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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emyungdan Oct 09. 2023

한글 알아요?

길을 묻다



태풍이 지나간다더니 아침부터 화창하다 축복이다. 차로 4시간을 달려 도착한 작은 면의 웨딩홀은 군데군데 풀이 자란 공터 옆에 한가하고 조촐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선생님~~!!"



면을 떠들썩하게 해 놓을 자태다

두 아이의 엄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더욱 광채가 난다

재작년에 만나 작년에 수업을 마친 바이링

모든 어둠이 그녀의 것이었던 적이 있었다

그녀가 웃고 있다

그렇다. 그녀는 삶을 놓친 적이 없었으니까.

그녀의 삶의 빛은 늘 주위를 비추고 있었으니까.

한국어 선생으로 얻은 사람

바이링이다




바이링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남달랐다

고향에 홀로 계신 시아버지 섬김이 한결같았고

엄마 아내로서의 본분에  어떤 꾀도 부리지 않았으며

펼쳐내는 음식의 향연은 놀라웠다

그 음식에 비하면 나의 가르침은 모자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곤 했었다

아니, 어쩌면

바이링이라는 선명한 삶의 가르침에

오히려 수업을 받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천 명 중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한 드문 삶의 방식을 보이는 여자

내가 지어준 그녀의 별칭은 천 분의 일이었다

사랑과 배려의 깊은 정서가 천사였다 땅으로 떨어진 천사가 아니라 한국을 입맞춤한 천사였다

바이링은 내 삶을 맵게 채찍질한다

한국어를 가르치는 내 일을 흐뭇하게 반추하게 한다. 앞으로 만날 학생들을 기대하게 한다





"한글 알아요?"

"...........

한글 두글 세글요?"




우리는 그때 배꼽이 어디로 날아갔는지 모를 정도로 웃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웃을 일만도 아니다




누구든 시작은 한국어라는 허허벌판이다

조금씩 씨를 뿌리고 꽃을 피우고

작지만 단 열매를 하나둘씩 거둬들이는 것이 우리의 작업이다

그 넓은 들판에  찬 곡식을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착실히 거름을 주고 풀을 뽑고 땀을 흘릴 뿐이다

참 품이 드는 일이다

궁금하다면 우리 함께, 어렵다면 우리 함께, 힘들다면 우리 함께, 슬프다면 우리 함께…




나는 다시 일할 힘과 흥얼거림을 주는 새참과 막걸리도 되고 싶었다.

학생이 새참과 막걸리가 되어 힘을 북돋우며 가기도 한다.

한국어지도사도 학생도 그 땅을 소중히 여기며 꾸준히 가꾸어 가야 하니

단언컨대 다욕과 과욕과 허욕은 금물이다.

가끔씩 한국어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한발 한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얼마나 벅찬가!

날씨만큼이나 우리의 일상에도 이상 기후가 있 

메말라 쩍쩍 갈라지는 뒤숭숭한 상황과 후텁지근하고 질척한 공기가  다문화가정을 뒤덮을 때가 있다  

남편의 불성실과 무능력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 문화적 차이로 심화되는고부갈등과 가족갈등, 자녀양육에 대한 불안과 학령기 사춘기 자녀와의 소통 부재, 남편의 외도, 경제적 정서적 물리적 중복 학대,..

음지의 겨울 골짜기처럼 사는 결혼이민자를 아픈 마음으로 경험할 때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짚어야 할 것은

가혹하고 불평등한 그 자리의 바탕엔 한국어가 크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의사소통과 공감, 자신의 삶을 지향할 자율성과 자립심의 관건인 한국어가 

구조 계단처럼 있다는 것이다. 상황을 호전시킬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연민 걱정 불안 불쾌감 막막함 체념 허탈 회한…

그러나 판도라 상자의 가장 밑바닥은 희망이라는 것을 한국어지도사들은 안다 나 또한 그렇다

이 일 없이 어찌 바이링을 만날 수 있었겠는가! 서로에게 배움을 주고, 안 보면 안부가 궁금한 한국어 듀오를 꿈꾸기에 더욱 그렇다

그런 꿈이 있기에 새 대상자의 어려운 현실도 차갑게 바라볼 수 없다

그들의 인생을 왈가왈부할 수 없다

그 사람의 향기를 찾고 희망을 찾아 길을 떠난다. 길을 헤맨다. 길을 잃기도 한다. 그리고 길을 묻고 길을 찾는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이리라

그녀들 또한 길을 묻고 길을 찾으리라…





누군가는 인생을 외국어와 같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 그 누구도 완벽하게 살 수는 없다

외국어와 같은 인생, 불완전한 인생, 불만족스러운 인생…

하지만 그 인생 이고 지고 들고 당당하게 가야 할 일이다

되풀이되는 일상, 자신 없어 한숨이 나오고 지긋지긋해서 내동댕이치고 싶어도

내가 선택한 삶, 쓸고 닦으며 가야 하지 않겠는가!




