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관심을 처음 받던 날
여섯 살 때 나는 처음으로 수를 백까지 셌다. 할머니를 따라서 논에 물을 대러 갔을 때다. 다섯 마지기 남짓한 논은 우리 집안의 쌀을 대는 유일한 논이었다. 논둑에는 큰 플라타너스가 한 그루 있었고, 그 나무 아래 웅덩이가 있어 비가 내리지 않을 때는 그 웅덩이에서 물을 퍼서 논으로 보내곤 했다. 할머니는 기다란 나무 자루가 달린 바가지를 가지고 물을 푸러 갈 때 나를 대동했다. 누군가에게 돌봄을 받아야 하는 나이라 할머니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다녔다. 할머니의 친정이든 들이든 어디든지 할머니는 나를 앞세우고 다니셨다. 질경이가 지천으로 깔리고 그령풀이 자라고 있어 사람들의 발자국 따라 생긴 좁은 길을 따라 논에 가서 할머니가 바가지로 물을 퍼 올릴 때마다 나는 바가지 수를 세는 것이 일이었다. 내 수 세기 공부는 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제 경험으로 터득됐다.
내가 수를 백까지 센 것은 할머니에게 크나큰 자랑거리였다. 요즘 아이들은 서너 살만 되어도 수를 세고 숫자 쓰기를 배운다. 조기교육이라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던 시골에서 여섯 살 계집애가 ‘가르쳐 준 사람도 없는데 혼자서 백까지 세었다.’는 이야기는 집에서도 동네에서도 자랑거리였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엄마 아버지의 관심을 받았다. 내 기억으로는 그렇다.
한글도 마찬가지였다. 먹고살기 바쁜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어깨너머로 한글을 깨쳤다. 세 살 터울인 언니가 새 학기가 되면 교과서를 받아와 달력으로 책을 싸는 것을 무척 부러워했던 나는 언니가 숙제하는 것을 지켜보며 한글을 깨쳤다.
두 번째로 부모님의 관심을 받았던 기억은 초등학교 입학식 때다. 거즈 손수건과 옷핀으로 고정된 네모난 이름표를 가슴에 단 아이들이 운동장에 줄지어 담임선생님 발표를 기다렸다. 당시에는 인접한 동네 아이들이 한 반이 되었고, 나는 1학년 2반이었다. 입학식을 기다리는 아이들에게 운동장 바닥에 이름을 쓰라는 과제가 떨어졌다. 3월이라 제법 쌀쌀한 날씨임에도 나는 손가락으로 흙바닥에 내 이름을 써 내려갔다. 자기 이름을 쓰지 못하는 아이들이 태반이었는데 망설임 없이 이름을 쓰는 내 모습을 보고 엄마는 어깨가 으쓱했다고 종종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나는 다른 형제자매보다 아버지의 관심을 많이 받았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아버지는 내가 시험지를 받아오면 벽에 붙여 놓고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자랑하셨다. 나는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뛰어나게 공부를 잘하는 아이도 아니었고, 매번 100점을 맞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오빠나 언니들이 받아오던 성적보다는 좋았던 거 같다. 아버지가 친척들이나 동네 사람들에게 자랑하시는 모습을 보며 나는 은연중에 아버지께 자랑거리를 만들어 드려야 한다, 칭찬을 받으려면 무엇인가 잘해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새기며 자란 거 같다.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나는 아버지에게 자랑스러운 딸이 되는 게 삶의 목표였다는 걸 알게 됐다. 청소도 허투루 하지 않고 깨끗하게 열심히, 밭일도 언니들보다 이랑을 앞서 나가 맨 앞으로 나가면서 열심히 했다. 할머니는 외출 후 집으로 돌아오시면 나에게 하얀 고무신을 닦게 하셨다. 칭찬만 해 주면 뭐든지 하는 말 잘 듣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내가 일곱 살 나던 해부터 아버지는 땅콩 농사를 지으셨다. 매년 겨울이면 마루에 꽉 차도록 땅콩 부대를 쌓아놓고 다음 해에 심을 땅콩 씨를 준비해야 했다. 집에는 날마다 사람들이 모여 안방에서 땅콩을 깠다. 땅콩의 코를 잡고 엄지와 검지로 눌러 땅콩이 깨지지 않도록 까는 일은 쉽지 않았다. 매일 엄지손가락이 찢어지기도 하고 얼얼하게 아팠다. 나는 손가락이 아픈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누구보다 열심히, 많이 깠다. ‘우리 딸이 제일 많이 깠다’는 아버지의 칭찬은 나를 춤추게 했던 거다.
자랑스러운 아버지의 딸로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면서 나는 늘 전력 질주하는 경주마였다. 부모에게 의지하고, 부모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부모님의 울타리 안에서 사랑을 받으며 자연스럽게 사는 삶이 아니었다. 무엇인가 잘하는 게 있어야 관심을 받을 수 있다는 무언의 압박이 내 안에 자라고 있었다. 내가 잘하는 게 있으면 아버지가 살아가는 데 힘이 될 거라는 생각이 내 몸에 새겨졌다.
내가 하는 일에서는 반드시 성과를 내야만 누군가의 관심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잠식당하면서도 그런 사실조차 몰랐다. 힘들다는 생각도 못 했지만 힘들 때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스스로 해내야 한다는 독립심과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책임감으로 똘똘 뭉쳐 살았다. 독립심과 책임감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과도하게 힘을 쓰며 사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일까. 나는 아버지와 화해하지 못한 채 아버지의 죽음을 맞았다.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동네 아저씨가 운전하는 오토바이 뒷자리에 타고 마을회관으로 놀러 가는 길에 달려오는 자동차에 사고를 당했다. 머리를 크게 다쳐서 수술을 받았으나 끝내 깨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한창 의료 파업이 있던 시기라 대형 병원에서 수술받지 못해서 돌아가셨다는 생각이 아직도 나에게는 크게 자리하고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나는 울고불고 난리를 쳤으나 아버지의 죽음이 슬퍼서였는지, 분노 때문이었는지 알지 못했다.
등록금을 일등으로 내도록 신권으로 준비해 주셨던 아버지였지만 늘 빚과 싸우는 모습을 감지해서 맘이 편치 않았고, 불안은 가중되었다. 나는 물질적으로는 넉넉한 생활을 했으나 늘 정신적인 빈곤감에 시달렸다. 말년에는 여러 가지 지병으로 엄마를 힘들게 하는 것이 싫었고, 내가 시골집에 갈 때마다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도 싫었다. 내가 더 견디기 어려웠던 이유는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아버지의 평판이었다. 내 형제들은 물론 아버지 형제, 친척들, 동네 사람들, 하다못해 우리 집 밭일을 하러 왔던 사람들조차 아버지는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왜 나에게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지 않는 것일까. 이성적으로는 나에게도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서 자리한 아버지는 짜증이 많고, 엄마에게 힘든 노동과 집안일을 다 시키고, 가난을 대물림한 아버지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