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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rby Mar 17. 2024

홍콩에서는 한번쯤 애프터눈 티를 즐겨보자

Clipper lounge in Hong Kong, 2024

좀처럼 해외여행에서 음식에 대한 의견을 내지 않는 우리 집 결정권자께서 거의 처음으로 의견을 주셨다.


'홍콩에 가면 애프터눈 티를 마셔야겠다'


그리고 직접 예약까지 마쳤다. 사실 애프터눈 티는 홍콩에서만 마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멋진 호텔에서도 얼마든지 애프터눈 티를 마실 수 있다.

(카카오 선물하기에는 아직 쓰지 못한 롯데호텔의 애프터눈 티 세트 기프티콘 두 장이 일년 가까이 잠들어 있지만, 우리는 애프터눈 티를 마시기 위해 애써 소공동과 잠실을 찾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돈보다 소중한 해외여행 스케줄표에는 애프터눈 티가 당당히 자리를 잡았다.

홍콩의 애프터눈 티는 왜 특별할까.







애프터눈 티를 즐기기 위해 방문한 호텔은 만다린 오리엔탈. 홍콩 섬에 위치한 유서깊은 호텔이다.

만다린 오리엔탈은 우리나라에는 들어와 있지 않지만 세계적인 호텔 체인이고, 어지간해서는 숙박할 일은 없을 것 같은 비싼 호텔이다. 광화문 한복판에 자리잡은 포시즌스의 세계적인 라이벌이며, 내게는 파리 여행에서 방돔 광장을 지날 때 아 여기가 그 유명한 만다린 오리엔탈이야? 하는 감상으로만 남아 있는 곳이다.


하지만 홍콩의 만다린 오리엔탈은 다른 곳에서 만나는 만다린 오리엔탈보다는 조금 다른 감정을 느끼게 한다.

먼저, 이 호텔은 과거 홍콩을 점유했던 영국 자본이 건설한 호텔로 알려져 있다. 이제 홍콩에서 영국의 흔적을 찾기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지만, 홍콩에서 가장 번화가인 센트럴의 중심가를 지키고 있는 이 호텔이야말로 영국이 남기고 간 흔적 중 하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호텔은 홍콩이 사랑한 전설적인 명배우, 장국영이 생전 마지막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매년 장국영의 기일이 되면 그를 추모하기 위해 많은 팬들이 아직도 이 곳을 찾는다고 한다. 홍콩영화에 별로 관심이 없던 나조차도 들어본 이름이니, 이미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된 그의 영향력과 족적이 새삼 대단하다 싶다.



만다린 오리엔탈이 하나의 징표이듯, 홍콩은 아주 오랜 세월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무려 156년간. 말이 좋아 156년이지, 원나라가 중국 본토를 완전히 통치한 기간이 100년이 되지 않는다. 156년이면 두 문화가 융합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그 중 하나가 영국 귀족들이 즐기던 이 애프터눈 티라고 할 수 있다. 영국 본토에 가서 마시는 것이 아니라면, 아시아에서는 홍콩이야말로 가장 영국 문화를 즐기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홍콩의 애프터눈 티는 영국 애프터눈 티의 아류작일까.

만약 그렇다면 굳이 홍콩까지 가서 애프터눈 티를 즐길 이유는 없다. 물론 영국에 가는 것 보다는 홍콩에 가는 것이 시간이나 비용이 훨씬 가볍다. 하지만, 단순히 영국의 애프터눈 티 문화를 모방하는 것이 필요하다면 우리나라에서도 충분히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사진을 보니 우리나라의 애프터눈 티와 그렇게 다를 것 같지도 않은데.





여행이 늘 그렇듯이, 계획대로 모든 것이 돌아가지는 않는다. 생각보다 훨씬 추운 날씨로 인해 빅토리아 피크 구경을 일찍 마치고 나니, 예약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더 일찍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앞에 도착하고 말았다.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앞에는 과거 빅토리아 여왕의 동상이 있었다는 황후상 광장이 있다.


