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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이 좋은 이유

엄마와 한라산을 등산하며

by Lablife

지금까지 등산에 대해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저 산이 있으니 오른다는 느낌이 강했는데, 이번 등산은 뭔가 달랐다. 감사한 순간이 많았고, 그 순간들을 잊지 않기 위해 이 글을 쓴다.


엄마와 단 둘이 함께한 두 번째 한라산이었다. 등산이 자신 없다던 아빠는 영실 코스까지 가는 운전기사를 자처했다. 나는 세 번째, 엄마는 여섯 번째 한라산 도전이었다. 환갑을 갓 넘긴 엄마는 이번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각오를 단단히 하고 온 듯했다.


아버지의 픽업/드롭서비스

오전 8시 30분쯤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빈 주차 자리가 없었다. 아빠가 데려다주지 않았다면 애를 먹을 뻔했다. 덕분에 편하게 영실 코스에서 출발할 수 있었고, 하산 코스도 자유롭게 정할 수 있었다. 첫 번째 감사한 순간이었다.


제설해 주시는 직원분들

주차장에서 한 시간 정도 걸어 올라가는 동안, 아스팔트 도로에서 제설 작업을 하는 직원분들을 만났다. 덕분에 편안하게 걸을 수 있었다. 두 번째로 감사한 순간이었다.


엄마의 손길

영실 등산로 초입에서 장비를 착용하려는데, 엄마가 아스팔트 위에 무릎을 꿇고 내 발에 아이젠을 신겨 주셨다. 장갑을 벗고 정성스럽게 아이젠을 착용시켜 주는 모습을 보는데, 문득 눈물이 고였다. 서른을 훌쩍 넘긴 딸이지만, 엄마 눈엔 여전히 아기 같은가 보다. 엄마가 신겨준 아이젠 덕분에 무사히 하산까지 마칠 수 있었다. 세 번째 감사함이었다.


등산 중 먼저 도움을 건네는 분들

막 산행을 시작하려는데 한 중년 부부가 사진을 부탁했다. 찍어주자 우리 모녀의 사진도 찍어주겠다며 여러 각도로 정성스럽게 담아주셨다. "어우, 사진이 정말 잘나오는데요. 가까이서도 찍어드릴게요!" 아저씨의 정성어린 행동과 말에 기분이 좋아진 엄마는, "즐거운 산행되세요!"힘차게 외치더니 나보다 앞서 출발한다.

이후에도 등산길 곳곳에서 먼저 "사진 찍어드릴까요?" 하며 다가와 준 분들을 만났다. 기분 좋은 제안에 우리도 거절하지 않았고 또 답으로 사진도 찍어드리기도했다.

하산길에서는 또 많은 분들이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넸고, 우리도 기분 좋게 답례했다. 산행 내내 기분 좋은 에너지를 나눠주는 분들을 만난 것, 그것이 네 번째 감사함이다.


먼저 앞서간 사람들

한라산에는 눈이 많이 쌓여 있었지만, 우리가 출발한 9시 30분쯤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나간 덕분에 길이 단단히 다져져 있었다. 아침에 출발이 늦었다며 걱정하던 아빠에게 엄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좀 늦게 출발해야 사람들이 눈길도 다져놓고 좋아." 앞서간 분들이 다져놓은 길을 편하게 따라갔으니 그게 다섯 번째 감사함이라 할 수 있겠다.



등산 중 정보를 나눠주신던 아주머니

한 아주머니가 먼저 다가와 우리 사진을 찍어주셨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하산 코스를 묻길래 영실로 내려갈 예정이라 했더니, "어리목으로 가야 다양한 경치를 볼 수 있다"며 적극 추천하셨다. 그 어머니의 말에 길 가던 중년 부부도 발길을 멈추고 아주머니께 "어리목은 어디 방향이에요?"물었다. 아주머니가 이 답답한 사람들을 보았나,라는 표정으로(선글라스를 끼셔서 못 봤지만 추측하건데) 자세히 설명해주셨다.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어리목 코스로 내려갔는데, 덕분에 가파르지 않고 편한 길을 선택할 수 있었다. 마지막이라던 등산이라던 엄마도 씩씩하게 하산하며 "다음엔 어리목 코스로 올라와야겠다"며 웃으셨다. 한라산 등산에 진심인 아주머니를 만나 소중한 정보를 얻은 것이 여섯 번째 감사함이다.


쾌청한 날씨

전날까지 강풍으로 입산이 통제되었는데, 우리가 등산하는 날은 날씨가 기막히게 좋았다. 엄마는 "이렇게 좋은 날씨는 처음"이라며 연신 "행복하다"를 외쳤다. 산행을 마친 후 사진을 보며 엄마는 한마디를 더 보탰다. "횡제한 것 같았어."

나도, 나도 엄마. 엄마랑 이렇게 좋은 날에 등산할 수 있어 횡제 한 것 같았어. 고마워.

끝내주는 날씨와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엄마에게 감사했다.


등산도 혼자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하루였다. 누군가 제설해 놓은 길이 아니었다면, 먼저 지나간 사람들이 눈길을 다져놓지 않았다면, 따뜻한 나눔과 응원이 없었다면, 이토록 즐겁고 행복한 산행이 가능했을까? 그 모든 것에 감사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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