끼워주는 '정'이 없다는 거다.

계란 한판을 사면 하나를 끼워주는 귀여움은, 오직 망원 시장에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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