황후상 광장을 천천히 둘러볼 계획이었으나, 알고 보니 황후상 광장은 넉넉하게 잡아 20분이면 한 바퀴 돌고도 남을 작은 규모였다. 그러니 시간이 남아버렸고, 왠지 예약 시간 이전에 들어가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워 근처를 빙빙 돌았다. (다시 생각해 보면 들어갔어도 전혀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식당이 아니라 라운지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예약 시간 10분 전 화장실이나 들러야지 하고 만다린 오리엔탈의 화장실을 들렀는데, 생전 처음 받아보는 당황스러운 대접을 받았다. 세면대 앞에 직원이 기다리고 있다가, 일을 마친 고객이 손을 씻기 위해 세면대 쪽으로 오면 물 온도를 맞추어 미리 물을 틀어 놓는다. 그리고 당황스러움을 느끼면서 손을 씻고 있으면, 어느새 타월을 하나 들고 옆에 서서 기다린다. 그리고 타월을 준 다음, 화장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문을 열어 준다.


화장실에서의 그 극진하고 부담스러운 대접과 달리, 클리퍼 라운지 자체는 그런 화려함이나 부담스러움과는 거리가 좀 있는 모습이었다. 좋게 말하면 고풍스럽고, 나쁘게 말하면 상당히 오래 된 호텔 느낌. 어딘가 모르게 영웅본색에서 본 연회장 느낌도 좀 나는 듯 하다. 장국영과 함께 그때 그 시절에 머무른 것일까. 들어오기 전까지 만다린 오리엔탈의 이미지는 굉장히 부담스러웠는데, 막상 들어와 보니 그냥 한 이십분쯤 일찍 왔어도 상관 없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 홈페이지에서는 홍콩의 교통카드이자 체크카드인 옥토퍼스 카드를 주는 세트가 있었는데, 끝났는지 그건 없고 일반 애프터눈 티 세트를 주문하면 된다고 하여 그렇게 하기로 했다. 굳이 인원수 대로 주문을 할 필요는 없으나, 보통 2인은 그대로 2인 세트를 주문하고, 3인부터는 2인 세트에 차를 하나 추가하는 등의 방법으로 주문한다고 한다. 빵과 디저트류의 갯수와 양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간과하기 쉽지만, 엄연히 애프터눈 티의 주인공은 티라고 할 수 있다.

형형색색의 예쁜 디저트와 스콘 등에 자리를 빼앗기기 쉽지만, 애프터눈 티라는 이름 자체가 오후에 마시는 차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보통 몇 가지 홍차 중 하나를 고르거나 커피를 고를 수 있는데, 다양한 차를 즐기는 홍콩답게 선택 가능한 음료의 종류가 아주 다양했다.


홍콩의 애프터눈 티는 이 지점에서 남다른 의미를 가진다. 영국을 상징하는 애프터눈 티 문화는 다름아닌 중국에서 출발한 것이다. 특정 시간대에 홍차와 영국식 다과를 함께 즐기는 문화는 영국 고유의 문화이지만, 홍차 자체가 중국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출발한 홍차와 함께 즐기기 위해 영국의 다과인 샌드위치나 스콘, 디저트 등이 곁들여져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고, 이 문화는 전 세계에 영국의 대표 문화이자 영국인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함께하는 문화가 되었다.


그리고 이 문화가 출발지인 중국, 홍콩으로 돌아와 다시 한번 변화하게 되었는데, 홍콩에서는 영국식 다과에 홍차 외에도 다양한 중국 전통 차를 곁들이도록 꾸몄다. 녹차나 우롱차 등. 시그니처 티 또한 홍콩의 특징을 살려 우롱 티를 블랜딩한 것이다.


