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대로다. 독서모임의 모임장이 되었다.
기존에 가입했던 독서모임이 우리지역 주민이면 누구나 가입할 수 있는 소모임이었다면, 내가 만든 독서모임은 같은 회사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모임이다.
시작은 친한 동기들과 맺어진 주4시간 스터디 모임이었다. 각자 공부나 독서한 시간을 사진과 함께 인증하면서 주4시간 이상을 채우는 것이 목표이다.
이 모임에서 친해진 Y와 H가 우리 독서모임의 멤버들이다.
여느때와 스터디에서 다른 사람이 인증하는 걸 보는데 Y가 필사한 것이 눈에 띄었다. 읽은 책을 기록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때여서 방법을 물어보았다.
기록하고싶은 부분을 사진 찍어놨다가
필사를 한다
이것이 Y의 답변이었다. 독서를 하면서 필사를 하는 건 중간에 흐름이 끊긴다는 단점이 있었는데 그 단점을 해결해주었다.
이때 나눈 대화 이후로 이 친구가 읽는 책이 궁금해졌다. 같이 얘기를 나눠보면 좋은 시너지가 나지 않을까.
그래서 Y는 우리 독서모임의 1호 멤버가 되었다.
2호 멤버는 H이다. H는 평소에 영화광이고 철학적으로 고민하는, 내가 가장 의지하는 동기이다. 회사 동기라고는 하지만 나보다 8살은 많은 인생 선배인데, 그래서인지 인생의 갈림길에 서거나 문뜩 누군가의 조언이 필요할 때는 H를 찾게 된다.
여튼 H는 특히나 해외 소설을 좋아한다. H가 모임에 들어온다면, 인물의 이름이 어려워 국내소설만 고집하는 내게 새로운 도전이자 그녀와 지혜를 공유할 수 있는 접근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한 차례 거절은 있었지만 모임의 목표와 그 진행방향을 철저히 설명한 덕에 그녀를 영입할 수 있었다.
모임장으로서 이 모임의 목적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다.
직장생활의 피로도를 덜고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긍정적인 인풋을 주고받는다
이것이 목적이다. 그래서 모임의 이름도 ‘독핑교’이다.
‘독서를 핑계로한 교양수다모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세운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첫 번째, 일지는 쓰지 않는다.
가끔 독서모임을 가보면 일지나 기록지를 쓰는 모임이 있다. 물론 나도 이 방법을 굉장히 좋아하지만, 그걸 작성하는 것이 스트레스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록에 대한 의지는 누군가 강요했을 때보다 스스로 했을 때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무엇보다 ’직장의 피로도를 덜기 위한‘ 모임인데 하루종일 문서를 보다 온 사람들한테 글을 작성하는 과제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저 편하게 오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두 번째, 모임 시간에 직장 얘기 금지
같은 회사사람들이랑 여러 모임을 갖는다. 일로 만난 사람들이다보니 그 어떤 모임에서도 일 얘기를 피할 수 있는 곳은 없다. 새어나가는 물을 손으로 잡을 수 없듯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주제이니까. 그래서 이 모임에서만큼은 일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각종 직원 이슈나 쌓여 있는 일은 일은 잠시 묻어두고 각자 자신한테만 집중해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직장과 내 삶을 분리할 수 있고 저연차에서 오는 끝없는 불안감을 사무실을 떠날 때에 해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세 번째, 단 한 권의 책을 못 읽었더라도 괜찮다
인풋의 소재는 다양하다. 책뿐만 아니라 영화, 음악, 뉴스, 블로그 글 등 그 어떤 것도 영감의 소재가 될 수 있다. 외부의 자극에서 느끼는 생각들을 내면에서 정리해보고 다시 외부로 표현하는 과정을 통해 모임원들은 서로 상호작용할 수 있고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받을 수 있다. 그렇기에 그 어떤 것도 괜찮고 딱히 발제할 주제가 생각나지 않으면 모임원들의 발제 주제에 열심히 응해주기만 하면 되는 것.
그렇게 몇 가지 원칙을 고수하며 자유롭게 운영하는 방안으로 첫 번째 모임이 성사되었다.
첫 모임에서 내가 스타트를 끊었다.
전날 노트에 정리해 간 발제 주제를 처음으로 한 명씩 돌아가면서 자신이 읽은 책이나 봤던 영화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각자의 성향이나 관심사가 다르기에 처음에는 약간의 어색함이 있었지만 곧잘 다양한 주제를 도출해내었다. 특히나 발제자의 주제 표현 방식이나 취향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고싶을 정도였으니. 시간 가는줄 모르고 얘기하기 바빴다.
기록을 안 하겠다던 나였지만, 그날 등장한 수많은 작품들을 놓치기에는 아쉬웠다. 언젠가 오늘의 대화를 떠올리며 ‘그때 우리가 얘기 나눴던 작품 이름이 뭐였더라’ 궁금해질 때 참고할 수 있도록 간단하게 정리해 밴드에 올렸다.
색다른 인풋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찾는 것도 소중한 시도이지만 이렇게 내가 직접 만들어보는 것도 뜻깊은 일이다. 사람의 관계에서도 그사람이 내가 원하는 대상이 되길 기다리고 바라는 것보다는 일단 나부터 먼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처럼 말이다.
내 자신을 탐구하는 길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 독서모임이 멤버들에게도 쉼터이자 영감의 시간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