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청춘의 밀려오는 파도 이야기
사랑은 마약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내 뇌는 거부할 수 없는 도파민과 페닐에틸아민, 옥시토신 따위의 호르몬으로 점-철되어 더는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게 된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그 아이에게 첫눈에 반한 그날 이후로, 아직까지도 나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갇혀 살아가고 있다. 이제는 재회조차 금지된, 현실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그 아이가 줄곧 내 마음속에 머물고 있다. 마음이 내몰릴 때 나타나 내 마음을 헤짓고 나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수한 미소를 내게 짓고선 뒤돌아 떠나간다.
고통은 늘 남겨진 나의 몫이었다. 그 애와 관련된 SNS를 미친 듯이 뒤지는 것도, 길을 걷다가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몇 분이고 그 사람을 바라보게 되는 것도, 이따금씩 미치도록 그리운 감정이 올라오고 곧 허무로 바뀌는 일련의 과정도, 새롭게 만나고 싶은 사람을 돌아보면 그 아이의 모조품만 내가 모아 오게 된다는 것을 알고, 더는 대화를 지속해 나갈 수 없었을 때도, 이 모든 것들이 각자의 주기를 두고 내게 찾아올 때도,
나는 그 아이를 단 한 번도 원망한 적이 없었다.
얼마나 고통스럽게 나를 헤집고 가도, 잊혀 가는 그 아이를 다시 한 번 뿐이라도 되새길 수 있어서 늘 감사했다. 내 마음은 쓰나미가 휩쓸고 간 후회의 마을이다. 파편들은 오직 무너진 건물들과 침수된 길가들. 거대한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지시하지만 간접적으로 추측만 해볼 수밖에. 쓰나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쓰나미와 함께 휩쓸려가 버렸다.
그러했던 마음의 심상은 이제 어느 해변가에 지어진 모래성이 되었다. 소중히 쌓아 올린 모래성은 밀려오는 파도에 의해 휩쓸려 사라질 운명이다. 예전엔 모래성을 빚어내는 과정 자체에 의미를 부여했다. 나는 모래성과 파도를 각각 사랑하지만, 하나가 다른 하나를 무너뜨리는 과정까지 사랑할 수는 없었다. 모래성이 무너질 때마다 나는 절망했다. 계속되는 모래성의 붕괴에 비통할 심정마저 남아있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모래성 짓기를 관두었다. 웬걸? 이제는 파도가 자기 스스로 모래성을 빚고야 말았다. 미처 다 경악하기도 전에 파도는 자신이 지은 모래성을 무너뜨린다. 이 얼토당토 없는 일을 겪고 나는 울음을 터뜨렸고야 말았다. 파도는 내게 자신이 모래성을 박살 내버리는 과정을 똑바로 보라는 듯 반복해서, 모래성을 짓고, 또 무너뜨리기를,
수없이.
계속 울고만 있을 수는 없어서, 어쩌면 파도에 대한 반항심에 나는 이를 악물고 그 과정을 두 눈으로 똑똑히 담아 보았다. 빛나는 모래성의 광원은, 파도에 의해 부서질 때의 햇빛과 파도 자체의 선명한 빛깔과, 또한 그것의 윤슬이었다.
기어코 또 절망하고야 말았다. 아름다웠던 건 모래성이 아니라 파도였구나.
허무에 잠겨 파도를 바라보니, 파도가 내가 애써 지은 모래성을 망가뜨리는 그 장면 자체가, 장관이었고 하나의 예술이었다. 파도는 너무 아름다웠다. 스스로도, 내 모래성을 무너뜨릴 때도,
파도는 날 비웃는다.
하루하루를 매듭지으며 열심히 살아가다 보면, 그래서 이제 기억이 희미해질 때쯤 또다시 꿈속에 나타나 나를 휘젓고 사라진다. 조각난 내 마음을 주워 담는 건 이제 익숙하다. 파도는 매번 비슷하게 내 모래성을 짓밟지만, 모래성이 무너지는 이유는 비슷해 이제는 손쉽게 수리할 수 있다. 노하우가 생긴 건지, 내가 비슷한 방식으로만 무너지도록 취약점을 만드는 건가는 모르겠다.