가지 차를 선택했는데, 하나는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의 시그니처 블렌딩 티라고 소개하고 있는 Taste of legend. 대단히 거창한 이름이다. 우롱차와 자스민, 오렌지 필과 바닐라 향을 입혀 블렌딩 한 티이다. 다른 하나는 복건성 지방의 큰 이파리를 사용한 Imperial tea. 홍차다.



애프터눈 티 세트는 사실 따로 조리할 것은 없는지라 빠르게 준비되어 나왔다.

화장실에서 느낀 부담스러운 친절함이 무색하게, 정작 라운지의 직원들은 그런 친절함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불친절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살가운 느낌은 아니고 본인은 정해진 본인의 일을 한다는 느낌이다. 정원사가 나무를 손질하면서 굳이 나무에게 친절함을 보여주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일을 대충 한다는 의미는 아닌 것처럼. 그냥 자기 일을 한다.


애프터눈 티를 즐기는 순서는 가장 먼저 따뜻하고 달지 않은 스콘을 크림이나 잼 등과 함께 즐기고, 그 다음으로 샌드위치, 마지막으로 트레이에 담긴 디저트를 덜 단 순서부터 즐기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굳이 얽매일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샌드위치를 먼저 먹기 시작했다. (배가 고프기도 했다.)


냉정하게 말해서, 샌드위치의 속재료가 동네 프랜차이즈 빵집의 샌드위치 속재료보다 훨씬 좋다는 것은 충분히 알겠지만, 그 이상의 감흥은 없다. 맛있긴 하지만 그 이상의 특별함은 없다는 의미다. 


다음 차례는 스콘. 스콘은 상당히 기대한 부분인데 스콘 자체의 맛 보다는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장미쨈 때문이었다. 의외로 덜 달고 은은한 장미향이 감도는 쨈은 스콘과 굉장히 잘 어울렸다.



사실 장미향이 잘못 사용하면 화장품처럼 느껴져서 먹기에 상당히 부담스러울 텐데, 그런 점을 잘 잡아내어 식욕을 해치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트레이에 담긴 디저트들은 굉장히 단데, 오히려 잼과 크림은 별로 달지 않아서 좋았다. 전반적으로 모양에 많은 공을 들였는데, 장미쨈 또한 색이 굉장히 예쁘다.



트레이에 담긴 디저트들은 하나하나 굉장히 손이 많이 간 듯 하다. 당근 케이크는 그렇게 예쁘지는 않지만, 베리류를 활용한 초콜릿이나 마카롱 등은 눈을 즐겁게 하기에 충분하다. 다만, 전반적으로 상당히 달아서 두 명이서 전부 다 먹기에는 다소 벅찬 느낌이 있었다. 하나하나의 맛은 좋다. 특히 견과류를 활용한 파이의 맛이 좋다.


디저트로 눈을 돌리기는 했지만, 애프터눈 티에서 가장 눈여겨 보아야 할 차는 정말 이 인테리어보다 더 고풍스러운 은식기에 서빙되었다. 은식기는 조금만 잘못 관리해도 녹이 슬어 버리는데, 겉면에 스크래치는 많이 나 있을지언정 녹이 슬지는 않았다. 관리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은식기는 중화권이 아니었다면 접하기 어려웠을 다양한 차를 담아왔을 것이다. 영국에 가본 적은 없어 자신있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우리나라에서 애프터눈 티를 즐기더라도 우롱차나 녹차를 주는 경우는 잘 보지 못한 것 같다. (보통 호텔에서 애프터눈 티 세트를 먹는 경우가 많으니, 달라면 주기는 할 것이다.)


왠지 이 은식기와 차를 보면서, 홍콩이라는 도시를 닮았다는 생각을 잠깐 해 봤다. 홍콩은 지리적인 위치와 영국 자본의 힘 등 여러 요소에 힘입어, 아시아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홍콩의 밤하늘을 수놓는 화려한 심포니 오브 라이트로 대표되는 홍콩의 야경은 이 도시가 얼마나 화려한지를 잘 보여주는데, 굳이 직접 가서 보지 않더라도 영화나 TV 프로그램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밤거리를 밝히는 네온 사인도 역시 홍콩의 화려함을 잘 보여준다. 분명 그 시절, 홍콩은 아시아에서 가장 빛나는 도시였을 것이다.