어제 시련이 있었다면 그것을 스승으로 삼자. 그리고 내일의 세파도 힘차게 가르고 가자. 생각대로 될 리 없는 인생이다

빈번한 인생 고초 느닷없고 기습적이지 않던가!  안면 몰수하고 이죽거리는 오늘의 현실은 어떤가

마침내 빛을 잃고 생명을 잃어 가는 우리의 믿음과 희망은...




나름대로 크고 작은 각오들이 필요할 것이다

길을 헤맬 수도 있다. 길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럴 때 다시 길을 묻고 길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 한국은 더 이상 동경의 대상이 아니다. 결혼과 함께 무지갯빛 꿈의 경계를 넘어 현실로 들어왔다

현실은 생활이며 생계며 관계다

자극이며 도전이다

필연적인 희로애락이다

이런 본질적인 현실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제대로 대처하기 위해선 직시를 통한 구체적 실천이 있어야 한다

현실은 가능성의 실현장이어야 한다

맞닥뜨린 낯선 현실, 그 직시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한국어라는 큰 산이 당장 눈앞에 있을 것이다

그 산을 어떻게든 넘어야겠다는 의연한 각오가 길을 찾는 시작일 것이다

가능성을 실천하는 지름길일 것이다




한국어 없이 한국 생활을 도모하기란 쉽지 않다. 아니 어렵다!

삶의 터전이 한국이라면 한국어를 피해 숨을 곳은 어디에도 없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상황에 발맞추기 어렵다. 상황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진다

일상에 부분적 마비가 오기도 한다

급하고 꼭 필요한 일이라면 남편이나 가족, 또는 그 누군가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

일방적으로 반복되는 의존은 친절을 인색하게 하고 관계에 피로감을 몰고 온다

자존감엔 파문이 인다

계획이나 의지는 무력해지거나 쉽게 주저앉는다

일상의 리듬과 심정 토로의 흐름이 막히니

진실은 보호받지 못하고 오해와 갈등이 진행될 수밖에 없다



결국 언어 현실은 삶의 질을 좌우한다



한국어를 해야 할 현실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어를 극복해야 할 절실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때로는 학생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때로는 쓴소리를 하며

한국어는 한국으로 들어가는 통로임을 비상구임을 누누이 강조했다.

생계의 방편을 찾고 구직을 염두에 둔 학생들에게 한국어는 경제적으로도 위세가 있음을 역설했다



 

'아이에 대한 꿈이 있다면 한국어부터 배워라!

한국어 능력이 부족해서 의사소통이 안 되는 엄마를

부끄러워하거나 원망하는 아이로 만들지는 말아라!'




나의 이 어조는 꽤 강경하고 단호했었다.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하는 한국어,

시급하고도 중요한 선택이어야 함을,

반짝하고 말 일이 아님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호소했다





그러는 사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이 희로애락처럼 오고 갔다

거듭되는 우여곡절에도 그동안 차지게 호응해 준 학생들이 기특하고 고맙다!

과감하게 한국에 진입한 그들이

애면글면 노력한 한국어로 한국 생활이 부디 순조롭기를 바랄 뿐이다



 

또다시 해는 떠오르고 우리는 또 무엇인가를 시작한다 

무엇의 시작이든 처음은 변변하지 않다

삶의 본능은 막중한 책임을 가지고

현실과 엎치락 덮치락 고전을 겪는다

그러나 환경이 어렵다고 스스로 물러나는 눈사람이 아니기에

삶의 수레바퀴는 일상의 중력을 감당하며 오늘도 굴러가고 있다




환경에 연주되는 악기는 되지 말자.

현실에 휘둘리는 코푸렁이가 되어선 안 된다.

주어진 환경을 연주하는 연주자가 되자.

그래야 절망도 희망으로 기울어지게 할 수 있다




후미진 집 좁은 방이면 어떠랴

작고 은  밥상 위면 어떠랴

책을 펼치고 입술을 들썩이고 연필에 힘을 준다

오늘을 다독이며 삶의 문을 두드리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어느새 나는 입술을 감쳐물고 인지상정의 기도를 한다. 따뜻한 동행을 꿈꾼다.




'비탈진 황무지에 한 그루의 나무를 심는 그들이 있습니다.

현실을 다잡고 더듬더듬 한발 한발 걸어가는 그들이 있습니다.

스쳐보지 말고 눈여겨 봐 주세요!

그들이 길을 묻고 길을 찾을 때

그들의 삶의 태도걸맞은

긍정의 에너지로 감싸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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