자신의 파도가 얼마나 매몰찬지, 자신의 모래성이 얼마나 빛나는지에 대한 보통은 무의미한 논쟁을 벌이고 나면 깨닫는 점이 있다. 누구에게는 무너질 모래성이 없고, 누구에게는 무너뜨릴 파도가 오지 않고, 누구에게는 그 두 가지가 동시에 없다. 그리하여, 고통스러운 예술적 환희는 실은 선택받은 자에게만 허가된다는 것을. 그리하여 나는 ‘저주받은 행운아’라는 사실을.
도파민과 페닐에틸아민, 옥시토신의 파도는 내리치며 나를 중독시킨다. 그리고 파도의 휘몰아침이 끝나면 그것에 중독되어 미친 듯이 또다시 갈구한다. 사랑은 마약이다. 잠깐의 그 기분 좋음을 위해 그것이 없을 때의 감당할 수 없이 몰려오는 금단 증상을 이겨내야 한다. 둘 다 불꽃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맹목적인 과정이지만, 세상이 하나는 고결하며 다른 하나는 악마라고 치부해 버린다.
그 아이는 내게 파도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계절이 그 아이였다. 해를 거듭하며 우리들의 만남은 더욱 성숙해져 갔었고, 시간에 배정된 계절에 나의 기억을 소중히 털어놓았다, 만남과 헤어짐을, 그 사이의 나날들과 그 이후의 절망감을. 그래서 나는 매년 감정의 파인 다이-닝을 맛본다. 처음엔 오묘한 드레싱의 샐러드, 메인 디쉬는 달달한 피자에, 끝맛은 쌉쌀한 아니 씁쓸한 맛이 나는 우롱차 정도로 비유해 볼까, 참 전형적이다만 매 해, 매 계절을, 어쩌면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모든 순간이 그 아이와 함께였다. 자아를 가지게 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 아이는 늘 나의 곁에 머물러 있다. 참으로 못되게 내 마음을 주기적으로 무너뜨리고, 떠나갈 때의 순수한 미소로 모든 것을 정당화시켜 버릴 뿐이다. 세상이 이렇게 단순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 아이를 제외한다면 내 청소년기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나는 청소년기 동안 늘 마약에 중독되어 있는 피폐한 삶을 살아갔다는 뜻이다. 너를 그만 사랑하고 싶으면서도 너를 너무 사랑하고 싶다. 그래서 사랑은 마약이다. 나는 사랑을 사랑하는 거지 마약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런데 사랑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본질인 마약도 사랑해야 한다니, 그리고 인간은 그러한 마약을 사랑하고 사랑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저주받은 것인가에 대한 고찰을 해 보면. 너는 사랑을 사랑하지 않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파도가 모래성을 내려칠 때 여러 감정이, 울분이 뒤섞여 올라온다. 아름다운 풍경을 관조함에 오는 기쁨과, 쌓아 올린 모래성이 맥없이 무너짐의 슬픔, 기쁨과 슬픔의 연속 선상 위에 존재하는 오묘하고도 미묘한 감정들, 나는 이제 그 감정들까지 사랑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내가 한때 정말로 소중히 여기던 사람의 파도가 남긴
유산이니까, 내가 파도를 사랑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고, 파도가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조금이나마 고통을 덜 마주하고, 쾌락을 더 느끼기 위해 한 일련의 모든 동작들은 타인이 보기에는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나는 너를 사랑하기로 했다. 지극히 이기적인 동기에서, 왜냐하면 너를 배제하면 나를 정의를 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내가 그때의 너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 시절의 너를 기억해 줄 사람은 이 세상에서 아무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너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단 한순간도 너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너를 사랑하며 지금껏 잠깐의 환희가 있었고 남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은 고통이었지만,
단 한순간도 너 사랑하며 나 후회한 적이 없었다. 네가 내게 마약이라도, 나는 겸허하게 마약을 사랑하고 있다.
사랑은 마약이고 나는 마약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