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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서 Sep 07. 2024

하늘 풍경

책이 스승이다

“자네는 초등학교 때 부모님께서 어떤 책을 사주셨나?”     


소나무 숲 모래 위에서 모닥불이 타오르고, 까만 하늘에 별들이 총총 박혀 빛나던 밤, 현대문학을 담당하시던 교수님이 내게 물으셨다. 대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설화 채집 모둠에 속해 학술답사를 갔던 첫 날 이었다. 나는 매우 당황했다. 부모님이 책을? 교과서도 아니고 참고서도 아닌 책을? 당연히 부모님이 사주셨을 거라는 전제하에 하는 질문이 나에게는 참으로 생경했다. 교수님의 질문이 시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등록금 대주는 것도 어려운 시골 살림을 몰라도 너무 모르시네.’라는 생각을 꿀꺽 삼켰다.      


“초등학교 때 부모님께서 책을 사준 적 없으세요.” 


내 딴에는 당당하게 대답한다고 했는데 어쩐지 머쓱하고 조금 부끄러웠다.    

  

어릴 때 우리집에는 아래쪽 귀퉁이가 불에 탄 『춘향뎐』이 굴러다녔을 뿐 특별히 읽을만한 책이 없었다. 할아버지가 읽으셨던 책이라고 했다. 내가 집에서 읽을 수 있는 책은 『새농민』 잡지였고, 농민신문에 연재되는 만화나 소설, 낱말 맞추기를 하면서 텍스트를 접했다. 주로 밤마다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와 언니들이 교과서에서 읽은 이야기를 듣는 게 전부였다.     


내가 처음 교과서가 아닌 책을 접한 때는 초등학교 3학년 때다. 담임선생님은 학교에 남아서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담임선생님이 아닌 고학년을 담당하시는 선생님이 나누어주는 책을 받아서 읽었다. 고전읽기 대회가 있는 데 책을 읽고 학교 대표로 시험도 치러야 한다는 거였다. 초록색 표지로 된 전래동화, 세계명작동화, 위인전 등 난생 처음 독서를 접한 순간이었다.      


전래동화에는 심청전, 흥부놀부, 콩쥐팥쥐, 장화홍련전, 며느리의 방귀, 옹고집전,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등 할머니에게 듣지 못했던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많았다. 할머니는 밤에 손톱을 깎지 못하게 하셨고, 낮에 손톱을 깎으면 꼭 아궁이에 버리게 하셨다. 아무데나 버리면 내 손톱을 주워먹은 쥐가 나와 똑같은 사람이 되어 나타난다고 겁을 주곤 하셨다. 이런 내용들이 전승되는 이야기 속에 나오고 있는 것도 신기했다.      


세계명작동화는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다. 백설공주, 신데렐라, 행복한 왕자, 벌거벗은 임금님, 완두콩 오형제, 엄지 아가씨, 인어 공주, 미운 오리새끼, 성냥팔이 소녀, 백조 왕자, 헨젤과 그레텔, 개구리 왕자, 왕자와 거지,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등 온 세상이 공주와 왕자였다. 할머니가 새벽마다 잠을 깨워 아침 청소를 시킬 때마다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마귀할멈이 아닐까 생각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행복한 왕자에게 감동했고, 성냥팔이 소녀가 너무 불쌍해서 마음아팠던 어린 내가 있다.      


커서 고전읽기는 1960년대부터 1970대에 ‘자유교양대회’라는 이름으로 전국 초중고교 학생들에게 책을 읽도록 유도하고 책 내용에 대해 콘테스트를 하는 국가사업이었음을 알게 됐다. 국민교육헌장을 다 외워야 집에 갈 수 있었던 시절, 고전을 읽고 ‘조상의 빛나는 얼을 이어받아 민족중흥을 이루자’는 취지였다고 한다.     

 

우리 학교는 대회에서 입상하지 못해 도대회에 나가지 못했지만 나는 개인상을 받았다. 그때부터 나의 책읽기가 시작됐다.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서 읽을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도서관이라고 해봐야 음악실인지, 과학실인지 구별할 수 없는 작은 공간이었지만 대출증에 칸이 늘어가는 기쁨이 있었다.      


중학교에 가서도 나의 도서관 사랑은 계속되었다. 그 시절에는 한국문학에 대한 정보가 없었서인지, 한국문학이 알려지지 않아서 인지 주로 세계문학을 읽었던 기억만 남았다. 톨스토이, 모파상, 서머싯 몸, 도스트옙스키, 헤르만 헤세, 생텍쥐베리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 때 읽었던 책들의 내용은 가물가물하지만 그 작가들의 이름을 알았기에 계속해서 그들의 작품을 읽는 계기가 되었다. 그 시기에도 책을 많이 읽고 제법 철학적인 질문들을 하며 책 내용을 잘 이해하는 거 같은 친구가 있었는데 나는 내용 이해보다는 그저 스토리 라인을 따라 줄거리만 대충 아는 정도였다.       


고등학교 때는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나 헤르만 헤세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류의 책에 한동안 빠져 있었다. 괜히 슬픔을 느끼는 거처럼 행동하고 싶어했고, 비가 오거나 낙엽이 지면 센티멘탈에 젖어들고 싶어했다. 이 시기에는 시(詩)에도 관심이 많았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짝꿍은 곽티슈에 들어있는 화장지에 유치환 시인의 ‘그리움’을 멋진 글씨체로 적어서 주었다. 지금도 기억난다. 그 시가.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청록파 시인으로 불리는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시인의 시를 외우며 감성을 한껏 뽑냈다. 그 시절부터 우리나라 문학들을 접하게 됐다. 대학에 다니는 언니 덕분이었다.  박완서, 박경리 선생을 알게 되었고, 이외수, 김홍신의 소설을 읽고 충격을 받기도 했다.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국어선생님이어서 일까? 아니면 책을 읽다보니 유일하게 국어과목을 잘해서 일까? 나는 국어국문학과에 진학을 했고, 본격적으로 한국의 작가들과 시인들을 만났다. 이청준, 이문열, 조정래, 황석영, 최인호, 윤흥길, 김주영, 송기숙, 강석경, 양귀자, 신경숙, 공지영 외에도 많은 작가들을 만났다. 또한 황미나, 신일숙, 강경옥, 이미라, 김혜린, 허영만, 이현세에 빠져 만화방을 드나들며 빌려다 친구들과 돌려가며 밤새워 읽었다. 노동문학과 철학책을 접하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책을 읽으며 나는 사회인으로 나아갔다.  

    

책은 새로운 세계에 눈뜨게 하는 또 하나의 세상이었다. 무엇보다 책은 재미있다. 감동과 교훈도 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궁금증을 해소해주고, 문제에 봉착했을 때는 해결책을 준다. 나는 책을 통해 가치관을 형성하게 되었고, 책 속에서 길어올린 문장들은 한걸음씩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성인이 되어서는 심리학을 만나 한층 삶에 깊이를 더하게 되었다. 책은 나를 성장으로 이끌어주는 멘토이자 선생이자 스승이다. 오늘도 나는 책속으로 오롯이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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