하지만, 홍콩의 화려함은 왠지 모르게 전성기를 지난 것 같은 느낌을 배제하기 어렵다. 실제 역사 및 정치적인 상황과 결부시키지 않더라도. 사실 그 약간의 빛바램이 홍콩을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일지도 모른다. 야경 명소로 유명한 스타의 거리에 서서 홍콩섬의 빌딩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밝게 빛나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90년대쯤, 그러니까 장국영의 시절에 멈춰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히려 낮에는 그런 느낌을 덜 받게 되는데, 조명을 걷어낸 홍콩섬의 건물들, 특히 금융가가 밀집한 고층 건물들은 결코 노쇠한 느낌이 없기 때문이다. 홍콩은 대규모 고층 빌딩 사이사이에 작은 공원들이 많이 있는데, 평일 점심에 거닐어 보면 여의도공원이나 광화문 광장을 산책하는 직장인들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밤이 되면, 굳이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아쿠아 루나의 모습 때문이 아니더라도 무언가 세월이 느껴지는 듯 한 다른 느낌이 든다.



중국의 차를 담고 있는 영국 스타일의 빛바랜 은주전자, 한때는 어떠한 스크래치도 없이 반짝거렸을 은주전자를 보며 홍콩이라는 도시가 가진 특유의 인상과 매력을 다시한번 떠올려 보게 되었다. 중국과 영국이라는, 각자 한 시대를 호령했던 세계제국. 그러나 지금은 각자 누렸던 최고의 전성기에 미치지 못하는 두 국가가 각자의 흔적을 이 홍콩이라는 도시에 아로새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외의 부분에서 한번 더, 중국과 영국 문화를 동시에 느끼게 되었다. 결국 너무 달았던 터라 몇 가지 디저트를 남기고 말았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남은 디저트를 포장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중국의 손님 접대 방식은 도저히 다 못 먹을 만큼 음식을 준비해 주고, 손님이 집에 갈 때 선물로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될까? 싶었는데 익숙한 듯 바로 가져가서 포장을 해 왔다. 포장용기 자체는 우리가 흔히 보는 갈색 종이 용기였지만.





만다린 오리엔탈, 홍콩의 애프터눈 티를 음식의 관점에서만 놓고 본다면, 열 다섯 가지나 되는 차의 다양성은 우리나라에서 만나기 어려운 좋은 구성이었지만, 디저트와 스콘, 샌드위치 등은 우리나라에서도 충분히 만날 수 있는 음식들이었다. 물론 시그니처인 장미쨈의 맛은 좀 더 특별한 느낌이 있었지만, 음식의 맛만 놓고 본다면 굳이 시간이 귀한 여행지에서 찾아가서 먹을 정도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콩의 애프터눈 티에는 무언가 특별한 느낌이 있었다. 분명 음식 맛은 아니다. 차는 이 특별한 느낌에 일정 지분을 가지고 있다. 고풍스런 인테리어도 어느 정도는 영향을 주었다. 오래 된 은식기는 나의 경우에는 더욱 더 많은 감정을 느끼게 했지만, 타인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내가 간과한 또 다른 부분이 다른 사람에게는 강렬한 인상을 줄지 모른다.


 파리나 로마처럼 보자마자 아 여긴 외국이구나 하는 도시들과 달리, 홍콩은 서울과 굉장히 비슷해 보이면서도 하나씩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는 소소한 차이들이 모여 묘한 이국의 느낌을 주었다. 홍콩의 애프터눈 티 또한 서울의 애프터눈 티와 미묘하게 하나씩 다른 부분들이 모여 조금 더 특별한 느낌을 갖게 만들었다. 그것이 이국의 관광객에게 홍콩이 가지는 묘한 매력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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